372. 환생자 (2)
이게 무슨 상황이지? 이크살은 생각했다.
픽시 또한 마찬가지였다.
‘제국의 기사다. 하지만 제국 기사가 왜.’
제국과의 크고 작은 전쟁은 일시적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북부도, 제국도, 점점 거세지는 용족의 공격을 막아야 했기 때문.
거기에 더해 제국은 요툰헤임으로부터 등장하는 요툰도 막아야 했다.
북부에 병력을 보낼 여력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눈앞에 제국의 기사가 나타났다.
검은 갑주로 온몸을 가린, 흑기사가.
거기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커다란 곰까지.
응? 잠깐만. 곰이라고?
퀴리리리릭!
용족이 몸을 일으키며 흑기사를 공격했다.
그러나 흑기사는 방패를 들어 안정적으로 막았다.
이크살과 픽시는 크게 놀랐다.
‘저 용족의 완력을 막았다고?’
‘마, 말도 안 되는!’
이크살과 픽시는 저 무시무시한 용족의 힘을 경험했다.
용족의 완력은 직전에 싸웠던 코모도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인간이라면 절대로 막을 수 없다.
‘그런데 어떻게……!’
저 흑기사는 용족의 공격을 막았다.
물론 두 발이 고랑을 그리며 뒤로 밀려나긴 했다.
그러나 그건 용족도 마찬가지였다.
놈은 기다란 목을 지면 위로 들어 올린 상태였고, 그 모습 그대로 밀려났다.
빠드득, 빠득, 지면이 갈라졌다.
놈이 지면 속에 얼마큼의 몸통을 숨기고 있는지는 모른다.
용족은 드래곤을 닮은 얼굴을 지녔을 뿐, 몸통은 마치 거대한 뱀과 같았다.
“포식을 시켜 버릴까.”
흑기사가 말했다.
다급한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담담한 목소리.
이크살과 픽시는 제국어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포식이라니.
저자는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가.
그때 흑기사의 눈이 두 전사를 돌아봤다.
“검은늑대 부족인가.”
이크살과 픽시의 눈이 커졌다.
이번엔 흑기사의 입에서 유창한 북부어가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서, 설마 북부인?’
투구 속으로 흑기사의 얼굴이 언뜻 보였다.
보통의 제국인과는 확실히 다른 생김새.
“이 녀석은 식량인가.”
흑기사의 물음에 두 전사는 답을 할 수 없었다.
용족의 공격이 다시 시작됐기 때문이다.
퍼엉! 펑! 콰아아앙!
흑기사의 방패가 용족의 공격을 막았다.
그는 공격 대신 방어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과연 하워드 스틸숄더로군. 골든핑거 이상의 장인이다.”
흑기사의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묘한 울림이 있었다.
흑기사와 용족의 싸움은 대단했다.
너무 대단해서 이크살과 픽시는 전투에 끼어들 엄두도 내지 못했다.
‘끼어들면 방해만 될 뿐이다.’
두 전사는 직감적으로 그것을 알았다.
게다가 자신들은 용족의 마비독에 감염됐다.
점점 더 몸을 가누기 어려워지고 있었다.
“정신 차려. 픽시.”
이크살이 픽시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강한 통증에 픽시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그러나 몸을 장악하는 마비의 기운으로부터 일시적으로나마 주도권을 찾았다.
“자리를 벗어난다. 우리 존재는 흑기사에게 방해가 될지 모른다.”
이크살의 말에 픽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전사는 둔해진 몸으로 후퇴를 감행했다.
혹여 흑기사가 위험에 처하면 돕기 위해 그리 멀리 떨어질 생각은 하지 않았다.
쾅! 콰아앙!
지면의 파편과 바위가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그중 하나가 이크살과 픽시를 향해 날아왔다.
엄청난 크기의 바위.
이크살은 지금의 몸 상태로는 회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있는 힘껏 픽시를 밀었다.
“이, 이크살!”
바닥에 나동그라진 픽시가 고개를 돌렸다.
거대한 바위가 이크살을 습격하고 있었다.
“이크사아아알!”
구우우웅.
묘한 공명이 이크살과 바위 사이에 떠올랐다.
픽시의 눈이 휘둥그렇게 변했다.
날아들던 바위가 공중에 멈춰 서있었다.
그것을 넘어 반대 방향으로 슬슬 이동하더니, 지면에 안착했다.
이크살과 픽시는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어 매혹적인 음성이 두 전사의 귀를 스쳤다.
“이 아이를 지키려는 마음씨가 가상하구나.”
두 전사의 옆엔 여자 한 명이 서 있었다.
이크살과 픽시는 순간 제국의 신 중 하나가 강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 정도로 여자는 아름답고, 신비로웠으며, 감히 손댈 엄두도 못 낼 정도의 위엄이 흘렀다.
지금 같은 긴박한 상황에서 등장했기에 더욱 그렇게 보이는지도 몰랐다.
“자리를 떠날 것 없다. 편히 관람해 보자꾸나.”
여자의 제국어는 일반적인 제국어와는 조금 달랐다.
상당히 예스러운 말투.
그러나 여자의 외모와 목소리와 너무도 잘 어울렸다.
“흐응. 그렇구나. ‘랜드웜(Land Worm)’의 마비독에 감염된 게로구나.”
“래, 랜드웜?”
“저 덩치만 커다란 용족의 이름이니라.”
여자가 품에서 자그만 유리병을 꺼냈다.
“한 모금씩 마시거라. 머지않아 마비독이 사라질 테니.”
이크살과 픽시는 그렇게 했다.
여자는 날아드는 바위로부터 자신들을 지켜 줬다.
게다가 저 흑기사와 동료인 것으로 보였다.
의심할 이유가 없었다.
“방패도, 갑주도, 이전보다 확실히 좋아졌구나.”
흑기사의 전투를 보며 여자가 웃었다.
그 매혹적인 웃음에 이크살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낌새를 느낀 픽시가 이크살의 등짝을 손바닥으로 후려쳤다.
“으아악!”
“……하여간 사내들이란.”
그러면서 두 전사는 놀랐다.
그사이 몸이 마비독의 영향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젠 무기를 확인할 차례로구나.”
여자의 목소리를 들은 것처럼 흑기사가 검을 뽑았다.
그의 갑주와 방패처럼 흑색이었지만, 은은한 금빛을 발하는 거대한 검.
한눈에 봐도 양손으로 파지해야 하는 크기였다.
그런데 흑기사는 한 손으로 그것을 들었다.
검을 쥐자 흑기사의 기운이 더욱 매서워졌다.
이크살은 그의 자세에서 결코 범접하지 못할 어떤 절대적인 무(武)를 발견했다.
스컹.
그리 큰 소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 소음은 혼탁했던 전투 상황을 일거에 종료시켰다.
랜드웜의 머리가 잘렸다.
어찌나 반듯하게 잘렸는지 절단면에선 피조차 흐르지 않았다.
푸슈슛! 푸슈슈슈슛……!
잘린 머리가 지면에 떨어진 뒤에야 핏줄기가 솟았다.
말없이 그것을 바라보던 흑기사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저벅저벅 걸어왔다.
“다시 묻지. 너희는 검은늑대 부족인가.”
“그, 그렇소.”
이크살의 대답에 흑기사가 씩 입가를 올렸다.
그가 투구를 벗자 땀에 젖은 긴 흑발이 묘한 광채를 발했다.
그제서야 흑기사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한 이크살과 픽시는 확신했다.
흑기사는 북부인이다.
“검은늑대 부족의 족장을 만나고 싶다.”
이크살이 뭐라 답하기 전에 저만치에서 곰이 달려왔다.
놀랍게도 곰은 이쪽으로 달려오며 점점 덩치가 작아지더니, 종래엔 자그만 새끼곰이 되었다.
끼아옹! 흑기사의 어깨에 올라 얼굴을 핥는 새끼곰을 보며 이크살은 아연실색한 얼굴이 됐다.
픽시 또한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표정으로 그 광경을 봤다.
“하워드 스틸숄더의 실력엔 만족한 것이더냐.”
“뭐, 그렇지.”
“그렇다면 철혈귀검도 한층 강해졌겠구나.”
여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흑기사가 이크살을 봤다.
“다시 말하지. 난 검은늑대 부족의 족장을 만나고 싶다.”
“……먼저 당신이 누구인지 밝혀 주었으면 좋겠소.”
손안의 검과 방패를 갈무리하며, 흑기사가 답했다.
“검은늑대의 아틸라.”
* * *
“영주 나리.”
“왜 부르슈.”
“아틸라와 바토리는 잘 도착했을까?”
“아이고 살쾡이 암살자. 걱정을 할 사람을 하쇼. 지금의 아틸라 님은 신과 악마도 때려잡을 법한 강자인데.”
“응? 하지만 아틸라는 인간의 몸에 갇혀 있잖아. 그래서 완전한 힘을 발휘할 수는 없다고 하던데? 그 뭐냐, 예전의 라일처럼 말이야.”
“아무리 그렇다 해도 고작 고위악마인 메피스토펠레스와 비교해서 되겠수? 아틸라 님은 무려 대악마 아몬! 아니, 사도들의 대장 엘의 힘을 지녔다지 않소!”
“흠. 그건 그래.”
“강해진 건 너 또한 마찬가지 아닌가. 오토.”
“헤헤. 우리 발키리 아가씨가 또 날 알아봐 주는 거요? 으헤헤헤헤.”
“나도 아가씨라고 불러줘 영주 나리.”
“아이고 내 몇 번을 말하요. 살쾡이 암살자에겐 도저히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질 않소.”
“뭐야. 왜! 왜! 왜애애애!”
“어이 꼬마. 저런 한물 간 늙다리에게 아가씨란 말을 들어 뭘 하려고?”
“하지만 벨라!”
“하, 한물 간 늙다리라니! 마, 말 다 했소! 내, 내 이리 봬도 이번에 황성에 들른 것을 계기로 상당히 강해졌……!”
“호오 그래? 그럼 지금 당장 붙어볼까?”
“아아니 누가 싸운다고 했수? 거참 오해가 심하시네. 지, 지금은 우리 목적을 생각해야 할 때가 아니요! 우린 아틸라 님의 명령 같은 부탁을 받아 언데드 놈들을 처리하러 가고 있소! 그런 와중에 동료끼리 쌈박질이라니! 암암, 안 될 말이지!”
“방금 너무 한심해 보였어 영주 나리.”
“한심해 보였다. 오토.”
“크흑! 발키리 아가씨까지……!”
그때까지 가만히 듣고만 있던 남자가 한숨을 내뱉었다.
“이렇게 시끄러운 일행이라니. 전부터 어느 정도 알고는 있었지만 도저히 같이 못 다닐 정도로군.”
“그, 그러고 보니 관조자 양반은 바토리 아가씨의 위치를 찾을 수 있는 것 아니요?”
관조자 양반, 리베르 파테르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걸 이제야 묻는다고? 하여간 베르트랑 남작령에서 도적질이나 할 때부터 도통 머리가 안 돌아가는 놈이란 건 내가 알아봤지. 닭대가리 같으니라고.”
“다, 다, 닭대가리라니!”
오토가 발끈했다.
그러고 보니 생각났다.
리베르는 한때 가스코뉴 공국의 베르트랑 남작령에서 촌장질을 하고 있었다.
오토가 아틸라와 처음 만나게 된 계기가 바로 그곳의 촌장이었던 리베르가 아틸라에게 도적단 퇴치를 부탁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굽실대며 동전 주머니를 건네던 촌장의 모습을 떠올린 오토가 험상궂은 표정을 했다.
오토는 리베르의 전투를 직접적으로 본 적이 없다.
가스코뉴 공작성에서 아틸라와 맞붙었을 때도, 사바흐의 연막 탓에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오토는 이런 생각을 했다.
‘호, 혹시 지금의 나라면 이길 수도 있지 않을까.’
엘의 환술 세계를 거치며 자신은 성장했다.
뿐만 아니라 하워드 스틸숄더 덕에 무기와 방어구도 더욱 강력해졌다.
차앙! 오토가 검과 방패를 꺼냈다.
“거, 건방진 관조자 나부랭이 녀석! 혼쭐을 내주겠다아아아!”
리베르가 재차 한숨을 쉬며 손을 뻗었다.
그렇게 일행 중 먹이사슬 최하위에 위치한 오토의 반란은 관조자의 손짓 한 번에 제압됐다.
* * *
이크살과 픽시는 흑기사와 여자 마법사를 부족의 땅으로 안내하고 있었다.
동료들의 시체는 최대한 수습해 말 등에 태웠다.
죽은 용족의 고기도 챙겼다.
그 와중에 또 하나의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포착됐다.
토막 낸 고기 일부를 자그만 새끼곰이 꿀꺽꿀꺽 삼킨 것이다.
자신의 몸뚱이보다 십여 배는 커다란 고기가 그렇게 새끼곰의 입안으로 들어갔다.
심지어 고기는 여자 마법자가 꺼낸 얇은 천에 포장된 상태였다.
이크살과 픽시는 수시로 제 볼을 꼬집어 봤다.
꿈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