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1. 환생자 (1)
제국 북서부의 척박한 땅.
이곳에 사는 이들은 ‘테라루스 일족’이라 불리던 고대인의 후손이다.
테라루스 일족은 먼 옛날 요툰 전쟁에서 요툰의 편에 섰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신의 권능이 아닌 ‘자연의 힘’을 숭배하던 그들은 요툰과 인간의 공생을 주장했다.
‘요툰은 본래 이 세계의 주인이었다.’
‘우리는 요툰과 더불어 살아갈 길을 모색해야 한다.’
테라루스 일족이 신의 권능을 믿지 않고 자연의 힘을 숭배하게 된 것엔 이유가 있었다.
그들은 대륙에 수해가 생기기 전 동방에서 살아가던 이들이었다.
그들은 사냥으로 생계를 꾸렸다.
그러다 보니 사냥에 실패하면 며칠이고 굶는 일이 허다했고, 오히려 사냥감에게 사냥 당하는 일도 발생했다.
하루하루가 생존을 위한 전쟁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연을 두려워하고 숭배했다.
‘어머니 바위이시여. 오늘의 사냥을 성공할 수 있도록 보살펴 주시옵소서.’
‘하늘이시여. 부디 비를 내려주시옵소서.’
그러던 중 동부의 일부 고대인들이 서부로 진출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들은 동부와는 다른 방식으로 발전한 서부의 문명을 보고 배운 뒤, 동부에 그것을 전파하고자 했다.
그들이 바로 최초의 테라루스 일족이다.
그러나 테라루스 일족의 목적은 이뤄지지 못했다.
많은 세대를 거치며 서부의 생활에 점점 익숙해진 탓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수해였다.
‘수해는 자연의 징벌이다.’
‘수해가 우리 앞길을 막은 것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리의 사명은 이곳, 서부에서 자연의 이치를 따르는 생활을 하는 것이다.’
테라루스 일족은 서부에 정착했다.
이후 동부와 서부를 왕래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의 지도자는 동방 최초의 군주인 대무신왕 무휼.
그와 함께 움직였던 당시 동부 왕가의 인물들이 테라루스 일족에 흡수됐다.
이후 그들은 ‘검은늑대 부족’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검은늑대 부족의 승마술은 대륙 제일이다!’
‘어떻게 저런 말도 안 되는 승마술을 지닌 거지?’
검은늑대 부족에겐 오랜 전설이 있다.
먼 훗날 대무신왕의 후손이 죽은 이의 몸을 통해 환생해, 온 대륙에 동방의 깃발을 나부끼게 할 것이라는 이야기.
검은늑대 부족은 지금도 그 전설을 믿었다.
언젠가 대무신왕의 후손이 성검 무휼과, 신수 그리즐리와 함께 부족을 찾아올 것이라 여겼다.
* * *
“사냥감이 통 보이지 않는군.”
기다란 검과 독특한 모양의 나무 기둥 몇 개를 허리에 찬 사내가 중얼거렸다.
옆의 여자가 말을 받았다.
“당연하지 이크살. 용족들이 닥치는 대로 잡아먹었으니까.”
이크살의 눈썹이 꿈틀댔다.
당연한 말이지만 북부인은 용족을 좋아하지 않는다.
“배고파 죽겠네. 이래선 오늘도 허탕일 거 같은데…….”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마라 픽시. 위대하신 하늘께서 우릴 사냥감에게 인도하실 거다.”
이크살이 말을 잘랐다.
픽시라 불린 여자가 입술을 비죽대며 말했다.
“그 위대하신 하늘은 용족들이 장악하고 있는데도?”
“잠시일 뿐이다. 결국 하늘께서 용족을 모조리 몰아내실 거다.”
“뭐, 그렇다면 좋겠지만.”
사냥을 나선 검은늑대 부족의 전사는 일곱이었다.
그들 중 몇몇은 하늘을 예의주시하며 움직였고, 나머지는 지상을 살폈다.
인간에게 적대적인 용족이 최근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제국의 용기사들은 북부에 나타난 적대적 용족까지 처리해 주지는 않았다.
그래서 북부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용족들을 제거해야 했다.
“긴장을 늦추지 마라 픽시. 언제 어디서 용족들이 나타날지 모르니.”
“용족이 나와 주면 오히려 좋은 거 아니야? 커다란 놈 한 마리 잡으면 며칠은 배불리 먹을 수 있을 텐데.”
픽시가 키득거렸다.
이크살은 인상을 찌푸릴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역시도 마음 한구석에선 픽시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정말 이대로라면 용족이라도 뜯어 먹어야 할 판이로군.’
이크살은 부족에 남은 아이들을 떠올렸다.
한창 먹어야 할 나이에, 아이들은 제대로 음식 섭취를 못 하고 있다.
실제로 이크살과 픽시는 용족 사냥에 성공한 적이 있었다.
개체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용족은 제법 먹을 만한 사냥감이다.
“쉿.”
이크살이 말을 멈춰 세웠다.
뒤를 따르던 전사들도 말을 멈췄다.
전사들은 호흡마저 멈춘 채 주위를 둘러봤다.
회색 바위들이 펼쳐진 너른 평원.
움직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크살은 분명 기척을 포착했다.
‘평범한 사냥감은 아니다.’
내내 장난스러운 얼굴이던 픽시의 표정도 차갑게 굳었다.
픽시는 이크살이 지닌 감지 능력을 믿었다.
이크살은 ‘주술(呪術)’의 힘을 지닌 전사다.
일곱 전사는 소리 없이 말에서 내렸다.
이크살의 지시에 따라 각자의 무기를 뽑아들고 전진했다.
발소리는 없다.
이들은 모두 숙련된 사냥꾼이었다.
전사들의 얼굴에 땀방울이 맺혔다.
부릅뜬 안구에 혈관이 돋아났다.
한 발 한 발 전진할 때마다 바늘로 동공을 찌르는 듯한 감각.
이크살은 저만치 커다란 바위를 노려봤다.
심상치 않은 기척은 그곳에서 감지되고 있었다.
‘바위 뒤에 숨은 건가.’
여전히 하늘 위엔 흰 구름 말고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놈은 저 거대한 바위 뒤에 몸을 숨기고 있을 것이다.
“간다. 픽시.”
픽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호흡이 잘 맞는 짝이다.
뒤에 선 다섯 전사 역시 수없이 생사의 경계를 넘은 이들.
타앗.
한 마리 야생 짐승처럼 이크살이 전진했다.
나머지 전사들이 뒤를 따랐다.
그들의 움직임은 흡사 무리 사냥을 하는 검은 늑대들 같았다.
“아우우우우우!”
크게 포효한 이크살이 허리춤의 나무 기둥, 토템(Totem)을 꺼내 던졌다.
토템은 스스로의 의지를 지닌 것처럼 몸을 비틀며 지면을 파고들었다.
토템에서 은은한 초록빛이 떠올랐다.
그 빛이 이크살을 포함한 전사들의 몸을 엷게 덮었다.
전사들의 전투 의지가 충만해졌다.
그들은 자신의 완력과 체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하는 것을 느꼈다.
“아우우!”
“아우우우우!”
나머지 전사들도 늑대처럼 포효했다.
순식간에 바위 너머를 둘러싼 그들의 눈이 타깃을 포착했다.
‘코모도!’
코모도는 용족 중에서 그리 강한 편에 속하는 개체는 아니다.
그러나 녀석은 아주 단단한 피부를 지녔고, 상처를 회복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게다가 커다란 덩치에 비해 몸놀림은 상당히 빠르다.
대치하면 후퇴는 불가능하다.
오로지 공격뿐.
다행인 점은 이크살과 픽시가 이전에도 코모도를 사냥한 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선두의 이크살을 향해 코모도가 앞발을 뻗었다.
코모도는 평상시 사족보행을 하지만, 전투 시엔 종종 곰처럼 직립해 앞발을 휘두른다.
그리고 직립한 코모도의 신장은 대단히 컸다.
파캉!
선두에 선 이크살이 검을 뻗어 코모도의 공격을 막았다.
그러나 아무리 토템의 주술로 신체 능력을 강화했다 해도 코모도의 완력보다 강할 수는 없었다.
이크살은 검을 옆으로 밀어 공격을 흘려보냈다.
이어 왼손으로 손도끼를 쥐어, 힘껏 내던졌다.
퍼거걱!
둔탁한 소음과 함께 핏물이 튀었다.
코모도의 피부는 바위처럼 단단하지만 이크살이 노린 건 아가리 사이의 작은 틈새였다.
이크살의 정확한 투척 능력이 빛을 발했다.
입에 손도끼가 박힌 코모도가 괴성을 질렀고, 그때만을 노리고 있던 나머지 여섯 전사가 동시에 손도끼를 투척했다.
퍼걱! 퍽! 퍼거걱!
순식간에 코모도의 입안에 일곱 자루의 손도끼가 박혔다.
이제 녀석은 입을 다물래야 다물 수 없는 상황.
한낱 먹잇감으로 생각했던 인간들이 이렇듯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보이자 코모도는 당황했다.
그 틈을 이크살과 픽시는 놓치지 않았다.
“픽시!”
“이크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두 전사가 코모도에게 돌진했다.
이크살의 검이 코모도의 한쪽 입꼬리에 박혔고, 더욱 길게 찢었다.
그곳의 피부가 다른 곳보다 약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푸슈슛! 푸슛……!
코모도의 입가가 거의 머리끝까지 찢어졌다.
그렇게 더욱 크게 벌어진 코모도의 입안으로 픽시가 뛰어들어갔다.
놈의 입천장 깊숙이 검을 찔러 넣었다.
콰드드득!
픽시의 검이 코모도의 입천장을 뚫고 뇌에 꽂혔다.
푸르르, 입에 거품을 물고 발작하던 코모도가 지면에 쓰러졌다.
제아무리 코모도가 강한 회복력을 지니고 있다 해도 뇌를 파괴하면 쓰러진다.
그러나 이크살은 안심하지 않았다.
시간을 들여 코모도의 심장을 확실하게 부쉈다.
전사들이 기쁨의 포효를 질렀다.
이 정도 크기의 코모도라면 부족원들 모두가 충분히 배를 채울 수 있을 것이다.
“해냈네. 이크살.”
픽시가 히죽 웃었다.
그 순간 이크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는 지척에서 엄청난 살기를 감각했다.
무어라 외칠 틈도 없었다.
콰아아아앙!
지면을 뚫고 거대한 머리가 솟아올랐다.
녀석의 입엔 부족의 전사 두 명이 물려 있었다.
와드득. 와득.
놈이 전사 둘을 씹어삼켰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 이게 무슨……!”
픽시가 얼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놈은 드래곤의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날개와 다리가 없었다.
게다가 딱딱한 지면을 뚫고 불현듯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용족에 대해선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픽시!”
이크살이 픽시의 몸을 안고 바닥을 굴렀다.
조금 전까지 픽시가 있던 자리에 괴물의 얼굴이 박혔다.
이크살이 아니었다면 픽시는 앞선 두 전사와 같은 꼴로 전락했을 것이다.
“정신 차려! 픽시!”
이크살이 검으로 제 손바닥을 그었다.
흘러나온 피를 자신의 얼굴과 몸에 발랐다.
그 광경을 본 픽시와 나머지 전사들도 같은 행동을 취했다.
그들은 스스로의 피를 몸에 발라 죽음의 공포를 이겨 내는 자들.
전사들의 입가에 송곳니가 드러났다.
괴물을 향해 달려들었다.
“아우우우우우!”
전사들의 외침이 메마른 공기를 울렸다.
그러나 용족은 엄청나게 강했다.
순식간에 세 명의 전사가 추가로 목숨을 잃었다.
그럼에도 이크살과 픽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더욱 거칠게 괴물을 공격했다.
괴물이 긴 혀를 뽑아 채찍처럼 휘둘렀다.
그것에 얻어맞은 두 전사가 바위에 처박혔다.
“크흑……!”
“크허어억……!”
두 전사의 입에서 피가 쏟아졌다.
엄청난 충격.
게다가 용족의 혀엔 강력한 마비독이 묻어있었다.
“이크살……! 몸을…… 움직일 수가……!”
두 전사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머지않아 용족의 송곳니가 그들의 무기를 튕겨 냈다.
그렇게 이크살과 픽시는 무기를 잃었다.
괴물은 시간을 끌지 않았다.
쩌억 벌린 아가리를 들이밀었다.
두 전사는 죽음을 직감했다.
그때였다.
퍼어엉!
어디선가 날아온 검은 방패가 용족의 옆얼굴을 타격했다.
어찌나 강한 힘으로 날아왔는지 용족의 거대한 몸이 수 미터 옆으로 밀려 넘어졌다.
용족을 타격한 방패가 핑그르르 회전하며 하늘로 솟았다.
허공에서 그것을 붙잡은 흑빛 갑주의 전사가 다시 한번 용족의 얼굴에 방패를 꽂았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우어어어어!
전사의 뒤를 따라 달려온 커다란 곰 한 마리가 괴물의 몸통을 강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