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9. 각자의 시련 (2)
엘의 말대로, 아틸라는 시스템의 형식을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수년간 몸에 익었던 것을 걷어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엘의 공세가 아틸라를 몰아쳤다.
아틸라는 막는 것에 급급했다.
“시스템의 힘은 네가 이 세계에 적응하는 것을 도왔다. 하지만 지금의 시스템은 오히려 너의 성장을 방해하고 있다.”
콰앙! 아틸라의 관자놀이에 충격이 가해졌다.
바닥에 엎어진 그가 눈을 뜬 곳엔 우주 대신 녹빛 대나무숲이 펼쳐져 있었다.
“장소를 바꾸는 게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
엘의 검격이 쇄도했다.
재빠르게 몸을 일으킨 아틸라가 그것을 막았다.
반격했다.
그러나 막혔다.
두 자루 검이 기묘한 곡선을 그리며 움직였다.
검신이 부닥칠 때마다 불꽃이 튀었다.
주위의 대나무가 날카롭게 잘려 나갔다.
아틸라의 눈이 커졌다.
순간 엘의 몸이 네 개로 늘어난 것처럼 보였다.
아틸라는 휩쓸기를 시전했다.
[ 휩쓸기 ]
[ 무기를 크게 휘둘러 최대 4인의 적을 한꺼번에 가격합니다. ]
네 명의 엘이 휩쓸기에 강타 당했다.
놀랍게도 엘은 정말로 네 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이곳은 나의 환술 세계다.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라도 할 수 있지.”
어느새 엘의 상처는 사라져 있었다.
“넌 여전히 시스템의 힘에 의존하고 있다. 네가 지닌 모든 권능과 스킬이 너의 몸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아틸라도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머리로 아는 것과 몸으로 구현하는 것은 별개의 영역이다.
인간은 자신이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믿지만, 그중 진짜로 아는 것은 많지 않다.
인간은 잘 알지 못하는 것을 안다고 착각하고, 또한 아는 것을 행하지 않으며 살아간다.
그건 무지(無知)와 다를 것이 없다.
지금의 아틸라도 마찬가지였다.
머릿속으로는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몸으로 구체화가 되지 않았다.
답답한 기분이다.
지구의 김도현이었을 무렵에도 아틸라는 몇 번이고 이런 경험을 했었다.
익숙지 않은 것을 숙련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고된 시간을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과 향상성이 필요하다.
“걱정 말거라 도현아. 이 환술 세계에서 시간은 무한정에 가까울 정도로 많으니 말이다.”
아틸라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피어올랐다.
그는 머릿속으로 인지하는 것을 체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네 명으로 분할된 엘이 아틸라를 공격했다.
아틸라는 다시 휩쓸기를 시전했다.
이번에도 상태창은 있었다.
또다시 실패다.
파아아앙!
엘의 무지막지한 공격이 아틸라를 뒤로 밀어냈다.
아틸라는 돌진을 시전했다.
이번에도 역시나 상태창이 떠오르며 돌진이 발현됐다.
전사의 외침도, 도약도, 발 구르기도 마찬가지였다.
‘빌어먹을.’
엘이 마법 공격을 펼쳤다.
아틸라는 마법 무효화를 시전해 그것을 버텼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카르타고와 마지막으로 싸웠던, 그때의 감각.
그때와 지금이 다른 점이 뭐일까.
아틸라는 이내 눈에 띄는 하나의 차이점을 발견했다.
‘광폭의 권능.’
그랬다.
카르타고와 싸우던 당시 자신은 광폭의 권능을 발현하고 있었다.
권능, 광폭을 발현하려면 자신의 의식을 무의식의 세계로 옮겨야 한다.
하지만 아틸라는 광폭의 명확한 구동 원리를 알지 못했고, 그래서 지금까지 인위적인 방법으로 그것을 발현했다.
몸에 독을 주입하고, 체력을 저하시켜 위태로운 상황을 만들었다.
그렇게 자신을 벼랑 끝까지 몰아넣은 다음,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광폭의 권능을 발현하도록 강제했다.
그 방법은 지금껏 통했다.
물론 후유증이 극심했지만 말이다.
“후우…….”
아틸라가 뜨거운 숨을 뱉었다.
엘은 자신보다 강하다.
이 상황을 타개할 가능성이 있는 유일한 방법은 버서커의 힘을 발현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어떻게.
지금의 자신에겐 독이 없고, 독화살을 날려 줄 슈시아도 없다.
‘슈시아? 슈시아는 어디에 있지?’
아틸라는 문득 생각했다.
황체의 알현실에 도착한 후, 아틸라는 가장 먼저 동료의 행방을 찾았었다.
샤다이 황제의 모습을 하고 있던 엘에게 이렇게 물었었다.
‘내가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된 거지? 나의 동료들은 어디에 있나.’
그때 엘은 대답 대신 머리 위를 가리켰다.
아틸라의 시선이 위를 바라봤다.
그곳에 있었다.
“……!”
바토리, 펀치, 도롱뇽.
그리고 오토, 카스피, 슈시아, 벨라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저마다의 세계에서 무언가와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바토리는 사르데니야 왕국을 침공하는 오르피나, 아레스, 포이베와 전투하고 있었고.
펀치는 먼 동방의 나라에서 밀려드는 적군을 향해 우렁차게 포효하고 있었으며.
도롱뇽은 자신을 포식하려는 코르키코스와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이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반면 오토가 싸우는 대상은 자기 자신이었다.
그는 자신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두 개의 가면 사이에서 고뇌했다.
카스피는 꿈을 꾸고 있었다.
그녀는 육체를 벗어난 영혼 같은 상태로 귀살의 일족이 멸망하는 순간을 지켜봤다.
슈시아는 수해로 뒤덮인 서리나무숲을 구하기 위해 몬스터들과 싸웠다.
그녀의 곁엔 한때 엘프 최강자로 불리던 타리엘 페살라스가 있었고, 그 뒤에서 수많은 발키리들이 화살비를 쏘아 댔다.
벨라는 아자젤과 함께였다.
왼손에 귀수를 뽑아들고 아자젤의 검은 마기를 향해 맹렬하게 공격을 가했다.
그렇게 모든 동료들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는 한편, 아틸라는 엘의 무지막지한 공격을 검으로 받았다.
신기한 일이었다.
아틸라는 자신이 존재하는 이곳과 동료들이 존재하는 일곱 세계, 도합 여덟 개의 세상을 선명하게 감각하고 있었다.
머릿속에 과부하가 걸렸다.
뇌가 폭발할 것처럼 진동했고, 불덩이를 삼킨 것처럼 심장이 뜨거웠다.
머리와 가슴의 열기가 두 눈으로 범위를 넓혔다.
아틸라는 눈앞에 붉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안구에서 우툴두툴한 혈관이 돋아났다.
그에겐 익숙한 감각.
‘역시 동료들의 모습을 보는 것이 도움이 되는 모양이구나.’
엘의 목소리가 먹먹하게 들렸다.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아틸라는 희미한 성취감을 느꼈다.
상태창이 보이지 않는다.
시스템의 도움 없이 광폭의 권능을 발현했다.
아틸라가 포효했다.
그의 등이 활처럼 젖혀졌다.
어느새 전신갑주는 산산조각 나 흩어졌고, 드러난 몸의 흉터에서 분수처럼 핏물이 분출했다.
움켜쥔 양손엔 흑철검과 흑철방패 대신 드라칼리온과 무휼이 쥐여 있었다.
‘오너라.’
엘의 목소리가 심장을 울렸다.
엘을 향해 짐승처럼 달려들었다.
그러면서 아틸라는 손에 들린 드라칼리온이 완전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감각했다.
드라칼리온은 원래 도롱뇽을 성체로 만들어야만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는 무기다.
하지만 지금 도롱뇽은 아틸라의 곁에 없다.
그런데도 드라칼리온은 마치 대악마의 현신이 된 샤를과 싸웠을 때처럼 완전한 형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아틸라는 지금의 상황에 기시감을 느꼈다.
그때 드라칼리온이 완전한 모습을 보일 수 있었던 이유는 처음으로 도롱뇽이 전성기의 모습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때의 자신은 어떻게 도롱뇽을 완전한 성체로 만들 수 있었을까.
지금이라면 알 것 같았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당시의 몸이 그것을 기억했고, 지금의 자신은 그때와 유사한 몸 상태를 갖추고 있었다.
고오오오오오.
엘의 주변으로 잘린 대나무들이 떠올랐다.
그것이 새까만 창날로 모습을 바꿨다.
아틸라를 향해 탄환처럼 쏘아졌다.
부드득, 아틸라는 하체에 힘을 주었다.
팽이처럼 몸을 회전시키며 날아드는 창날들을 베었다.
최종적으로는 드라칼리온을 이용해 엘의 분신들을 베었다.
휩쓸기와 비슷했지만 달랐다.
스킬을 시전해 공격을 가한 것이 아닌,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동작.
‘그래. 그거다 도현아.’
엘의 모습이 하나로 합쳐졌다.
아틸라는 코르키코스와 싸우던 도롱뇽이 우세를 점했다는 것을 알았다.
드라칼리온의 힘을 완전히 개방하자 도롱뇽이 영향을 받았다.
이전까지는 도롱뇽을 성체로 만든 뒤, 그것을 바탕으로 드라칼리온의 힘을 개방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순서가 바뀌었다.
결국, 순서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애초에 도롱뇽을 성체로 만든 것은 아틸라, 그 자신의 힘.
그런 그가 도롱뇽을 성체로 만드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드라칼리온을 완전한 상태로 변모시킬 수 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구나. 도현아.’
아틸라는 엘을 향해 무휼을 뻗었다.
드라칼리온뿐만 아니라 무휼 역시도 지금껏 본 적 없는 형태를 하고 있었다.
아틸라는 저것이 성검 무휼의 본래 모습이라는 것을 알았다.
무휼을 쥔 감촉이 낯설지 않다.
성검 무휼을 통해 대무신왕이었던 엘의 기억이 흘러 들어왔다.
‘검을 들어라! 오늘 우리는 천하를 통일한다!’
‘우와아아아아!’
엘이 앞장서 말을 달렸고, 그 옆을 아자젤이 따랐다.
신수 그리즐리가 지면을 울리며 둘 사이를 달렸다.
아틸라는 자신이 신수 그리즐리를 더욱 강력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카앙!
아틸라는 엘과 검을 부닥치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펀치에게 의지를 전달했다.
엘의 기억 속에서 보이는 신수 그리즐리와, 그와 다른 세계에서 동방의 적군을 상대하는 펀치의 모습이 하나로 겹쳐졌다.
그 순간 아틸라는 펀치가 신수 그리즐리의 힘을 흡수했다는 것을 알았다.
펀치의 환술 세계가 붕괴했다.
도롱뇽의 환술 세계도 붕괴했다.
두 환수는 엘이 만들어낸 환술의 시련을 극복했다.
아틸라의 도움으로.
‘잘했다. 이것으로 드라콘 이스메니오스와 신수 그리즐리는 완전한 힘을 회복했다.’
엘이 이어 말했다.
‘그래서, 그 둘을 어떻게 할 셈이냐.’
아틸라는 의지를 발현했다.
이성적 사고 없이 본능적으로 행한 일이었다.
아틸라는 펀치와 도롱뇽을 바토리의 환술 세계로 보냈다.
그런 일이 가능할까에 대한 고민 따윈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그렇게 행했고, 결과는 의지에 부합했다.
‘펀치야! 도롱뇽아! 날 도우러 와 준 것이더냐!’
반색하는 바토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틸라가 입가를 올렸다.
도롱뇽은 전성기 때의 위용을 뽐내며 바토리를 등에 태웠다.
두 앞발로는 거대화한 펀치의 등을 움켜쥐고 날았다.
키랴랴랴랴랴랴!
흑염의 브레스가 세 사도를 공격했다.
바토리의 마법이 그것을 도왔다.
지면으로 던져진 펀치가 사도의 천사들을 공격했다.
그 뒤에서 사르데니야의 기사와 마법사들이 밀물처럼 달려왔다.
검은 갑주를 차려입은 까마귀 기사단 속엔 견습기사 시절의 리베르도 있었다.
‘까마귀 기사단! 진겨어어억! 바토리 공주 전하를 지켜라!’
‘오오오오오오!’
아틸라는 이 시련의 의미를 알았다.
이것은 단순히 각자의 시련을 극복하고 힘을 각성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진 게 아니다.
각각 분리돼 있는 것만 같았던 환술 세계는 연결돼 있었다.
엘은 바토리가 자신을 포함한 다섯 사도의 시련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했었다.
그런데 지금 바토리의 세계엔 세 명의 사도뿐.
즉, 애초부터 환술 세계는 하나였다.
아틸라는 웃었다.
피로 얼룩진 입술 사이로 송곳니가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