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8. 각자의 시련 (1)
아틸라의 ‘불완전한 세계’.
샤를의 ‘완전한 세계’.
그 두 세계를 충돌시켜, 중간계를 완벽하게 독립된 세계로 재구축한다.
엘이 하는 말의 요지였다.
실제로 아틸라는 샤를과 격돌하며 발생한 마력 폭풍이 허공에 균열을 일으키고, 수해의 일부를 무너뜨리는 것을 봤다.
그러나 아틸라는 선뜻 엘의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당신의 말대로 나와 샤를의 세계가 충돌해 완전한 세계가 만들어진다면, 그건 결국 혼돈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닌가?”
혼돈은 중간계가 완전해지길 원한다.
그래야만 불완전한 세계인 울타리를 이용해 완전한 존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네 말대로다. 혼돈은 중간계가 완전함의 세계로 탈바꿈되길 원한다.”
“그렇다면 당신은 왜.”
“난 혼돈이 어떤 방식으로 울타리와 중간계를 합치려는 것인지 알고 있다. 내가 그것을 막을 것이다.”
“당신이 혼돈을 막을 수 있다고?”
“혼돈은 강하다. 아무리 나라도 혼돈과 정면 승부를 벌여 승리할 수는 없지. 하지만 나는 혼돈을 쓰러뜨리려는 것이 아니다. 내 목적은 ‘완전함의 세계’로 변모된 중간계를 혼돈의 손길로부터 영원히 벗어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것이 가능한 일이라고?”
“가능하다.”
“혼돈은 당신 못지않은 예지력을 갖고 있을 터다. 당신의 계획이 무엇인지는 모르나, 그 계획을 혼돈이 예지하고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예지의 힘은 전능하지 않다. 나와 혼돈이 전능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또한 혼돈이 나의 계획을 알고 있다 해도 문제 될 건 없다.”
“문제가 없다고? 혼돈이 당신의 계획을 알고 있다면 대비를 할 것이다. 나에 대한 대적자로 샤를을 안배한 것처럼.”
“물론 혼돈은 너의 존재를 방해하기 위해 샤를을 태어나게 했다. 그러나 잊은 것 같구나. 나 역시 샤를의 존재가 태어날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그 과정을 명확히 알지 못했을 뿐.”
“혼돈이 미래를 예측할 수는 있어도, 그 과정만큼은 정확히 알기 어려울 거란 뜻인가.”
“분명한 사실은 혼돈은 더 이상 널 방해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의 계획을 위해 네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으니까. 혼돈은 자신이 원하는 미래를 손에 넣을 것이다. 그 미래에 대해 혼돈은 분명하게 알고 있다.”
“혼돈이 원하는 미래를 손에 넣을 거라고? 그 말은 곧 중간계가 혼돈의 세계와 합쳐진다는 말이 아닌가.”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혼돈은 원하는 것을 얻을 테지만, 그것이 중간계를 위험에 빠뜨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다는 거지?”
엘이 미소했다.
“도현아. 아버지는 황제의 몸 안에서 그저 놀고만 있었던 것이 아니란다.”
아틸라의 눈이 흔들렸다.
그는 엘에게서, 지구에서 보던 아버지의 미소를 발견했다.
엘이 자신의 계획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야기를 듣던 아틸라와 바토리의 눈이 커졌다.
도롱뇽이 소리쳤다.
“뭐야! 그,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너 정말 엄청난 놈이었구나!”
“그걸 이제야 안 거냐, 녀석아.”
엘이 도롱뇽을 뻥 걷어찼다.
그러고는 큰 소리로 웃었다.
“하하하하하!”
비명을 지르며 도롱뇽이 우주 멀리 날아갔다.
“히익! 나 날아간다! 날아간다! 나 좀 살려 줘 바토리 할망구! 야만 미무우우울!”
그 갑작스러운 상황에 바토리의 입이 쩍 벌어졌다.
하지만 아틸라는 그 모습이 익숙했다.
어릴 적, 자신과 공놀이를 하던 아버지의 모습이었으니까.
‘여전하군. 당신은.’
아틸라가 의지를 발현했다.
그러자 점처럼 멀어졌던 도롱뇽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힉! 히익! 고, 고맙다 야만 미…….”
아틸라는 돌아온 도롱뇽을 걷어찼다.
이제 살았구나, 하며 반색하던 도롱뇽이 우주 멀리 날아갔다.
“꾸에에에엑……!”
그러고는 엘의 의지를 받아 다시금 엘의 발아래로 돌아왔다.
놀랍게도 돌아온 도롱뇽은 공처럼 빵빵하게 부풀어 있었다.
그런 도롱뇽을 엘은 우주라는 벽을 향해 재차 걷어찼고, 아틸라에게 돌아왔다.
지구에서도 이렇게 벽을 향해 공을 차며 공놀이를 하곤 했다.
아틸라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엘은 조금 전까지의 진중한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큰 소리로 웃으며 ‘도롱뇽 공’을 차는 데 여념이 없었다.
바토리만 중간에서 어쩔 줄을 몰랐다.
보다 못한 펀치가 도롱뇽을 낚아챈 뒤에야 두 남자의 공놀이는 끝났다.
도롱뇽이 펀치의 목털을 붙잡고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오랜만에 아들과 공놀이를 하니 즐겁구나.”
“난 아들이 아니라 분신이라 하지 않았나.”
“정정하지. 넌 나의 분신이자, 아들이다.”
엘이 씩 어금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잠시 그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던 아틸라가 입을 열었다.
“물어볼 것이 있다.”
“그래. 강철바위 대장장이들에 대한 것이겠지.”
“아직도 내 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건가.”
하하하, 웃음으로 답을 대신한 엘이 아틸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틸라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엘의 손바닥 위엔 반지 하나가 반짝이고 있었다.
“하워드 스틸숄더에게 받아 두었다. 네가 이것을 찾으러 황도에 올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강철바위의 왕, 하워드 스틸숄더의 반지.
오르피나의 마지막 성물이었다.
아틸라는 말없이 그것을 받아들었다.
목걸이, 귀걸이, 팔찌, 반지.
오르피나의 네 가지 성물이 한데 모였다.
“이것으로 바토리는 관조자로 돌아갈 수 있을 거다.”
“하워드가 반지를 순순히 내주던가?”
“당연히 아니었지. 그래서 제국으로 침투한 랄프 아이언액스와 그의 동료들을 만나게 해 줬다. 그제서야 투덜대며 반지를 내놓더군.”
엘은 랄프와 강철바위 드워프들이 제국에 진입한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무려 ‘황궁 기사단’을 보내 그들을 생포해 왔다.
“강철바위 대장장이들은 어디에 있지?”
“황성의 지하 공간에서 망치질에 열중이다. 헤어졌던 동족을 만나 더욱 힘이 나는 것 같더군. 물론 죽은 이들도 많았지만.”
강철바위 드워프들의 모습이 홀로그램처럼 우주 공간에 떠올랐다.
엘의 말대로 그들은 망치질에 여념이 없었고, 표정 또한 어둡지 않았다.
분명 황성에서 좋은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이다.
“무기와 갑주를 정비하고 싶다.”
아틸라와 오토의 무구는 제법 손상됐다.
다가올 전투를 대비해 하워드 스틸숄더의 정비를 받아두는 편이 좋을 것이다.
“얼마든지.”
그렇게 말한 엘이 바토리를 돌아봤다.
바토리의 표정은 미묘했다.
아틸라가 목적을 이뤄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론 두려움을 느끼는 얼굴.
엘은 바토리의 마음을 알았다.
굳이 심중을 들여다볼 필요도 없었다.
“걱정 마, 바토리.”
엘이 바토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러고는 바토리의 귀에 무언갈 속삭였다.
바토리의 눈이 조금 커졌고, 파문처럼 흔들렸다.
바토리가 엘을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아틸라를 돌아봤다.
“난 준비가 되었느니라.”
바토리를 관조자로 되돌리는 건 아틸라에게도 탐탁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바토리가 마음을 굳혔다.
게다가 다른 누구도 아닌 엘이 바토리를 관조자로 되돌리는 것을 권하고 있다.
이유는 뻔했다.
중간계를 완전하고 독립된 세계로 만들기 위해서는 ‘인간 바토리’가 아닌, ‘관조자 바토리’의 힘이 필요한 것이다.
엘이 바토리에게 속삭였다.
“오르피나의 성물엔 나와 아자젤을 포함한 다섯 사도의 의지가 담겨 있다. 그것은 널 이전보다 강력한 관조자로 만들어 줄 거야. 신에 육박할 정도의.”
신에 근접한 마력.
힘이 필요한 이에게 그보다 달콤한 말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엔 시련이 따르기 마련이다.
고통 없는 깨달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바토리도 그것을 알았다.
아틸라의 손에 있던 오르피나의 네 성물이 바토리에게 옮겨졌다.
마치 스스로 생명을 지닌 것처럼 성물들이 바토리의 목에, 귀에, 팔에, 손가락에 자리 잡았다.
마지막으로 아틸라는 리베르의 구슬을 꺼냈다.
푸드듯……, 푸드드드듯…….
구슬이 수많은 검은 깃털로 변하며 날아올랐다.
회오리처럼 회전하던 그것이 바토리의 발치로 모여들었다.
이어 발, 무릎, 허리를 지나며 그녀의 몸을 뒤덮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바토리는 얼굴을 제외한 모든 부분이 깃털로 덮였다.
바토리가 아틸라를 돌아봤다.
이어 얼굴까지 검은 깃털로 가려진 바토리의 몸이 묘한 진동을 일으켰고, 눈앞에서 사라졌다.
“어떻게 된 거지?”
“바토리는 환술 세계로 빠져들었다. 그곳에서 나를 포함한 다섯 사도의 시련을 견디고, 극복해야겠지.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하지만 환술 세계의 시간은 이곳과 다르게 흐르지. 그리 오래지 않아 바토리의 모습을 볼 수 있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그렇게 말한 엘이 도롱뇽에게 다가갔다.
도롱뇽이 흠칫 놀라 펀치의 입안으로 숨으려 했지만 엘이 빨랐다.
도롱뇽의 덜미를 잡아올린 엘이 싱긋 웃었다.
“드라콘 이스메니오스. 네게도 시련이 필요하겠구나.”
“시, 시련은 무슨! 야, 야만 미물! 나 좀 살려……!”
펑! 도롱뇽의 모습이 마술처럼 사라졌다.
이어 엘은 펀치마저 어디론가 사라지게 만들었다.
자리엔 엘과 아틸라, 둘만이 남았다.
“저 둘에게도 시련이 필요한 건가?”
“너도 알고 있지 않니. 두 환수의 힘은 상당히 약화돼 있다는걸.”
엘의 말투가 아버지의 것으로 변했다.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는 전성기의 힘을 되찾게 될 거야. 신수 그리즐리도 지금보다 더욱 강해지겠지. 하지만 그것엔 선행 조건이 있다.”
“선행 조건?”
“넌 ‘상태창’이라는 시스템에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그건 단지 게임의 형식을 빌려온 것일 뿐, 오히려 진정한 힘을 깨닫게 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지.”
아틸라는 다시금 상태창 없이 뻗치던 검기를 떠올렸다.
“그래. 넌 이미 시스템의 형식을 벗어던진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뿐이었지.”
“그래서 나도 환술 세계로 던져 버리겠다는 건가?”
엘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넌 그럴 필요가 없다.”
그 순간 아틸라의 눈이 커졌다.
사납게 변한 엘의 눈동자가 코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아틸라의 복부에 충격이 가해졌고, 우주 멀리 날아갔다.
“크윽……!”
불의의 기습.
아틸라는 공중에서 몸을 가누며 상대를 노려봤다.
다시 코앞에 있었다.
차아앙!
아틸라의 검과 엘이 검이 맞부딪쳤다.
엄청난 위압감에 아틸라의 미간이 구깃구깃 구겨졌다.
반면 엘은 즐거운 표정이었다.
“이렇게 검을 맞댄 건 어릴 적 칼싸움 놀이 이후로 처음이구나, 도현아.”
아틸라가 피식 웃었다.
“그렇군. 하지만 당신은 날 이긴 적이 한 번도 없었지.”
아틸라의 발길질이 엘의 복부를 타격했다.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며 엘이 웃었다.
“하하하하하! 그땐 당연히 이 아버지가 져준 거였지!”
아틸라가 몸을 날려 엘을 따라잡았다.
두 사내의 검이 다시 몸을 섞었다.
수많은 별이 빛나는 우주 속에서 화려한 검무를 추었다.
“시스템에 의존하지 마라. 시스템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