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7. 밝혀지는 비밀 (7)
“나와 어머니의 곁을 떠난 이유가 뭐지?”
아틸라의 목소리가 엘의 생각을 깨웠다.
엘은 아틸라를 보며 상념을 정리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사념이다.
아틸라 역시 잠정적으로 생각을 정리한 상태였다.
“내가 널 떠났던 이유는, 혼돈이 가상의 지구를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혼돈은 부지불식간에 사라진 엘을 찾고 있었다.
엘은 혼돈의 분신.
두 존재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돼 있다.
시간이 필요할 뿐, 결국 혼돈이 엘을 찾으리라는 건 정해진 결과였다.
“난 최대한 오랫동안 지구에 남아 널 보살폈다. 나의 능력을 씨앗의 형태로 빚어 네게 전하고, 내가 아는 과거와 미래의 지식을 네 머릿속에 봉인했다. 그 능력과 지식은 네가 완연한 알테라의 면모를 드러낼 때까지 숨겨져 있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혼돈이 널 찾아낼 테니까.”
그러나 봉인은 완벽하지 않았다.
당시의 엘은 불안정한 존재였고, 그런 엘에게서 파생된 알테라 역시 불안정했다.
게다가 알테라의 탄생은 태아의 형태로 시작됐다.
그 때문에 알테라는 더욱 중첩된 불안정을 안고 있었다.
그러던 중 엘이 떠났다.
알테라는 큰 충격을 받았다.
애초부터 가상 지구는 알테라를 위해 준비된 세계.
알테라의 영혼이 충격을 받자, 가상 지구의 세계관도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먼저 알테라, 아니 김도현의 어머니가 쓰러졌다.
이후 김도현에게 수많은 악운이 찾아왔다.
만약을 대비에 엘이 ‘고양이’라는 존재를 안배하지 않았다면, 김도현의 정신은 그대로 망가졌을지도 모른다.
연이은 충격은 김도현의 머릿속 어딘가에 봉인돼 있던 엘의 ‘과거와 미래의 기억’ 일부를 끄집어냈다.
그것을 바탕으로 김도현이 써내린 소설이 패왕영웅전기였다.
“중간계로 돌아온 난 아자젤을 가상 지구로 보냈다. 그리고 아자젤은 네가 패왕영웅전기라는 소설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자젤을 통해 김도현의 불안정한 상황을 알게 된 엘은 묘안을 떠올렸다.
가상 지구에서 소설 패영전의 인기를 급상승 시키고, 그것을 구실로 게임화 계약을 진행한 뒤, 그 게임 형식을 빌려 중간계로 넘어온 알테라의 적응을 도와야겠다는 생각.
생각은 적중했다.
김도현은 중간계에서 눈을 떴고, 자신이 게임 속으로 들어왔다는 착각을 했다.
그렇게 적을 쓰러뜨리고, 경험치를 얻고, 시나리오를 수행할 때마다 스킬을 개화한다고 믿게 되었다.
심지어 파티를 맺은 동료들도 함께 강해졌기에 더더욱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파티 시스템은 눈속임에 불과하다.
그에겐 자신을 따르는 동료들의 잠재력을 끌어올릴 수 있는 특별한 힘이 있었을 뿐이다.
“난 네가 안전하게 중간계로 넘어올 수 있도록 많은 준비를 해 두었다.”
엘은 오래전부터 미래를 예견했다.
그래서 동방의 나라에 대무신왕의 전설을 만들어 두었다.
가상 지구에 존재하는 알테라는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영혼.
그 영혼을 담아 낼 그릇을 중간계에 안배해 둬야 했다.
“네 영혼은 걸맞은 그릇에 담겨야 했다. 그래서 난 먼 옛날 동방의 군주 대무신왕이 되며, 왕가의 핏줄에 표식을 새겨 두었다.”
엘은 표식을 숨긴 뒤, 예언의 말을 남겼다.
먼 훗날 죽은 왕족의 육신을 통해 대무신왕이 환생할 것이며, 온 대륙에 동방의 깃발을 나부끼게 할 것이라고.
그것의 증표로 엘은 성검 무휼을 왕가에 남겼다.
아자젤은 신수 그리즐리를 무휼의 수호자로 내세웠다.
“내가 동방과 서방을 오가던 시절, 자연스레 날 따라온 왕족들이 있었다. 그들은 성검 무휼과 신수 그리즐리와 함께였고, 제국 북서부 테라루스 일족에 흡수됐다.”
테라루스 일족.
자연의 힘을 숭배하는 일족이자, 현재는 북부 야만인으로 불리는 자들.
그들은 요툰 전쟁 때 요툰의 편으로 돌아서 나머지 고대인들과 싸웠고, 덕분에 요툰의 힘을 일부 손에 넣었다.
“테라루스 일족에 흡수된 왕족들은 ‘검은늑대 부족’이 되어 명맥을 유지했다. 시간이 흘러 그들 일부는 수해의 통로를 넘어 남으로 움직였다. 그렇게 왕가의 핏줄과 성검 무휼, 신수 그리즐리는 남부 끝단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틀었다. 그 후 오랜 시간이 흐르고 모든 톱니바퀴가 맞물리며 알테라의 그릇이 될 운명의 아이, ‘검은늑대의 아틸라’가 태어났다.”
아틸라는 가슴에 위대한 증표를 안고 죽었다.
- 환생한 영웅은 가슴 위로 위대한 징표를 드러내리라.
그리고 중간계로 건너온 알테라의 그릇이 되어, 두 번째 삶을 시작했다.
“혼돈으로부터 날 지키기 위해 나와 어머니 곁을 떠났다는 게 사실인가.”
엘이 답하기도 전에 아틸라의 눈빛이 사납게 변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왜, 아틸라의 그릇에 담긴 날 찾지 않은 거지?”
그 말대로였다.
엘은 중간계로 건너온 아틸라를 한 번도 찾지 않았다.
엘의 얼굴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것엔 이유가 있었다.”
“무슨 이유 말인가.”
“널 지키기 위해 가상 지구를 떠나 중간계로 돌아온 난, 오래지 않아 혼돈의 공격에 잠식당했다.”
혼돈은 엘을 지배하는 것에 성공했다.
또한 혼돈은 엘의 계획을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다.
그래서 혼돈은 엘의 계획을 방해하기 위해, 알테라의 대적자를 만들기로 했다.
혼돈은 알고 있었다.
아레스와 이미르 사이에서 태어난 혼종, 드라콘 이스메니오스가 엄청난 힘을 지녔다는 것을.
혼돈은 생각했다.
그렇다면 자신의 분신인 엘과, 중간계에서 가장 빼어난 마력을 지닌 요정족 사이에서 태어난 존재는 얼마나 강력할 수 있을까.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혼돈은 엘의 정신을 파괴하고, 요정섬으로 보냈다.
그때의 엘은 ‘아몬 엘하르트’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고, 일시적으로 기억을 잃은 상태였다.
그곳에서 엘은 요정족의 공주 ‘아리아나 아인델’을 만났다.
그리고 사랑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샤를이 태어났다.”
그 직후 엘의 정체는 요정왕에게 발각됐다.
배후는 역시 혼돈이었다.
요정왕은 악마와 사랑에 빠진 딸과, 그렇게 태어난 아기 모두를 인간 세상으로 유배했다.
힘을 잃은 아리아나는 인간의 손에 죽었다.
알테라의 유일한 대적자, 샤를 아인하르트는 그렇게 홀로서기를 시작했다.
“난 아리아나가 인간 세상으로 유배된 뒤 기억을 되찾았다. 그러나 혼돈의 마수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혼돈은 엘의 정신을 완전히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리 약화됐어도 엘은 혼돈의 분신이자 일부였다.
그래서 혼돈은 엘의 정신을 장악하는 것을 포기했다.
대신 그의 자아를 제국의 황제 샤다이 클라우디우스의 몸에 봉인하고, 황도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난 널 만날 수 없었다. 네가 이곳으로 오기 전까지는.”
물론 엘이 아틸라를 방치한 건 아니었다.
엘은 아자젤을 통해 아틸라의 소식을 들었다.
“나를 도운 네 명의 사도 중 가장 고독하고도 위험한 임무를 짊어졌던 것이 바로 아자젤이었다.”
아자젤은 혼돈의 의심을 피하며 엘의 명령을 수행했다.
그의 임무는 아틸라를 이 세계의 구원자로 만드는 것.
그것을 위해 아자젤은 대륙 전역을 오가며, 아틸라가 예정된 미래를 향해 움직이도록 돕는 역할을 했다.
아스투리아 왕국에 마귀떼를 소환하고.
샤를을 만나 그가 지닌 아몬의 힘을 확인했으며.
아틸라를 도와 메피스토펠레스의 숨통을 끊는 일에 일조했다.
또한 세베스티아와의 전투로 죽을 위기에 처한 아틸라를 구하고, 플루토를 이용해 아틸라가 가야 할 길을 제시하기도 했다.
“시작은 카르타고였다.”
오래전 아자젤은 엘에게서 전해 받은 ‘광폭의 그림자’를 카르타고에게 주입했다.
엘은 혼돈에게 기억을 잃기 전부터 샤를 아인하르트가 태어날 미래를 예견하고 있었다.
그래서 엘은 아자젤을 통해 카르타고를 최강의 버서커로 만들었고, 카르타고의 몸에 주입된 ‘광폭의 그림자’는 그가 죽은 후 ‘벨리알의 눈’으로 변했다.
이후 데스나이트로 부활한 카르타고에게 벨리알의 눈은 여러 방식의 힘을 제공하고 있다.
“아자젤은 나를 통해 알게 된 미래의 일부를 카르타고에게 보여 주었다.”
카르타고는 아자젤이 보여 준 미래 속에서, 대악마의 현신으로 거듭나는 샤를을 봤다.
그것은 카르타고로 하여금 스스로 샤를의 부하가 되도록 만들었다.
이후 카르타고는 엘과 아자젤의 예정대로 움직였다.
샤를을 위한 언데드 군단을 만들고, 샤를의 연합군과 대적하며, 샤를이 대악마의 힘을 각성하도록 유도했다.
그렇게 샤를은 대악마 아몬의 힘을 각성해 카르타고를 부하로 만들었다.
그리고 카르타고가 안배한 드라코리치를 환수로 거두며, 신을 뛰어넘는 존재가 됐다.
“그런 샤를과, 그의 가장 강력한 부하인 카르타고와 겨루며 너 또한 강해졌다.”
엘은 아틸라의 변화를 알아봤다.
지금의 아틸라는 알테라의 봉인된 힘 대부분을 각성한 상태다.
그러나 완전하진 않다.
지금의 아틸라는 샤를과 대적할 수 없다.
그 정도로 샤를은 무시무시한 존재가 됐다.
“넌 샤를과 다시 싸워야 한다.”
“말하지 않아도 그렇게 할 거다.”
“네 목적은 샤를을 쓰러뜨리는 것이 아니다.”
“……뭐라고?”
“샤를 아인하르트는 적이 아니다. 너와 샤를이 지닌 힘은 중간계를 독립된 세계로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할 열쇠다.”
“독립된 세계라면, 중간계를 혼돈으로부터 독립시키겠다는 뜻인가.”
“혼돈만이 아니다. 이 세계는 많은 것이 겹쳐 있다. 먼 옛날 신계의 울타리로부터 발생한 균열 때문이지. 중간계가 완전한 상태로 돌아가려면 그 모든 겹침을 제거해야 한다.”
“어떻게 겹침들을 제거할 수 있다는 거지?”
“아까도 말했듯, 혼돈은 나를 통해 중간계를 완전한 세계로 만들려 했다. 그와 반대로 혼돈은 자신의 울타리를 불완전한 세계로 만들고 있다. 서로 대치되는 두 세계를 합치면 완전한 세계가 된다. 오래전 혼돈이 깨달았던 일이고, 나 역시도 깨달은 일이다.”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군.”
“지금의 샤를 아인하르트는 완전무결(完全無缺)한 존재. 다시 말해 그의 세계는 완전한 세계다. 한편 그의 대적자인 알테라, 너는 불완전한 존재다. 넌 지금보다 더욱 강해질 것이다. 또한 지금보다 더욱 불완전한 존재가 될 것이다.”
더욱 강해지는데, 더욱 불완전해진다.
아틸라는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알 수 없었다.
“혼돈의 계획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그가 네 존재를 알고 있음에도 내버려 두는 이유는 그의 계획에 네가 필수불가결한 존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내가 혼돈의 계획의 일부라고?”
“그 말대로 넌 혼돈의 계획의 일부지만, 이 세계의 구원자이기도 하다. 넌 너의 세계를 더욱 불완전한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너의 ‘불완전한 세계’를 샤를의 ‘완전한 세계’와 충돌시켜, 그 충격에서 발생한 방대한 에너지로 이 세계를 뒤집어야 한다. 초대받지 않은 다른 세계의 겹침을 몰아내고, 중간계를 완전함의 세계로 재구축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