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6. 밝혀지는 비밀 (6)
엘은 여러 미래의 파편을 봤다.
그중 어떤 건 가변적이었고, 어떤 건 불변적이었다.
사르데니야 왕국의 멸망은 불변의 미래였다.
물론 그것 말고도 불변의 미래는 또 있었다.
그래서 엘은 사도들을 통해 그것을 대비해 두었다.
“난 어떤 방식으로 드라콘 이스메니오스가 사르데니야 왕국을 멸망시키는지는 몰랐다. 또한 멸망은 내가 무슨 수를 쓰든 반드시 찾아올 미래였지.”
“……그래서 엘은 아레스에게 왕국을 떠나라고 한 거야?”
바토리의 물음에 엘은 슬픈 표정을 지었다.
“미안하구나 바토리.”
바토리는 엘에게 따져 묻고 싶었다.
왕국의 멸망을 알고 있었다면, 그렇게 왕국의 모든 인간이 죽게 놔둘 필요는 없었을 터다.
그러나 바토리는 그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바토리로서도 알 수 없었다.
만약 자신이 왕국의 미래를 알고 있었다 한들, 누구를 살리고 누구를 죽여야 했단 말인가.
“혼돈이 사르데니야의 멸망에 깊게 개입한 이유는 간단했다.”
“바토리인가.”
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토리를 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 세계가 혼돈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립된 세상’이 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존재라는걸.”
독립된 세상.
오르피나도 아틸라에게 같은 말을 했었다.
“바토리는 예견된 미래 속에서 봤던 모습보다 더욱 빛나는 존재였다. 또한 그녀는 훗날 내게서 분할될 분신, ‘알테라’에게도 큰 힘이 될 존재였지.”
아틸라의 눈이 커졌다.
엘이 아틸라를 보며 말했다.
“넌 나의 아들이 아니다. 혼돈의 분신으로서 내가 태어났듯, 너 역시 나의 분신으로서 태어난 존재다.”
아틸라는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지금껏 아틸라는 샤를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 또한 엘의 아들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당신과 동일한 존재라고?”
“동일한 존재는 아니다. 혼돈의 분신인 내가 그와 같지 않듯, 너 또한 나와 같은 존재가 아니다. 다만 너에겐 나와 같은 혼돈의 힘이 흐르고 있다. 혼돈의 힘은 곧 ‘불안정(不安定)’의 힘. 그것이야말로 네가 지닌 특별한 힘, ‘광폭(狂暴)’의 모태다.”
광폭의 권능.
버서커의 힘.
그 놀라운 힘의 유래가 밝혀졌다.
“그렇다면 카르타고는.”
“오르피나가 말했듯, 카르타고는 너의 그림자다.”
“카르타고가 나의 그림자가 되어야 했던 이유가 뭐지?”
“존재하지 않는 승천의 후보자로 만들어, 향후 관조자가 될 바토리의 주목을 받게 하기 위해. 이단의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 그의 하수인들인 파우스트를 제거하기 위해. 그리고.”
엘의 눈이 아틸라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의 ‘표면적’ 대적자인 알테라와, 샤를 아인하르트를 더욱 성장시키기 위해.”
“승천자의 전설은 사실이 아니었나?”
“지금까지 내가 했던 말을 통해, 너 역시 짐작하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아틸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엘의 예견대로, 바토리는 카르타고의 관조자가 됐다.
‘카르타고를 승천자로 만들기 위해.’
또한 그것은 이후의 그녀가 아틸라를 관조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바토리는 아틸라에게 엘뿐만 아니라 카르타고의 기운을 함께 느꼈으니까.
“당신은 샤를이 태어날 것도 알고 있었던 건가.”
“그것 또한 불변의 미래였으니까.”
“알테라란 뭐지?”
“같지만 다른 자아.”
아틸라는 엘의 분신이지만 다른 자아를 갖고 있다.
“너는 나의 ‘알테라’다. 내가 혼돈의 ‘알테라’이듯.”
엘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어쩌면 혼돈 역시도 다른 무언가의 ‘알테라’일는지도 모르지.”
엘은 혼돈의 기억을 더듬어 본 적이 있다.
기억의 저편은 끝도 없는 미지(未知)였다.
엘은 혼돈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모른다.
혼돈 스스로도 잊었을 것이다.
“혼돈의 정신 공격은 점점 집요해졌다. 나의 분열이 그것을 더욱 가속화시켰지.”
엘에게 있어 분열은 절망이자 희망이었다.
분열은 혼돈의 의지가 그의 정신을 침투하도록 강제했지만.
그렇게 태어난 ‘알테라’는 중간계를 독립된 세계로 만들 특별한 열쇠가 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던 중 예견된 일이 벌어졌다.”
혼돈의 공격은 엘의 정신을 파괴했다.
그 영향으로 드라콘 이스메니오스가 덩달아 정신 지배를 당했다.
엘, 아니 대악마 아몬과 드라콘 이스메니오스의 힘이 연결돼 있기에 발생한 일이었다.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는 사르데니야 왕국을 멸망시켰다. 그러나 난 이후의 일을 대비해 두었다.”
엘이 오르피나에게 했던 부탁.
그것은 인간의 삶을 떠나 사르데니야 왕국의 수호신이 되어 줄 것과, 다가올 멸망에서 바토리를 구하고 드라콘 이스메니오스와 함께 마계로 추락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오르피나는 왼팔을 잃었다.
그러나 그 또한 엘이 본 미래에 포함된 것이었다.
바토리는 떠올렸다.
자신에게 왼팔을 잃은 채, 땅속으로 스며들던 오르피나가 했던 말을.
‘그러나 나 또한.’
‘이리 될 줄 알고 있었으니.’
오르피나는 알고 있었다.
바토리가 자신의 왼팔을 갈취할 것이라는걸.
오르피나는 왕국을 되찾고 싶다는 염원을 드러내는 바토리를 도발했다.
‘불가한 일이다.’
‘그것은 오직 주신(主神)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엘의 예정대로 바토리가.
‘새로운 주신을 찾겠나이다.’
신에게 반기를 들고 자신의 왼팔을 강탈하도록 만들기 위해.
“난 우여곡절 끝에 정신의 일부를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난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를 찾아 속박했고, 바토리와 관조자들이 마계로 떨어뜨렸다. 그곳에서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는 오르피나를 만났다. 그리고 중간계로 돌아왔지.”
이후 엘은 혼돈의 영향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영원할 수는 없었다.
또한 엘은 더 이상 자신의 몸이 분열하는 것을 억누를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알테라가 탄생할 날이 다가온 것이다.
“그때의 난 극도로 불안정한 상태였다. 혼돈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거의 모든 여력을 사용한 뒤였지. 그런 까닭에 내게서 태어날 알테라 또한 불안정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난 알테라를 태아의 상태로 분할하기로 했다. 내가 만들어 낸 가상의 세계, ‘지구’에서.”
아틸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가상의 세계라고?”
“네가 살아온 지구는 진짜가 아니다. 그것은 내가 창조한 가상의 세계이자, 모든 것이 너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한정적 공간이었다.”
아틸라는 언젠가 꿈속에서, 아니 과거의 현실 속에서 아버지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도현아.’
‘네?’
‘아버지는 머지않아 도현이의 곁을 떠나야 해.’
‘네? 왜요?’
‘이곳은, 이 지구는 아버지가 살아갈 곳이 아니거든.’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버지는 다른 세계에서 왔으니까. 그래서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야 해. 그리고 너 역시도, 머지않아 너의 세계로 돌아가야 하지.’
‘그럼 엄마는요?’
‘엄마는 우리와 함께할 수 없을 거야.’
‘왜요?’
‘우리가 보는 세상은 진짜가 아니니까.’
두근, 아틸라의 심장이 뛰었다.
아버지는 오래전부터 이 세계가 진짜가 아니라는 말을 했었다.
아틸라가 믿으려 하지 않았을 뿐이다.
“네 어머니는 오르피나를 모태로 창조된 인물이다. 그래야만 내가 남편으로서의 삶에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훗날 네가 만나게 되는 고양이는 바토리를 모태로 만들어졌다.”
아틸라는 놀라지 않았다.
그러지 않아도 아틸라는 바토리를 보며 지구의 고양이를 떠올리곤 했다.
고양이는 지구에서의 힘들었던 삶에 유일한 위안이 되었던 존재.
그것과 동일한 감정을, 아틸라는 바토리를 보며 느끼고 있었다.
“……지구에서 내가 겪은 일들, 그것 역시 당신이 의도한 대로인가?”
김도현은 지구에서 고된 삶을 살았다.
아버지가 사라진 후 어머니는 병을 얻었고, 김도현은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렸다.
“의도한 것이 아니다. 말했다시피 그 무렵의 나는 불안정한 상태였다.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지구라는 가상 세계를 만들고, 그 안에서 네가 생활할 자그만 공간을 일궈내는 것뿐이었지. 네가 알테라의 힘을 각성할 때까지.”
“그럼 지구에서 내가 만났던 사람들은? 그들도 모두 가짜였나?”
“그들은…… 그래. 이렇게 말하면 이해하기 쉽겠구나. 가상의 지구에서 너와 나를 제외한 모든 인물은 NPC(Non-Player Character) 같은 존재였다. 오직 너와 나만이, 가상의 지구라는 게임(Game) 속을 살아가는 플레이어(Player)였지. 물론 가상 지구는 먼 옛날의 실제 지구와 달리, 극도로 한정적인 공간만을 재현한 것이지만 말이다.”
아틸라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는 지구에서의 삶이 괴로웠다.
그러나 힘든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그곳에서 30년에 가까운 삶을 살았다.
그동안 만났던 사람들 중엔 고마운 이들도 있었다.
어떻게든 악착같이 살아 보려는 그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위로가 되어 준 이들이 있었다.
그것만이 아니다.
그는 이제서야 또렷이 기억했다.
아버지가 사라지기 전까지의 삶.
그것은 행복이었다.
어머니의 등에 업혀 울고 보채던 기억.
아버지의 어깨에 올라타 공원을 산책하던 일.
코끝을 스치던 바람.
부드러운 꽃내음.
풀벌레 소리.
그런데.
엘은 지금.
그 모든 일이 허상이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아니다.’
아틸라는 부정했다.
자신이 겪은 일은 허상이 아니다.
그것은 진짜였다.
그 안에서 살아가며 아틸라는 단 한 번도 이 모든 것이 허상이라 생각한 적이 없었다.
어차피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은 실제가 아니다.
망막에 맺히는 빛을 전기적 신호로 바꿔 뇌가 재해석한 것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실제의 세계와 우리가 해석한 세계는 같지 않다는 거다.
우리는 언제나 허상을 보고 있다.
우리의 뇌가 그렇게 만들고 있다.
그렇다면 실제와 허상에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아틸라는 덜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실제라 여길 수밖에 없었던 세계, 지구.
그러나 엘의 말대로라면 지구는 허상이다.
그렇다면 아틸라가 발 딛고 서 있는 이 세계.
실제라고밖에 여겨지지 않는 이 패영전의 세계 또한 허상이 아니라 단언할 수 있을까.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도현아.”
엘 역시도 아틸라와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엘에겐 먼 옛날 실제의 지구에 대한 기억이 있다.
지구는 흥미로운 세상이었다.
과학 문명이 극도로 발달한 세계.
그 안에서 인간들은 현실과 가상을 넘나드는 삶을 살았다.
현실과 가상의 구분이 모호한 세상.
아니, 오히려 현실보다 더욱 현실 같은 가상 세계.
때문에 많은 인간들은 현실보다 가상의 삶에 빠져들었다.
대부분의 생산 활동이 가상 세계에서 이뤄졌다.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의 조화는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엘이 가상의 지구를 만든 것 또한 그것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면서 엘은 생각했었다.
나는 혼돈에서 태어났다.
그렇다면 혼돈은 어디에서 왔는가.
나와 혼돈은 어쩌면.
먼 옛날 지구의 과학 기술이 만들어 낸 데이터 쪼가리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이 넓은 다중 차원의 세계 역시 지구의 어느 오래된 컴퓨터 속에서 찰나간 번득이는 전기 신호인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