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 밝혀지는 비밀 (5)
어린 날의 바토리는 사르데니야 왕성을 찾은 엘과 이런 대화를 한 적이 있었다.
‘수해는 왜 있는 거야?’
‘수해는 원래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았어. 그랬던 것이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났고, 확장을 시작했지.’
그 말대로 수해는 어느 날 갑자기 등장했다.
수해가 정확히 언제 대륙에 모습을 드러냈는지 아는 이는 없다.
엘은 네 사도와 함께 수해를 조사했다.
“수해 안에선 괴물들이 발견됐다. 훗날 고대인들이 몬스터라 부르는. 물론 몬스터가 등장한 건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내가 최초로 아자젤과 함께 동방 대륙으로 건너갔을 때도 수해엔 몬스터들이 살았지. 그러나 그리 강력하진 않았었다.”
엘의 말대로, 엘과 아자젤이 처음으로 마주한 몬스터는 강하지 않았다.
형태만 독특했을 뿐, 평범한 야생짐승의 전투 능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물론 그 정도도 일반적인 인간에겐 위협이 된다. 하지만 수해의 몬스터들은 결코 수해를 벗어나는 일이 없었다. 자연스레 수해는 인간이 찾지 않는 곳으로 변해 갔고, 기하급수적으로 몸집을 불렸다.”
그에 따라 몬스터들도 눈에 띄게 강해졌다.
엘은 이런 자연 현상이 낯익었다.
그는 혼돈의 분신이었고, 혼돈이 지녔던 기억의 일부를 공유하고 있었다.
엘은 이 상황을 지구의 과학 기술이 발견한 것을 빗대 표현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이 세계는, 인간을 반드시 박멸해야만 하는 독소(毒素)로 여겼거든. 그래서 수해라는 이름의 항체(抗體)를 만들어 낸 거야.’
엘이 바토리에게 했던 말이다.
엘은 수해가, 그리고 수해의 몬스터들이 대륙이라는 육신을 지키려는 항체라 생각했다.
그렇다면 항원은 혼돈의 울타리에서 넘어온 존재, 즉 신과 고대인을 뜻한다.
“더욱 놀라운 일은 수해가 스스로의 의지를 가지고, 우리와 의사소통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너와 바토리도 경험했던 것처럼 말이다.”
아틸라와 바토리가 서로를 마주 봤다.
두 사람은 최근 대국경의 관문을 지나며 수해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날 수해는 이렇게 말했었다.
우린
너희를 기억한다
악의로 가득한 목소리.
수해가 말한 ‘너희’는 아틸라와 바토리를 뜻하는 것일 터다.
너는 또다시
우리를 공격했다
‘너’는 아틸라.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아틸라가 아니다.
수해는 아틸라를 통해 먼 옛날의 엘을 느꼈을 것이다.
그 가정을 증명하듯 수해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이전과 달라졌다
아틸라는 엘과 다르다.
수해는 아틸라를 통해 엘을 보았지만, 그 둘이 다른 존재라는 것을 알았다.
너희는 우리를 속였다
아틸라를 통해 엘을 봤다면, 바토리를 통해 본 존재는 뻔하다.
‘오르피나.’
아틸라가 이해한 수해의 목소리는 거기까지였다.
이후엔 알아들을 수 없는 비명뿐이었다.
“네가 들은 대로다. 수해는 내게 속았다. 당시의 난 무슨 수를 써서든 수해의 확장을 막을 필요가 있었다.”
엘은 수해와 접촉하고, 자신들과 고대인들이 대륙에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라고 말했다.
오히려 불완전해지는 대륙의 상황을 완전함으로 되돌리려는 것이라 말했다.
수해는 엘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거부하지도 않았다.
“그때의 수해는 갓 태어난 아이 같았다. 사고 능력이 떨어졌다는 말이지.”
그러나 엘은 달랐다.
혼돈의 분신인 엘은 영겁의 세월을 살아온 존재다.
“난 이미 확산된 수해를 원래대로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수해가 더 이상 범위를 넓히지 않도록 구슬렸다. 지금 벌어지는 대륙의 혼란은 그리 오래가지 않을 거라면서 말이지.”
엘은 요툰이 이 세계에서 사라졌다는 것을 언급했다.
그리고 그들을 대체할 존재가 인간이라고 말했다.
수해는 점차 엘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잠시나마 수해의 확장을 막은 나는 서부와 동부가 완전히 단절됐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서부 대륙도 확장한 수해 탓에 북부와 남부로 분리됐다는 것을 알았지.”
그때 엘의 예지 능력이 발동했다.
엘은 북부와 남부를 어떻게든 연결해야만 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래서 난 힘을 사용했다.”
엘은 혼돈에게서 전해 받은 자신의 특별한 능력을 발휘했다.
수해의 확장 여지를 강제로 막으면서, 북부의 남부를 잇는 긴 통로 ‘대국경의 관문’을 만들었다.
엘과 사도들의 능력이 대단했던 것도 있지만, 수해가 방심하고 있던 탓도 컸다.
수해는 뒤늦게 엘과 사도들에게 속았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엘이 발현한 혼돈의 힘은 강했고, 그때의 수해는 그 힘에 대항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지 않았다.
너희는 우리를 속였다
수해는 분노했다.
수해의 확장 의지가 거세어졌다.
그러나 엘과 사도들이 발현한 보이지 않는 장벽이 그것을 막았고, 결국 수해는 내부로 확장을 시작했다.
그렇게 수해는 외곽부, 심층부, 최심부 수해로 나뉘었다.
사도들은 다시 흩어졌다.
아자젤만이 엘의 곁에 남았다.
“수해의 확장을 막는 것엔 성공했지만 그 일로 난 많은 힘을 소모했다. 시간이 흐르면 힘은 회복되겠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지.”
엘은 자신의 분열 속도가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면서 혼돈이 자신의 정신에 개입을 시도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동안 혼돈은 내게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 없었다. 혼돈이 울타리 안을 ‘불완전함의 세계’로 만들기 위해 주력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더 큰 이유는 나의 의지가 혼돈의 개입을 저항할 수 있기 때문이었지.”
그런데 엘은 수해의 확장을 막으며 상당한 힘을 소진했다.
혼돈은 그것을 알아챘다.
이후 혼돈은 지속적으로 엘의 정신에 개입을 시도했다.
“혼돈은 날 자신의 꼭두각시로 만들려 했다. 나에게서 불안감을 느꼈기 때문이었지. 난 의지를 발현해 그것을 막았다. 그러나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엘은 혼돈의 의지와 싸우며 회복에 전념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미래를 봤다.
시간의 파편처럼 보이는 그 모습을 엘은 섣불리 해석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중 일부의 미래를 해석하는 것에 성공했다.
그것은 위험한 미래였다.
“그 미래를 막기 위해, 난 사도들을 만나야 했다.”
엘이 가장 먼저 만난 건 오르피나였다.
오르피나는 아자젤 못지않게 엘을 동경했다.
아니, 엘과 오르피나는 서로에게 특별한 감정을 갖고 있었다.
“나는 오르피나에게 어떤 부탁을 했다. 그 때문에 그녀는 인간으로서의 삶을 멈추고, 어느 왕국의 수호신으로 살아야 했다.”
다음으로 엘이 만난 건 포이베였다.
아레스와 냉전 중인 그녀를 설득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포이베는 천사 몇을 대동해 남부 대륙으로 이동했다.
당시 포이베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크레센시아 샹크리스’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마지막으로 아레스를 만나러 갔다.”
아레스는 다섯 사도 중에서도 독특한 성향을 지녔다.
포이베와 다툰 후 홧김에 이미르를 찾아가 드라칸(드라콘)을 만든 일화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독특한 성정의 소유자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아레스는 요툰과 고대인에게 관심이 많았다.
그런데 이제 요툰은 사라졌고, 그래서 아레스는 고대인의 삶에 누구보다 깊숙이 관여했다.
“아레스는 여러 인간의 삶을 연기하며 살았다. 때론 전사로, 때론 농부로, 때론 상인으로, 그렇게 다양한 인간 군상을 몸으로 경험했지. 그런 아레스가 빼어난 인간 마법사를 연기하던 중, 한 사내를 만났다. 그리고 그와 깊은 친분을 맺게 되었지.”
아레스가 만난 사내 역시 마법사였다.
사내는 마법사들의 왕국을 건설하는 것을 꿈꿨다.
아레스가 그것을 도왔다.
머지않아 사내는 왕이 되었다.
엘과 아자젤은 왕국을 찾아가 아레스를 만났다.
아레스는 왕의 측근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날 보자마자 아레스는 얼마 전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를 찾아 신나게 두들겨 팼다고 자랑하더군.”
기절에서 깨어난 도롱뇽이 그 말을 듣고는 파르르 비늘을 떨었다.
당시 도롱뇽은 아버지를 찾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네 아버지다.’ 라고 밝힌 자가 찾아와 흠씬 자신을 두들겨팼다.
당시의 도롱뇽이 아레스보다 많이 약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아레스는 도롱뇽의 아버지였고, 그래서 도롱뇽의 약점을 충분히 이용할 수 있었다.
도롱뇽에게 그 기억은 여전히 트라우마처럼 남아 있다.
“카아앗! 그, 그걸 왜 자랑해!”
“난 아레스에게 몇 가지 부탁을 했다. 오르피나와 포이베에게도 그랬듯이.”
엘은 미래의 단편을 봤다.
확신할 수는 없는 미래.
또한 많은 것이 바뀔 수 있는 미래다.
그러나 엘이 본 미래는 위험했고, 재앙을 막기 위해선 사도들의 힘이 필요했다.
“내겐 아레스를 만나는 것 외에도 왕국을 찾은 다른 목적이 있었다.”
엘이 바토리를 봤다.
“바토리. 널 만나는 것 말이야.”
바토리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깨달았다.
아레스의 도움으로 왕국을 세웠다는 사내.
그는 바토리의 아버지였다.
“그, 그렇다면 설마…….”
바토리는 기억했다.
늘 아버지의 곁에 서 있던 남자.
하나둘 주름이 깊어지는 아버지와 달리,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젊음을 유지하던 궁정 마법사.
“그래 바토리. 그가 바로 인간의 모습을 한 아레스였다.”
그러나 그 남자는 어느 날 왕국을 떠났다.
엘과 아자젤이 왕국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당시 그 일로 아버지는 크게 상심했었다.
“난 예지의 힘을 지녔지만, 그것은 절대적이지 않다. 상당히 가변적이지. 그러나 그 당시 아무리 미래를 내다봐도 결코 변하지 않는 것이 있었다. 바로 사르데니야 왕국의 멸망이었지.”
그 말에 도롱뇽이 몸을 움찔했다.
“난 드라콘 이스메니오스가 사르데니야를 멸망시킬 거라는 걸 알았다. 또한 그것에 어떤 방식으로든 혼돈이 개입할 거라는 것도.”
“그런데 왜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를 제거하지 않은 거지?”
아틸라의 물음에 도롱뇽이 힉! 비명을 질렀다.
아틸라는 표정 없는 얼굴로 엘의 대답을 기다렸다.
오르피나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는 그대가 이 세계를 독립된 세상으로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핏빛의 마녀 바토리 에르제베트와, 그대의 다른 동료들과 함께.
오르피나는 도롱뇽과 바토리가, 그리고 다른 동료들이 아틸라와 함께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도롱뇽을 제거하진 않더라도, 속박 같은 힘을 발휘해 사르데니야의 멸망을 막을 수도 있었을 터다.
실제로 엘은 도롱뇽을 속박해 바토리로 하여금 지하마계로 추락하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조금 전에도 말했듯, 무슨 수를 써도 사르데니야의 멸망은 피할 수 없는 미래였기 때문이다. 사르데니야 왕국의 멸망엔 혼돈의 의지가 아주 강력하게 개입돼 있었다.”
엘이 예지의 힘을 갖고 있듯, 혼돈도 예지의 힘을 갖고 있다.
혼돈 또한 엘처럼 미래를 본 것이다.
엘은 혼돈과의 보이지 않는 대결이 이미 시작됐다는 것을 알았다.
“난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어차피 막을 수 없는 멸망이라면, 멸망의 과정과 결과만이라도 자신의 손안에 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