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1. 밝혀지는 비밀 (1)
루미니우스는 보았다.
드래곤 중 최강의 존재.
아니 드래곤이란 등급을 넘어 ‘드라코니안’이라 불리며, 모든 드래곤의 탄생에 모태가 된 존재.
그 드라콘 이스메니오스가.
크르르르르르…….
자신에게 얼굴을 들이밀며 으르렁대고 있었다.
- 죽고 싶어 내 앞에 나타난 것이냐. 루미니우스.
루미니우스의 턱이 파르르 떨렸다.
루미니우스에겐 여전히 드라콘 이스메니오스에 대한 공포가 각인돼 있었다.
아니, 요툰 전쟁을 경험한 드래곤이라면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콰드드득.
드라콘 이스메니오스의 완력이 루미니우스의 머리를 더욱 바닥에 짓눌렀다.
루미니우스는 알았다.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는 전성기에 비해 형편없이 약해졌다.
‘정면 대결을 펼친다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
드라콘 이스메니오스와 루미니우스의 속성은 어둠과 빛, 다시 말해 극과 극이다.
더욱 강한 개체가 압도적으로 유리하다는 말이다.
과거엔 드라콘 이스메니오스가 강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부드드드드……!
루미니우스가 고개를 들었다.
눌려있던 몸체도 점차 일으켜졌다.
- 넌 약해졌다. 드라콘 이스메니오스.
퍼엉!
강렬한 빛줄기에 도롱뇽이 밀려났다.
큰 타격은 아니었다.
다만 밀쳐냈을 뿐이다.
- 건방지군. 루미니우스!
도롱뇽이 루미니우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면서 도롱뇽은 자신의 곁에 동료들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아틸라, 바토리, 오토, 슈시아, 펀치.
그중 누구도 이 결계 안으로 진입하지 못했다.
하지만 머지않아 바토리가 방법을 찾을 것이다.
“벨라!”
카스피가 벨라에게 달려왔다.
도롱뇽이 난입한 충격으로 보이지 않던 벽이 사라졌다.
“소란 떨기는. 꼬마.”
벨라는 무사했다.
루미니우스의 앞발에 가격 당하기 직전, 도롱뇽이 등장해 막았기 때문이다.
두 여인은 도롱뇽과 루미니우스의 싸움을 봤다.
둔탁한 소음과 거친 포효가 공간을 울렸다.
두 드래곤은 야수처럼 서로를 물고 때리는 원초적인 공격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섣불리 끼어들기 어려웠다.
퍼억! 퍽! 콰앙! 콰드득……!
루미니우스는 조금 당황했다.
자신이 압도적인 우위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상대의 공세가 심상치 않았다.
오히려 밀리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러나 그건 잠시였다.
드라콘 이스메니오스의 덩치가 조금씩 작아졌다.
힘도 약해졌다.
이유는 있었다.
도롱뇽은 지금의 자신이 루미니우스보다 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전투 초반에 모든 힘을 쏟아부었다.
- 한계가 드러난 것 같군. 드라콘 이스메니오스.
도롱뇽은 기회를 노렸다.
그러고는 어느 순간 루미니우스에게 초 레어 송곳 브레스를 쏘았다.
하지만 루미니우스가 펼친 빛의 장막이 그것을 막았다.
- 넌 나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드라콘 이스메니오스.
도롱뇽이 수세에 몰렸다.
더는 지켜볼 수만 없다고 생각한 벨라와 카스피가 움직였다.
하지만 도롱뇽을 도울 수 없었다.
어느새 그들과 두 드래곤 사이엔 보이지 않는 벽이 펼쳐져 있었다.
“이잇! 이게 또……!”
벨라와 카스피는 벽을 부수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도롱뇽! 도롱뇨오오옹!”
카스피가 쾅쾅 벽을 치며 외쳤다.
어느새 도롱뇽은 형편없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런 도롱뇽의 머리를 루미니우스가 앞발로 짓눌렀다.
처음 도롱뇽이 등장했을 때와 정확히 반대가 된 상황이었다.
* * *
한편 바토리는 용혈의 반지를 통해 도롱뇽의 기운을 추적하고 있었다.
그간 용혈의 반지는 바토리와 도롱뇽을 이어 주는 매개체 역할을 했다.
그래서 바토리는 도롱뇽의 기운을 탐지할 수 있었다.
“이쪽이로구나.”
일행은 바토리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달렸다.
그러면서 아틸라는 드라칼리온의 진동이 점점 커지는 것을 느꼈다.
오토가 중얼거렸다.
“여, 여긴 대체 어디란 말이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
하늘과 땅의 경계가 사라진 세계.
아틸라는 이전에도 이것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카르타고와의 두 번째 대결에서 버서커의 후유증으로 쓰러졌을 때.
그는 이와 같은 공간에서 눈을 떴고, 아버지를 만났다.
‘도현아.’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때와 같이 저만치에서 아버지가 손짓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환청이고 환시다.
그것을 떠올리자마자 풍경이 변했다.
검은 공간은 사라졌다.
그 대신 그의 눈에 카스피와 벨라가 들어왔고, 그 너머로 루미니우스에게 짓눌린 도롱뇽이 보였다.
“사, 살쾡이 암살자!”
카스피가 뒤를 돌았다.
그녀가 일순 반가운 표정을 지었지만, 아틸라를 보자마자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변했다.
“……미, 미안해 아틸라. 내가 나중에 다 설명할 테니까.”
설명을 듣지 않고도 아틸라는 대략적인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보이지 않는 벽으로 막혀 있어. 그, 그래서 도롱뇽을 도울 수가 없어.”
카스피의 말대로였다.
일행은 눈앞을 가로막은 벽을 만질 수 있었다.
바토리가 그것을 깨뜨려보려 했지만 역시나 실패했다.
오토와 슈시아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아틸라는 아니었다.
스르륵.
아틸라의 몸이 벽을 통과했다.
어떻게 했는지 그 자신도 몰랐다.
다만 아틸라는 그럴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결과가 그것을 입증했다.
일행이 놀란 토끼 눈을 뜨며 아틸라의 뒷모습을 봤다.
“힉! 어, 어떻게 한 거요 아틸라 님! 나도 데려가쇼!”
“야만전사야!”
“아틸라!”
아틸라는 동료들의 외침을 뒤로하며 루미니우스를 노려봤다.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은 전투다.
아틸라는 하워드 스틸숄더를 만나 오르피나의 마지막 성물을 얻길 원할 뿐이다.
‘루미니우스는 제국의 중요 병력이다.’
아틸라는 제국과 동맹을 원한다.
루미니우스는 빛 속성의 드래곤.
언데드를 상대로는 레드 드래곤 이상으로 최적화된 마력을 지녔다.
그러나 루미니우스의 앞발에 짓밟힌 도롱뇽을 면전에서 보자마자 그 생각은 휘발됐다.
아틸라는 드라칼리온을 꺼냈다.
“아틸라! 벨라는 루미니우스가 강철바위 대장장이들과 관련이 있다고 했어!”
카스피의 목소리를 들으며 아틸라는 달렸다.
아틸라는 지금의 자신이 루미니우스를 쓰러뜨릴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에겐 요툰헤임 시나리오의 두 번째 임무였던 요르문간드를 쓰러뜨리고 얻은 새로운 스킬이 있었다.
[ 마법 무효화 ]
이름에서 느껴지는 바와 같이 상대의 마법을 무효화할 수 있는 기술이다.
[ 3초 동안 상대의 마법 공격을 무효화할 수 있습니다. ]
3초라는 아주 짧은 시간이긴 하지만, 저 정도의 시간만으로도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다.
아틸라는 달리는 발에 힘을 주었다.
머뭇거릴 시간은 없다.
오래지 않아 도롱뇽의 해방 지속시간이 끝날 것이다.
그전에 드라칼리온으로 최대한 몰아쳐야 한다.
- 버서커 아틸라.
루미니우스가 도롱뇽을 옆으로 밀쳤다.
마치 빙판에 미끄러지는 것처럼 도롱뇽이 밀려났다.
루미니우스가 아틸라에게 앞발을 뻗었다.
그에 맞서 아틸라가 드라칼리온을 뻗었다.
[ 검기(劍氣) ]
파카카캉!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루미니우스의 발가락이 절단됐다.
아틸라의 검기는 이전보다 강해졌다.
스킬의 레벨업이 이뤄진 것이다.
루미니우스는 발가락 두 개가 사라졌지만 앞발 공격을 늦추지 않았다.
아틸라가 흑철방패로 공격을 막았다.
퍼엉! 아틸라의 몸이 뒤로 날아 바닥을 굴렀다.
루미니우스가 아틸라를 향해 브레스를 뿜었다.
등대의 빛처럼 쏘아지는 빛줄기였다.
퍼퍼퍼펑!
빛의 브레스에 타격 당한 풍경이 일그러졌다.
마치 잔잔했던 수면에 파동이 이는 것처럼.
그러나 그곳에 아틸라의 모습은 없었다.
아틸라는 바닥을 구르는 와중에도 타이밍을 재 도약 스킬을 시전했다.
[ 도약(跳躍) ]
루미니우스의 눈이 커졌다.
기척을 감지한 루미니우스가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루미니우스의 한쪽 안구에 드라칼리온이 박혔다.
콰아앙!
가공할 충격파와 함께 루미니우스의 안구가 부서졌다.
파괴된 눈에서 황금색 액체가 뿜어졌다.
루미니우스의 혈액이 원래 금빛인지, 아니면 이 장소가 만들어 낸 환각인지 아틸라는 몰랐다.
루미니우스가 고함을 지르며 머리를 흔들었다.
그 반동에 아틸라의 몸이 바닥에 꽂혔고, 둔탁한 마찰음을 내며 밀려났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아틸라의 눈은 루미니우스를 보고 있었다.
루미니우스가 다시금 브레스를 쐈다.
아틸라는 웃었다.
[ 마법 무효화 ]
아틸라는 루미니우스의 브레스가 자신에게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감각했다.
거리가 더 멀어지기 전에 두 발로 바닥을 디뎠다.
그리고 시전했다.
[ 돌진(突進) ]
파아아앙!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아틸라가 루미니우스의 머리를 향해 뛰었다.
아틸라가 상대에게 빠르게 접근할 수 있는 스킬은 도약과 돌진.
두 스킬을 아틸라는 초반에 쏟아 냈다.
지금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지 못한다면 이후의 전투 상황은 아틸라에게 불리하게 진행될 것이다.
[ 검기(劍氣) ]
아틸라는 다시금 검기를 발현했다.
노리는 건 루미니우스의 나머지 안구.
그것을 파괴한다면 루미니우스는 양눈의 시력을 모두 잃게 된다.
루미니우스는 이번에도 앞발로 검기를 막았다.
검기에 절단된 발가락들을 보며 루미니우스는 놀랐다.
루미니우스는 아틸라가 사용하는 기술들에 대해 알고 있다.
그러나 머리로 아는 것과 실제 눈으로 마주한 것엔 비할 수 없는 차이가 있었다.
실제로 루미니우스는 아틸라의 도약 스킬을 알고 있었지만,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고 한쪽 눈을 잃었다.
스르륵.
드라칼리온이 원래의 자그만 크기로 돌아갔다.
도롱뇽의 해방 지속 시간이 끝났다.
아틸라는 더 이상 검기를 발현할 수 없게 되었다.
- 실패로군. 버서커 아틸라.
루미니우스의 말대로, 아틸라는 루미니우스의 나머지 안구를 파괴하는 것에 실패했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핑그르르, 아틸라의 몸이 회전했다.
그의 왼손엔 어느새 흑철방패 대신 무휼이 쥐여 있었다.
그것이 루미니우스의 안구에 박혔다.
콰드드득.
루미니우스가 비명을 질렀다.
아틸라는 무휼을 비틀어 더욱 큰 상처를 만들었다.
계획이 들어맞았다.
이로써 아틸라는 시력을 잃은 루미니우스에게 적극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게 되었다.
파괴된 안구에서 무휼을 뽑았다.
루미니우스의 이마를 짓밟으며 몸을 띄웠다.
그 아래로 부웅, 루미니우스의 발톱이 지나갔다.
‘루미니우스는 오래지 않아 시력을 회복할 거다.’
아틸라는 무휼을 역수로 쥐었다.
지금 최대한 치명상을 입히며 성력을 모아야 한다.
그는 루미니우스의 목을 반쯤 잘라버릴 생각이었다.
공중제비를 돈 아틸라의 두 발이 루미니우스의 척추에 안착했다.
그 순간 그의 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무언가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지금의 루미니우스는 이상하다.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 부재한 상태.
아틸라의 두뇌가 가속했다.
아벨과 카르노피아.
카르타고와 아에스투스.
샤를과 드라코리치.
아틸라는 깨달았다.
‘용기사!’
루미니우스의 곁엔 드래곤 마스터가 없었다.
하지만 그럴 리 없다.
제국의 네 드래곤에겐 각각 드래곤 마스터가 있다.
그렇다면 루미니우스의 마스터는 지금 어디에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