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9. 임페리움 (3)
그리고 귀를 기울인 결과, 카스피는 바쁜 황실 업무에 지친 그가 이곳에서 은밀히 휴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카스피는 빛의 손에 대해 조사했었다.
그가 대중들에게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건 일 년여 전.
그전부터 존재했는지, 아니면 다른 지역에 있다가 그때쯤 황도로 이주한 것인지는 모른다.
아무튼 확실한 사실은 빛의 손이 탁월한 치유 능력을 지녔다는 것이다.
현재 제국에선 적대적 용족과 요툰, 언데드 군단과의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래서 빛의 손의 치유를 경험했다는 인물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손에서 눈부신 빛을 발현해 환자를 치유한다고 했어.’
그래서 붙여진 이명이 빛의 손.
카스피는 그와 비슷한 치유 능력을 지닌 이들을 알고 있었다.
샹크리스 왕국의 사제들.
그리고.
‘키릴.’
빛의 손이 환자들을 치유하는 광경을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그와 키릴의 방식이 유사하다는 것은 분명했다.
‘빛의 손은, 빛의 신 포이베의 권능을 받은 자일 지도 몰라.’
키릴의 치유 능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카스피는 알고 있었다.
물론 빛의 손이 키릴의 실력에 미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 황도에서 가장 유명한 치유사는 단연코 빛의 손이었다.
카스피는 벨라의 상처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았다.
‘내색은 안 하고 있지만, 무언가 후유증이 있는 게 분명해.’
그래서 카스피는 최고의 치유 능력을 지닌 자에게 벨라의 치유를 부탁하고 싶었다.
카스피가 지금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수는 빛의 손이다.
하지만.
‘빛의 손은 내 방문이 달갑지 않을 거야.’
그는 휴식을 취하고 있다.
게다가 비공식적인 휴식.
일반인의 치유를 거부하고, 휴식에 전념하겠다는 의미다.
거기에 더해 카스피는 이런 밤중에 찾아왔다.
‘그러게 여기 먼저 오자니까.’
카스피는 약간의 원망이 담긴 눈으로 벨라를 흘겨봤다.
벨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후……. 됐어.”
카스피는 출입문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러나 문 안에서는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카스피의 입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이, 이렇게 무시당하는 건가.’
순간 힘으로 뚫고 들어가 협박이라도 할까 생각했지만, 어리석은 방법이었다.
그런 식으로 접근하는 자에게 제대로 된 치유를 해 줄 리 없다.
어쩌면 벨라의 몸 상태를 더욱 악화시켜 놓을지도 모른다.
생각이 많아지자 카스피는 도리도리 고개를 털었다.
복잡하게 머리를 굴리는 건 성미에 맞지 않았다.
카스피는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무시하려면 해. 밤새도록 기다릴 테니까. 아니, 문을 열어줄 때까지 며칠이고 꼼짝도 하지 않을 거야.’
이 집은 외진 숲속에 있기에 주위 시선을 의식할 필요도 없었다.
그때 문 안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보통 사람이라면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작았다.
감각이 빼어난 카스피이기에 알 수 있었다.
“급한 환자라 하셨소?”
카스피가 반색하며 말했다.
“네, 네! 그, 그냥 겉보기엔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 그래서 꾀병을 부리는 걸로 보일 수도 있는데! 하지만 아니에요! 후유증이 있는 거 같아요! 무, 물론 직접 눈으로 상처를 본 건 아니지만, 그, 그래도 확실해요! 중한 환자에요! 약속할 수 있어요!”
속사포처럼 외치는 카스피를 보며 벨라가 키득키득 웃었다.
카스피가 웃지 말라며 눈을 부라리고 손짓 발짓을 했다.
끼익, 출입문이 열렸다.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위중한 환자인 것 같군. 들어오시오.”
문을 연 남자는 눈부신 금빛 머리칼을 지닌 미남자였다.
표정은 다소 피곤해 보였고, 머리색과 같은 금색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호오. 잘생긴 청년이네.”
집 안으로 들어서며 벨라가 말했다.
벨라의 옆구리를 카스피가 팔꿈치로 찔렀다.
“내 이름은 ‘루키우스 레메디’요. 뭐, 이곳까지 찾아오신 걸 보니 이미 알고 있을 것 같지만.”
“전 카스피에요. 이, 이쪽은 벨라고요.”
루키우스는 벨라에게 침상에 누우라 말했다.
그는 한눈에 벨라가 환자라는 걸 알아봤다.
벨라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침상에 누웠다.
“그런데 내가 오늘 여기 있다는 걸 어떻게 아셨소?”
“그, 그게 사실은…….”
카스피는 거짓말에 재주가 없었다.
“시, 실은 루키우스 선생님의 소문을 듣고 지난밤 여길 찾아왔었어요. 그리고 출입문에 귀를 대고 모, 몰래 엿들어서…….”
루키우스가 한숨을 뱉었다.
“지금 남의 집을 염탐했다는 말을 하는 거요?”
“죄, 죄송합니다. 그치만 저 금화는 꽤나 있어요! 전부 드릴 수도 있어요!”
카스피가 동전 주머니를 꺼내 열어 보였다.
그동안 제국에서 착실히 모은 금화였다.
“벨라. 너도 어서 꺼내 봐. 나보다 많잖아!”
“금화는 됐소. 다만 환자의 상의를 벗겨야 할 것 같은데, 괜찮겠소?”
“뭐야 치유사 양반. 너도 나한테 반한 거야?”
“아 벨라 쫌!”
벨라는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러고는 상의를 가슴께까지 들어 올렸다.
드러난 벨라의 옆구리와 복부를 보고 카스피는 크게 놀랐다.
그녀의 피부는 시커멓게 변해 있었고, 쭈글쭈글했다.
“벨라……!”
“치유사 양반. 저 꼬마가 너무 시끄러우니 다른 데로 좀 보내 줬으면 좋겠는데. 아니면 우리가 방 안으로 이동하든가.”
벨라가 윗입술을 핥으며 눈짓했다.
하지만 루키우스는 다른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당신은 요툰의 저주에 당한 것 같군. 그것도 아주 강력한.”
“호오. 돌팔이는 아니었잖아?”
루키우스의 눈이 벨라와 카스피를 번갈아 봤다.
“당신들은 최근 요툰을 쓰러뜨린 모양이군. 요툰의 저주는, 요툰이 죽기 전에 내뱉는 마지막 단말마니까.”
카스피는 무어라 답해야 할지 몰라 루키우스의 눈치만 살폈다.
“최근 마라쿠스 대호수에서 거대한 뱀 형상의 요툰이 등장했다는 보고가 있었소. 그리고 녀석을 쓰러뜨린 건 마라쿠스 수비대가 아닌, 제법 커다란 덩치의 암피테르를 탄 외부인들이었지. 그들이 사건 이후 황도로 날아왔다면 지금쯤 충분히 도착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시오.”
줄곧 웃기만 하던 벨라의 눈빛이 사납게 변했다.
그 눈을 보며 루키우스가 오른손을 들었다.
“걱정 마시오. 사람을 가려가며 치유하지는 않으니까.”
그의 손에서 은은한 빛이 흘렀다.
카스피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역시 루키우스의 힘은 키릴과 동류였다.
아니, 더욱 대단해 보였다.
“당신들은 사람을 잘 찾아왔군. 난 요툰의 저주를 치유해 본 적이 있소.”
“우, 우와! 정말요?”
“그러나 이렇게 강력한 저주를 보는 건 나도 처음이오. 당신들이 상대했던 요툰이 그 정도로 강력했다는 것이겠지. 또한 그런 요툰을 쓰러뜨린 당신들의 실력 역시도.”
빛의 손이 벨라의 복부를 덮었다.
자신만만한 얼굴을 잃지 않던 벨라가 미간을 찌푸리며 침음성을 흘렸다.
“많이 고통스러울 거요. 하지만 참아야 하오.”
“……빌어먹을. 하나도 안 아프거든?”
“거짓말이라는 게 훤히 표정에 드러나는군.”
그 말대로 벨라는 고통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치유는 생각보다 길었다.
카스피는 손에 땀을 쥐며 그 모습을 바라봤다.
루키우스의 이마에도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혔다.
이윽고 그의 손에서 빛이 사라졌다.
“한 번으로 될 치유가 아니오. 당분간 매일 오는 것이 좋겠군. 이 시각에.”
“저, 정말 그래도 돼요?”
“대신 내가 이곳에 머물고 있다는 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으면 좋겠소. 그러면 귀찮은 일이 벌어질 테니까.”
“무, 물론이죠!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요! 동료들한테도요!”
“그럼 이만 돌아가시오. 쉬어야겠소. 요툰의 저주를 밀어내는 건 상당한 체력을 요하는 일이거든.”
카스피는 연거푸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그러고는 벨라를 부축한 채 쏜살같이 루키우스의 집을 떠났다.
* * *
여관 식당에서 식사를 하며 아틸라가 말했다.
“카스피.”
“응?”
“요즘 벨라와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는 거지?”
“도, 돌아다니긴 무, 무슨! 다, 다, 당연히 강철바위 대장장이를 찾는 거잖아!”
“호오. 그래?”
“나, 나, 날 못 믿는 거야? 이, 이러면 나 서운해!”
아틸라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게 한눈에 보였지만 모른척했다.
그는 카스피를 믿었다.
“그래서, 강철바위 대장장이들의 소재는 아직인가. 벨라.”
“하루 이틀만 더 기다리라고. 금세 찾아줄 테니까.”
“그거 기대되는군.”
“야만전사야. 오늘 밤 야시장이 열린다는구나. 함께 구경 가지 않겠느냐.”
“넌 여기 놀러 온 거냐. 매번 무슨 그런 정보만.”
“아니니라. 나도 열심히 강철바위 난쟁이들의 소재를 파악 중이니라. 그러는 와중에 우연히, 아주 우연히 야시장이 열린다는 소릴 듣게 됐느니라.”
침묵을 지키던 슈시아가 손을 들며 말했다.
“야시장이라. 그거 재밌겠군. 나도 가겠다 바토리.”
“넌 빠지거라. 아틸라와 단둘이 갈 것이니.”
“그렇게 해라. 너희의 뒤를 밟으면 되니까.”
“내 오지 말라고 말했느니라. 슈시아.”
“난 가겠다고 말했다. 바토리.”
“그, 그러지 말고 다 함께 가는 것은 어떻겠수. 우리 그동안 염탐질하느라 다들 고생했는데 말이우.”
그렇게 말하며 오토가 흘끗 카스피를 쳐다봤다.
하지만 카스피는 오토에게 통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카스피는 요즘 오토와 눈을 마주치는 일이 없었다.
‘비, 빌어먹을. 역시 지난번에 너무 엉덩이를 만진 건가!’
오토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실상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넌 오토마이어에게 마음이 있는 거지?’
벨라가 했던 말이 카스피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 말을 들은 뒤로, 카스피는 오토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보기 힘들었다.
아무튼, 결국 일행은 다 함께 야시장을 구경하기로 했다.
바토리가 불만 가득한 얼굴로 구시렁댔지만 아틸라의 말 한마디에 조용해졌다.
카스피와 벨라는 루키우스의 집을 방문해야 했기에, 나중에 야시장에서 따로 만나기로 했다.
마침 야시장이 열리는 곳은 루키우스의 집과 가까웠다.
“뭘 그렇게 웃어? 꼬마.”
“헤헤헤.”
카스피는 기분이 좋았다.
루키우스가 벨라의 치유는 오늘이 마지막이 될 거라 말했기 때문이다.
벨라는 오늘, 완치한다.
카스피는 들뜬 마음으로 루키우스의 집을 향했다.
벨라의 몸이 호전됐다는 건 카스피가 가장 잘 알았다.
그런데 벨라는 이동하는 내내 표정이 좋지 못했다.
카스피가 물어도 희미한 미소만을 지을 뿐이었다.
“완치하면 이따 야시장에서 신나게 놀자. 아, 루키우스 선생님께도 뭘 사다 드리면 좋겠다.”
두 사람은 루키우스의 집에 도착했다.
이제는 익숙해진 출입문을 두드리자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카스피는 출입문을 열었다.
루키우스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의 주변엔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이 시체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그들은 암부였다.
“내가 여기 있는 걸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라 했을 텐데.”
벨라를 돌아보는 루키우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귀찮은 일이 벌어질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