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3. 공주와 기사 (2)
칼릭스는 부유한 상인의 집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칼릭스가 잠들기 전 동화를 읽어 주곤 했는데, 그 내용은 사악한 괴물에게 납치당한 공주를 구하는 젊은 기사의 이야기였다.
그것에 영향을 받은 칼릭스는 어린 나이부터 기사를 꿈꿨다.
화려한 전신갑주에 검과 방패를 들고, 사악한 괴물에게 납치된 공주를 구하는 멋진 기사.
그러나 칼릭스의 아버지는 아들이 가업을 물려받길 원했다.
‘넌 아비보다 위대한 상인이 돼야 한다.’
칼릭스의 아버지는 칼릭스가 검술 놀이를 할 때마다 붙잡아 호되게 야단쳤다.
그런 일이 반복되던 어느 날 칼릭스는 가출을 감행했고, 운 좋게도 마라쿠스 기사단의 눈에 띄어 견습기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이건 하늘이 주신 기회야.’
칼릭스는 훈련에 매진했다.
다행히도 그에겐 재능이 있었고, 그래서 머지않아 마라쿠스의 정식 기사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마라쿠스 제국령은 평화로운 곳.
사악한 괴물로부터 공주를 구한다는 그런 동화 속 이야기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너무 평화로워. 마라쿠스는.’
그러던 어느 날, 용족들이 제국을 습격했다.
용족의 힘은 대단했다.
수많은 기사와 병사들이 죽임 당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마라쿠스에 모습을 드러낸 용족은 한 마리도 없었고, 그래서 칼릭스는 이전과 별다를 것 없는 삶을 살았다.
그러던 중 칼릭스에게 믿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용인의 힘이 발현한 것이다.
칼릭스는 암피테르의 용기사가 되었다.
‘좋아! 나도 이제 사악한 용족들과 싸울 수 있게 됐어! 내 꿈에 한걸음 가까워진 거야!’
그러나 칼릭스의 꿈은 이뤄지지 않았다.
군단 소속 용기사로 편입된 것이 아니라, 다시 마라쿠스 제국령으로 배정받은 것이다.
각 제국령에도 최소한의 용기사는 주둔해야 한다는 방침 때문이었다.
칼릭스는 크게 실망했다.
‘마라쿠스에선 용기사의 힘을 발휘할 기회조차 없을 거야. 역사가 그렇게 말해 주고 있는걸.’
그러나 칼릭스는 아직 젊었고, 긍정적 사고방식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래서 언제고 꿈을 펼칠 기회가 올 것이라 믿으며 임무에 충실하기로 했다.
‘일단은 맡은 일을 열심히 하는 거야. 기다리면 기회는 올 거야. 반드시.’
칼릭스는 매일 밤 잠들기 전 어머니가 읽어 주시던 동화를 떠올렸다.
그러다 문득 거울을 들여다보면, 그 안엔 동화 속의 잘생긴 기사가 자신을 마주 보고 있었다.
칼릭스는 멋진 외모를 지녔다.
당연히 인기도 많았다.
많은 여인들이 그에게 구애의 손길을 보냈지만 칼릭스는 한사코 거절했다.
그의 머릿속엔 지난 십여 년 동안 상상력으로 빚어 낸 아름답고 완벽한 공주의 모습이 있었다.
‘나의 공주를 기다릴 거야. 운명은 반드시 날 찾아올 거야.’
그 바람은 이루어졌다.
칼릭스는 자신의 상상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여자를 만났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경계 임무를 마치고, 부하들과 단골 주점에 들어섰을 때.
칼릭스는 제 눈을 의심했다.
‘공주다! 내 상상 속 공주의 모습과 똑같아!’
기다렸다는 듯 위기도 찾아왔다.
주점의 창문이 산산조각 나며 엄청난 양의 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칼릭스는 자신의 암피테르를 불렀다.
그림처럼 그 위에 올라탄 칼릭스는 어릴 적부터 수도 없이 연습했던 문장을 소리 높여 외쳤다.
“내 손을 잡으시오! 공주!”
그 순간 칼릭스는 정말로 자신의 동화 속 기사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공주의 눈이 동그래졌다.
놀란 표정마저 상상과 똑같았다.
주위를 두리번대던 공주가 칼릭스의 손을 잡았다.
칼릭스는 공주를 끌어올려 암피테르의 등에 태웠다.
그러고는 공주를 돌아보며 수백, 수천 번 연습한 멋진 기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씨익.
됐다.
이제 공주와 함께 작금의 위기를 벗어나 행복한 결혼 생활을…….
그 순간 공주의 동료로 보이는 세 여인이 암피테르의 등으로 뛰어 올라왔다.
“신세 좀 지자고 용기사 나리. 헤헤.”
응? 이게 아닌데.
* * *
시간을 몇 초 전으로 되돌려.
“내 손을 잡으시오! 공주!”
바토리는 자신에게 손을 뻗으며 소리치는 기사대장을 보며 당황했다.
공주라니.
설마 저 아이는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기라도 한 것인가.
바토리는 이내 마음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리가. 하지만.’
바토리는 아틸라를 돌아봤다.
아틸라가 고개를 끄덕였고, 그래서 바토리는 기사대장의 손을 잡았다.
부웅, 바토리의 몸이 떠올라 암피테르의 등에 안착했다.
“카스피! 슈시아! 벨라!”
세 여인은 아틸라의 의도를 단박에 깨달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암피테르 위에 올라탔다.
마침 기사대장은 바토리를 향해 느끼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카스피도 헤헤 웃으며 말했다.
“신세 좀 지자고 용기사 나리. 헤헤.”
“뭐, 뭐요! 당신들은!”
“일단 이륙하는 것이 좋겠군. 물벼락 맞기 전에.”
슈시아가 말했다.
일단은 칼릭스도 그 말이 옳다고 여겼다.
암피테르가 날개를 펄럭이며 허공에 솟았다.
이어 칼릭스는 강한 위화감을 느꼈다.
‘이건……?’
본래 암피테르는 자신의 용인이 아닌 다른 사람을 태우는 것을 싫어한다.
꿈에 그리던 공주를 만난 탓에, 칼릭스는 그 사실을 잊고 공주에게 손을 뻗었다.
그렇게 공주에 이어 세 명의 여인이 추가로 올라탔다.
그런데 암피테르는 그들을 거부하지 않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길게 생각할 틈은 없었다.
하늘 위로 떠오르자마자, 주점을 습격한 괴물의 위용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뭐, 뭐가 저렇게 커!”
괴물은 거대한, 아주아주 거대한 뱀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칼릭스는 용기사가 되며 중간계를 침입한 용족들에 대해 교육받았다.
그러나 저런 용족은 본 적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건, 저 압도적인 크기.
‘대호수의 절반은 되는 것 같다!’
정말 말도 안 되는 크기였다.
물론 끝도 보이지 않는 기다란 몸이 똬리를 틀고 있기에 더욱 커 보이는 것이고, 머리만 보면 그보다는 훨씬 작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웬만한 건물쯤은 가볍게 삼킬 수 있을 듯했다.
“흐응. 저것이 요르문간드로구나.”
요르문간드.
저 엄청난 크기로 인해 ‘세계의 뱀’이란 이명을 지닌 요툰.
“요, 요르문간드?”
칼릭스가 되물었다.
그러면서 그는 최근 대호수에서 벌어졌던 사건이 녀석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쉽지 않은 상대가 등장했구나.”
바토리는 대호수에서 꿈틀대는 요르문간드를 내려 봤다.
요르문간드는 본래 물속에서 사는 요툰이다.
그렇지만 엘에게 듣기로, 요르문간드는 어느 정도의 물만 존재한다면 자유롭게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요툰이기도 하다.
그것을 증명하려는 듯 요르문간드가 대호수 바깥으로 기어 나왔다.
칼릭스는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공주를 구하긴 했는데, 괴물이 너무 강해 보였다.
‘주, 중요한 건 공주를 구하는 거야. 애초에 동화 속 기사가 사악한 괴물을 물리친 건 공주를 구하기 위해서였어. 즉, 괴물을 쓰러뜨리는 게 필수는 아니라는 거야!’
기사의 목적은 공주를 구하는 것이다.
괴물을 쓰러뜨리는 건 그 과정에 벌어진 불가피한 사건이었을 뿐.
칼릭스는 애써 그렇게 자기합리화를 했다.
하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넘치는 호숫물에 떠내려가는 주민들이 보였다.
부하들의 모습도 보였다.
그들은 제 몸이 떠내려가는 와중에도 주민들을 구하려 애쓰고 있었다.
칼릭스의 눈이 부릅떠졌다.
‘이 내가 무슨 생각을!’
칼릭스는 찰싹! 자신의 뺨을 때렸다.
‘난 기사야! 공주를 지키는 명예로운 기사! 그런 내가 위험에 처한 주민과 동료들을 구하지 않는다면 누가 한단 말인가!’
칼릭스는 부끄러웠다.
괴물의 위압감에 짓눌려 한심한 선택을 하려 했던 자신이.
‘도망치지 않아.’
칼릭스의 눈빛이 변했다.
암피테르에게 하강의 의지를 전했다.
그러고는 동화 속에 등장했던 또 다른 대사를 우렁찬 목소리로 읊었다.
“꽉 잡으시오! 공주!”
* * *
아틸라는 급속도로 불어나는 물 탓에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아틸라 님! 이러다 둘 다 떠내려가겠소!”
오토는 암피테르 위에 타지 못했다.
경험상 암피테르에 탈 수 있는 인원은 최대 네 명에서 다섯 명 정도다.
심지어 기사대장의 암피테르는 요롱이보다 작다.
상대적으로 체중이 적게 나가는 네 여인이었기에 어렵사리 탑승이 가능했을 것이다.
‘정 위급한 상황이 닥치면 오토는 요롱이를 불러내면 되니까.’
“히이익! 저, 저저저 괴물 좀 보쇼! 아틸라 님!”
아틸라도 괴물을 봤다.
호수 위로 솟아나는 거대한 뱀의 머리.
아틸라는 저것이 무엇인지 단번에 직감했다.
“요르문간드.”
요르문간드는 흐레스벨그, 펜리르와 더불어 가장 강력한 요툰 중 하나로 평가받는 녀석이다.
먼 옛날 요툰 전쟁에서도 요르문간드는 수많은 드래곤을 물리쳤다.
드래곤처럼 하늘을 날 수는 없지만 워낙에 몸이 길었기에, 하늘 위의 드래곤에게도 충분히 공격을 가할 수 있었던 것.
‘요르문간드는 지면에 물이 차올라 있기만 하다면 어디든 이동할 수 있다. 물의 높이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
그것이야말로 요르문간드가 무서운 점이다.
요르문간드는 저 거대한 몸을 이용해 엄청난 물을 빨아들이고, 그것을 입으로 토해 내며 이동할 수 있다.
게다가 지금 요르문간드는 대호수 속에서 나타났다.
엄청난 호숫물이 범람한 상태.
녀석의 행동반경은 극도로 넓어졌다.
아직 몸 안에 저장한 호숫물을 사용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이대로라면 마라쿠스 제국령 전체가 위험해지겠군.’
물론 아틸라가 알 바는 아니다.
아틸라는 이곳에서 이방인에 불과하고,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요르문간드와 대치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아틸라는 요르문간드를 쓰러뜨리기로 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 요툰헤임 시나리오가 이어집니다. ]
지난번 제국을 찾았을 때 떠올랐던 요툰헤임 시나리오.
그것의 두 번째 임무가 발생했다.
[ 두 번째 임무 ]
[ 마라쿠스 대호수에서 나타난 요툰, 요르문간드를 쓰러뜨리십시오. ]
[ 요르문간드는 완벽하게 중간계로 넘어온 상태가 아닙니다. ]
[ 요르문간드가 이 세계에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숨통을 끊으십시오. ]
‘그렇군. 요르문간드는 완전한 상태가 아니다.’
그럼에도 요르문간드는 강력할 것이다.
따라서 녀석을 잡는다면.
‘상당한 경험치를 주겠지.’
아틸라는 자신과 동료들이 더욱 강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요르문간드는 딱 좋은 먹잇감이다.
[ 그러지 않으면 요툰헤임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완전히 열려, 수많은 요툰들이 중간계로 침입할 것입니다. ]
‘빌어먹을. 또야?’
첫 번째 임무에서도 같은 메시지가 등장했었다.
경험치가 아니더라도, 반드시 놈을 쓰러뜨려야 하는 이유가 생겼다.
[ 임무 완료 시 특별한 보상이 주어집니다. ]
[ 남은 시간 29:59 ]
주어진 시간은 30분.
아틸라는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요르문간드는 강력한 요툰이지만 분명한 약점이 있다.
그리고 아틸라에겐 놈의 약점을 노릴 만한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