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만든 세계 속 광전사가 되었다-352화 (352/425)

352. 공주와 기사 (1)

마라쿠스 제국령엔 거대한 호수가 있다.

수오미 왕국의 대호수보다도 커다란 이 호수는 클라우디우스 제국의 유명한 휴양지 중 하나로.

호수 외곽에서부터 방사형으로 퍼지는 강줄기들이 자연적인 구획을 나눠, 호수를 중심으로 여러 도시가 군집된 형태를 하고 있었다.

현재 남동쪽의 에레트리아 군주령에서는 언데드와의 전쟁이 한창이고.

서부 각지에선 요툰과의 전쟁으로 피바람이 불고 있지만, 이곳 마라쿠스의 사람들은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다.

축복의 마라쿠스.

많은 사람들은 마라쿠스를 이렇게 불렀다.

먼 옛날 마라쿠스 왕국에서 마라쿠스 제국령으로 취합된 이후, 이곳에서 전쟁이 벌어진 적은 없었다.

그래서 여러 부유한 귀족과 상인들은 제국이 혼란스러운 이때,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마라쿠스로 모여들었다.

“남동쪽 언데드 군단의 기세가 예사롭지 않다고 하더군.”

“나도 들었어. 유령마를 탄 죽음의 기사와 언데드 용기사들이 파죽지세로 몰려들고 있다던데.”

“서부 각지에서 나타나는 요툰들도 큰일이라더군.”

“불의 드래곤 마스터께서 밤낮없이 놈들을 처단하고 계신다는 소식이네.”

제국에서 벌어지는 전쟁들은 마라쿠스의 주민들에겐 초미의 관심사였다.

그러나 적어도 제국령만큼은 황도에서 아낌없이 무장 병력을 추가 배치시켰기에, 그들은 말과 달리 크게 염려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모두가 같은 생각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이러다 정말 큰일이라도 벌어지는 것은 아닐까.”

“무슨 큰일 말인가.”

“만약 언데드 군단이 에레트리아 군주령을 완전히 정복한다면 말일세. 그럼 놈들의 다음 목표는 카잔 군주령일 테고, 그렇다면 머지않아 이곳 마라쿠스 제국령까지 마수가 뻗칠 가능성도 있지 않은가.”

“예끼 이 사람. 그때까지 황도에서 가만있을 리가 있겠는가. 그런 상황이 벌어지기도 전에 제국 최강의 군대가 내려와 놈들을 섬멸시킬 거네. 그래. 황궁 기사단이라도 출동하겠지.”

“황궁 기사단이 강한 건 사실이지. 하지만 언데드 군단엔 이미 용기사도 있다지 않은가. 군마를 타고 기동하는 황궁 기사단으로선 언데드 용기사를 타격할 수단이 없네.”

“제국엔 그보다 훨씬 많은 용기사가 있네. 게다가 4인의 드래곤 마스터도 존재하지 않나. 제아무리 언데드 군단이 위협적이라 해도 드래곤 마스터를 당할 수는 없지.”

“암암. 이미 불의 드래곤 마스터께서도 성공적으로 요툰들을 제압 중이시지 않은가.”

주점에서 사내들이 얼큰하게 술에 취해 떠들었다.

다른 자리에서도 비슷한 내용들이 오갔다.

창밖으로는 마라쿠스 대호수가 훤히 내다보였다.

카스피가 말했다.

“여기 사람들은 너무 위기의식이 없는 것 같아. 그렇지 않아 영주 나리?”

“아이고 내 말이 그 말이오! 다들 그 괴물 같은 카르타고와 아에스투스를 본 적이 없으니 저런 한가한 소리나 지껄이는 거지!”

일행은 마라쿠스 제국령에 도착했다.

이곳으로 오는 동안 별다른 어려움은 없었다.

간혹 기사와 병사들이 통행증을 요구하긴 했지만, 벨라가 꺼내든 금속패를 보자마자 큰 소리로 경례하며 일행을 통과시켰다.

그게 무어냐는 아틸라의 물음에, 벨라는 죽은 플루토의 몸에서 찾은 것이라고 답했다.

그러자 바토리는 플루토의 구슬이 자신의 손에 있으니, 금속패 또한 자신에게 소유권이 있다며 주장했다.

그 말을 벨라는 번번이 무시했다.

“아무튼 내 덕에 이렇게 편하게 온 건 알지? 내가 플루토 그 재수 없는 녀석에게서 이걸 빼앗아왔기 때문이라고. 캬아. 어쩐지 딱 죽이고 싶게 생겼더라니 이런 선물을 다 주고 말이야.”

“몇 번이고 말했지만 그건 내 소유이니라. 내 잠시 너에게 빌려준 것에 불과하니라.”

“헛소리는 그만두시지 바토리. 난 구슬만 넘긴 거야.”

벨라가 금속패를 흔들며 히죽 웃었다.

벨라는 일행과 제법 가까워졌다.

물론 경계의 시선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

벨라는 여전히 홀로 방을 썼고, 나머지 일행은 벨라를 향한 긴장을 풀지 않았다.

특히 도롱뇽과 펀치는 벨라에게 강하게 날을 세웠다.

기회를 엿보던 펀치가 금속패를 낚아채려 폴짝 뛰어올랐지만,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입에 물었다.

“훠이훠이. 넌 좀 귀엽게 생겼지만 금속패를 줄 수는 없어. 이건 내 거라고.”

벨라가 재빠르게 펀치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끼아옹! 비명을 지른 펀치가 바토리의 몸 뒤로 숨었다.

“펀치를 괴롭히지 말거라.”

“괴롭히긴 누가 괴롭혀. 예뻐해 준 건데.”

“펀치가 싫다지 않느냐.”

“좋아하면서 표현만 저렇게 하는 건지 누가 알아? 인간 중에도 저런 부류는 있다고.”

바토리는 대답 없이 벨라를 째려봤다.

아틸라가 말했다.

“벨라. 황도에 도착하면 하워드가 있는 곳으로 정확히 안내할 수 있는 거겠지?”

“물론. 장소가 바뀌지 않았다면 말이야.”

아벨이 없었지만, 일행은 너무도 평화롭게 북진하고 있었다.

제국을 가로지르는 큰 길은 치안이 좋았고, 도적떼를 찾기 힘들었다.

간혹 귀족의 탈을 쓴 도적보다 못한 놈들이 행패를 부려오긴 했지만, 벨라의 금속패 하나로 모든 게 해결됐다.

‘모, 몰라 뵙고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부디 한 번만 용서를!’

어떤 귀족들은 자진해서 금화를 바치기도 했다.

그래서 일행은 금전적으로도 아무런 불편 없이 움직일 수 있었다.

문제는 제국의 땅덩어리가 워낙 큰 탓에, 황도까지는 제법 거리가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요롱이를 타고 움직인다면 보다 빠르겠지만, 6명이 모두 타는 건 불가능했다.

실제로 아틸라, 바토리, 오토, 카스피, 이 네 명을 태운 것만으로도 요롱이의 기동성은 눈에 띄게 떨어졌다.

게다가 아틸라는 괜히 요롱이를 타고 움직이며 불필요한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용기사들을 마주치기라도 하면 귀찮아지지.’

물론 벨라의 금속패로 손쉽게 해결할 수도 있겠지만, 해결이 되지 않을 경우 전투를 치러야 할 가능성이 있다.

요롱이는 본래 제국 용기사의 암피테르였다.

정말로 위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숨겨두는 편이 좋다.

끼이익.

주점의 문이 열리며 무장한 자들이 들어왔다.

복장으로 보건대 제법 실력을 갖춘 기사들인 듯했다.

기사들은 빈자리에 앉아 술과 음식을 주문했다.

그러고는 자기들끼리 떠들기 시작했다.

“대장. 그 대호수 사건 말입니다. 경과는 어떻습니까.”

“황도에 보고는 올렸다. 곧 황실 마법사들이 조사하러 오겠지.”

“애초부터 그 넓은 호수를 가로질러 휴양을 즐긴다는 것부터가 위험한 생각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끝도 보이지 않는 호수 가운데 뭐가 있을 줄 알고 그런 모험을 벌인답니까.”

“흔적도 없이 사라진 배가 벌써 여섯 척입니다. 운 좋게 살아 돌아온 자들도 정신이 이상해졌다지 않습니까.”

“이미 사망자가 나왔으니 황도에서도 모른 체하진 않을 거다. 그중엔 제국령의 유력 가문도 포함됐으니 세밀한 조사를 거치겠지.”

아틸라는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일부러 들으려 한 것은 아니다.

다만 기사들과 아틸라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았고, 또 아틸라는 보통 사람보다 발달된 청력을 갖고 있었다.

‘대장이 상당히 젊군.’

기사들의 대장은 스물 중반 정도로 보였다.

오히려 부하 기사들이 삼십 대 이상으로 구성된 무리였다.

‘둘 중 하나로군. 상당한 실력자이거나, 아니면 지체 높은 귀족이거나.’

그러던 중 기사대장의 눈길이 우연히 일행을 봤고, 동그랗게 커졌다.

바르르 몸을 떨던 기사대장이 복장을 단정하게 고쳤다.

그러고는 일행을 향해 다가왔다.

“미안하지만 처음 보는 이들인 것 같군. 주민이라면 주민증을 보여 주시오.”

아틸라는 물끄러미 기사대장을 봤다.

주민증? 무슨 주민등록증 같은 건가.

“타지에서 오신 모양이군. 그럼 통행증을 보여 주시오.”

말하는 내내 기사대장의 눈은 바토리를 향해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상당히 외모가 출중한 청년이었다.

동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멋진 기사의 표본.

무슨 이유에선지 두 볼이 발갛게 달아오른 모습은 미성숙한 소년 같기도 했다.

바토리가 희미한 미소를 띠며 벨라를 돌아봤다.

“보여드리거라. 벨라.”

“응? 뭘?”

“네가 갖고 있는 금속패 말이다.”

“그런 거 없는데?”

“뭐라?”

벨라가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히죽히죽 웃었다.

바토리의 표정이 변했다.

“장난은 그만하고 어서 보여드리거라. 기사분께서 기다리고 계시지 않느냐.”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 바토리.”

“벨라.”

아틸라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에도 벨라는 금속패를 꺼내지 않았다.

기사대장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주민증도, 통행증도 없다면 당신들의 신변을 구속할 수밖에 없소.”

그렇게 말하면서도 기사대장은 난감했다.

주민증과 통행증을 요구한 건 단순히 말문을 열기 위함이다.

그런데 이 일행에겐 주민증도, 통행증도 없었다.

마라쿠스 제국령은 타지의 여러 귀족들이 방문하는 휴양지.

따라서 그 무엇보다 치안 유지가 중요했다.

그런 연유로 마라쿠스의 주민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주민증을 발급받았고, 외부인의 통행증 검사 또한 철저했다.

한 마디로 이런 개방된 자리에 주민증이나 통행증을 소지하지 않은 일행을 만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낌새를 알아챈 나머지 기사들이 슬금슬금 다가왔다.

그들의 손은 벌써 검 손잡이를 쥐고 있었다.

“대장. 무슨 일입니까.”

기사대장은 일행의 행색을 면면이 살폈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여자.

그녀를 호위하는 기사가 둘.

궁수 하나.

전사처럼 보이진 않지만, 눈빛이 예사롭지 않은 여자 둘.

‘그리고 강아지와 도마뱀이 한 마리씩.’

수배자 명단에 오른 이들은 아니다.

게다가 바토리라 불린 여자는 누가 봐도 고귀한 신분처럼 보였다.

그러나 부하들까지 다가온 이상,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다.

“다시 말하겠소. 주민증이나 통행증을 보여 주시오. 그렇게 한다면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오.”

일행의 눈이 다시 벨라를 바라봤다.

물론 일행의 실력으로 기사 몇 명을 쓰러뜨리는 건 일도 아니다.

그러나 아틸라는 가급적 귀찮은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벨라.”

카스피가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속삭였다.

벨라가 어깨를 으쓱했다.

“에이. 바토리의 반응을 좀 더 즐기고 싶었는데.”

벨라의 손이 품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였다.

차차차창!

주점의 모든 창이 산산조각으로 깨졌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부서진 창을 뚫고 엄청난 양의 물이 들이닥쳤다.

콰콰콰콰콰콰콰!

댐이라도 터진 것처럼 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과 테이블, 의자 같은 것들이 물에 휩쓸렸다.

기사대장이 외쳤다.

“주민들을 구해라!”

기사들이 달려가 뒷문을 박찼다.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지붕이 날아갔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다만 그들은 볼 수 있었다.

펄럭.

하늘에서 암피테르가 내려왔다.

기사대장이 능숙하게 암피테르 위에 올랐다.

그러고는 다급한 얼굴로 바토리에게 손을 뻗었다.

“내 손을 잡으시오! 공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