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1. 기시감
“잘 봤어? 꼬마.”
벨라가 뒤돌아 카스피를 봤다.
그녀의 발치엔 목 잘린 플루토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허공의 틈새도 모습을 감췄다.
그 대신 불길한 기운을 발하는 구멍이 같은 자리에 생성됐고, 시체를 빨아들였다.
놀라운 점은 빨려 드는 플루토의 몸이 조각조각 나뉘며 크고 작은 용수철로 변했다는 것이다.
용수철들이 단단히 뭉쳐지며 구의 형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그것은 완전한 구슬의 형태가 됐고, 벨라의 손 위에 떨어졌다.
손안에서 이리저리 구슬을 굴리던 벨라가 히죽 입가를 올렸다.
“그나저나 배움이 빠른걸? 설마 내 기척을 감지하고 뒤쫓아올 줄이야.”
“왜 플루토를 죽인 거지?”
“궁금한 게 고작 그거야? ‘왜’가 아니라, ‘어떻게’를 물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그것도 물을 거야. 먼저 한 물음에 대답이나 해.”
카스피와 벨라의 관계는 묘했다.
단주와 단원도 아니었고, 스승과 제자도 아니었다.
굳이 정의하자면 둘은 동료 관계에 가까웠다.
그래서 카스피는 벨라에게 반말을 했다.
어찌 됐든 지금의 벨라는 숨겨진 아픔을 간직한 자칭 비운의 미녀 용병이었으니까.
“처음부터 녀석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 관조자 사냥은 내게 재밌는 유희이기도 하고.”
“단순히 유희 때문에 죽였다고? 상대는 관조자야. 그중에서도 플루토는 상당한 강자라고 들었어.”
“호오. 날 걱정하는 거야?”
“뭐, 뭐래? 그럴 리가 있어? 다만 네가 죽으면 더 이상 너와 훈련할 수 없으니까! 그래서 그런 거야!”
벨라가 키득키득 웃었다.
물론 역용술로 바꾼 얼굴이지만, 벨라의 웃음은 직전까지 관조자 하나를 무참히 도륙했던 살수와는 거리가 있었다.
카스피는 문득 생각했다.
벨라의 겉모습은 이십 대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나이가 많을 것이다.
벨라는 몇 살인 걸까.
“뭘 그렇게 봐? 꼬마.”
“너, 널 본 거 아니거든.”
“바토리 에르제베트가 죽이고 싶어 했으니까.”
갑작스러운 벨라의 말에 카스피가 되물었다.
“뭐라고?”
“바토리 에르제베트가 이 녀석을 죽이고 싶어 했지. 이유를 생각해 보니 뻔하더군. 플루토는 제 입으로 레비아의 파트너라고 말했어. 그렇다면 케렌시아의 레비아 영주 또한 관조자였다는 거지. 그런데 내가 보기에 그 여자에게선 딱히 관조자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거든? 마치 평범한 인간 같았단 말이야. 거기에 더해 레비아는 바토리 에르제베트와 상당히 가까워 보였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바로 깨달음이 오더군. 레비아는 인간의 삶을 원하고 있고, 바토리 에르제베트는 그 소원을 이뤄 주고 싶어 한다는걸. 그래서 바토리 에르제베트는 플루토를 죽이려 했던 거야. 플루토를 죽여 구슬로 만들면 레비아는 인간으로 되돌아갈 수 있으니까. 마치 리베르 파테르를 잃은 지금의 바토리 에르제베트처럼 말이지.”
쉴 틈 없이 이어지는 벨라의 말에 카스피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다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바토리가 플루토를 구슬로 만들고 싶어 한다는 건 카스피도 바토리에게 들어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바토리가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것과, 벨라가 플루토를 구슬로 만드는 것에 무슨 상관관계가 있단 말인가.
“바토리의 바람을 왜 네가 이뤄 준 거지?”
“그거야 꼬마, 너 때문이지.”
“뭐?”
“바토리 에르제베트는 네 보호자니까. 그래서 도와준 거야.”
“보, 보호자라니! 지금은 오히려 내가 바토리를 보호하고 있거든?”
벨라가 큰 소리로 웃었다.
“하하하하! 정말?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무, 물론 바토리가 날 보호해 준 적이 있긴 하지만…….”
카스피는 바토리를 알게 된 후의 기억을 떠올렸다.
많은 일들이 있었다.
바토리는 강력한 마법을 바탕으로 일행을 보호했고, 때론 무시무시한 파괴자가 되어 적을 섬멸했다.
카스피는 인정했다.
‘벨라의 말대로야. 바토리는 나뿐 아니라 동료 모두를 보호했어.’
중간에 카스피는 바토리의 곁을 떠난 적도 있었다.
바토리는 카스피에게 반지를 건네줬다.
‘시공추적의 반지.’
훗날 알게 된 일이지만 그 반지 덕에 카스피는 아틸라와 정신을 연결했고, 라시드를 납치한 파우스트의 관조자 노이어를 쓰러뜨릴 수 있었다.
그날 카스피는 귀살의 힘을 각성했다.
이후 카스피는 연이어 등장하는 하싸씬의 살수들을 쓰러뜨렸다.
‘바토리의 반지.’
카스피는 반지를 소중히 여겼다.
지금은 다시 바토리의 손에 넘어갔지만, 카스피는 반지를 지녔던 내내 그것을 바토리라 생각하며 애지중지했었다.
반지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바토리와 함께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카스피는 반지를 통해 바토리와 다시 만났다.
그날의 감정은 지금도 선명했다.
이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쳤다.
카스피는 깨달았다.
‘……난 바토리를 엄마처럼 생각했던 건가.’
카스피에겐 엄마가 없다.
엄마는 죽었다.
셰이카와, 하싸씬의 손에.
‘난 엄마를 몰라.’
엄마의 기억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
당시 카스피는 갓난아기였고, 사바흐에게 구출되어 라시드의 손에 맡겨졌다.
‘하지만 난 스승님을 기억해 냈어.’
아마도 메피스토펠레스의 환술 때문일 것이다.
어찌 됐든 카스피는 갓난아기였을 때의 기억을 되살렸고, 어린 날의 사바흐를 기억했다.
‘하지만 아무리 환술이 있었다 해도, 어떻게 스승님을 기억할 수 있었던 거지? 난 갓난아기였는데.’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갓난아기 때 겪은 일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이야기일까.
그러나 결론적으로 카스피는 사바흐를 기억했다.
그것이 환술이 만들어 낸 허상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허상은 아니야. 아틸라의 이야기와 내 기억엔 차이가 없어.’
카스피는 머릿속에서 새로운 기억이 조립되는 걸 느꼈다.
마치 깨진 유리창이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듯한.
그러나 복원된 유리는 완전하지 않았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크흑……!”
양손으로 머리를 움켜쥐며 거친 숨을 뱉었다.
어느새 달려온 벨라가 무어라 말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들리지 않았다.
시야가 검게 변했다.
카스피는 자신이 다시 갓난아기가 됐다는 것을 알았다.
누군가의 품속.
여자였다.
카스피는 직감적으로 자신이 누구에게 안겨 있는 것인지 알았다.
‘……엄마?’
자신을 내려 보는 여자.
그녀의 얼굴이 자신과 닮아 있다는 것을 카스피는 알았다.
여자는 웃고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급함이 엿보였다.
‘내…… 엄마라고……?’
카스피는 손을 뻗어 여자의 얼굴을 만져 보려 했다.
하지만 할 수 없었다.
여자가 무어라 말했고, 점점 멀어졌다.
다시 시야가 캄캄해졌다.
날붙이 부딪는 소음이 사방을 울렸다.
이윽고 카스피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건 낯익은 얼굴이었다.
언젠가 기억 속에서 만난 일이 있었던, 어린 날의 사바흐.
‘스승…… 님…….’
사바흐는 크게 놀란 얼굴이었다.
그의 눈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그러나 길지 않았고, 이내 사바흐는 카스피를 품에 안았다.
그 순간 벨라의 목소리가 카스피의 머리를 흔들었다.
카스피는 정신을 차렸다.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들자 벨라의 얼굴이 보였다.
“어이 꼬마. 괜찮은 거야?”
카스피는 멍하니 벨라를 바라봤다.
눈빛이 낯익다.
그러나 누구를 닮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 * *
아침 해가 떠올랐다.
일행은 식당으로 내려왔다.
식당에선 벨라가 홀로 식사를 하고 있었다.
“다들 아침잠이 많네? 해가 이미 중천에 떠올랐다고.”
“중천은 무엇이 중천이더냐. 해가 뜨고 한 시진도 지나지 않았거늘.”
바토리의 퉁명스러운 대답에 벨라가 키득키득 웃었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하나하나 따지긴. 너처럼 오래 살면 다들 그렇게 쪼잔해지는 거야?”
“뭐라? 쪼잔?”
“아침부터 싸우지 말고 밥이나 먹어라.”
아틸라의 말에 바토리는 뾰족하게 입술을 내밀었지만 군말 없이 자리에 앉았다.
테이블 위엔 이미 먹음직한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창밖의 날씨는 좋았고, 많은 사람들이 아침부터 활기차게 움직였다.
식당 안에도 어제와는 달리 사람이 북적거렸다.
고기를 한입 베어 물며 아틸라가 말했다.
“카스피.”
“응?”
“밤엔 어딜 나갔다 온 거지?”
지난밤 아틸라는 카스피의 기척을 느꼈다.
“아. 그, 그건…….”
카스피가 머뭇대자 벨라가 아틸라를 향해 무언갈 던졌다.
그것을 받아 낸 아틸라는 조금 놀란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정말로 크게 놀란 건 바토리였다.
“……!”
아틸라가 어깨를 으쓱하며 구슬을 바토리에게 넘겼다.
바토리는 구슬을 확인했다.
분명했다.
이건 플루토의 구슬이다.
“너에 대한 작은 선물이라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어. 그러니까 좀 나한테 그만 으르렁거리라고.”
벨라가 피식 웃으며 이어 말했다.
“이것으로 네 친구는 완전한 인간이 되었으니까.”
바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품 안에 플루토의 구슬을 집어넣을 뿐이었다.
그러나 고개 들어 벨라를 보는 바토리의 눈빛엔 이전만큼의 적대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뭐야. 기껏 줬더니. 뭐라고 말 좀 해보라고.”
“무엇을 말이더냐. 어차피 플루토는 내가 처리하려 했었느니라.”
“우와. 뭐야. 그게 지금 목숨을 걸고 관조자 하날 때려잡고 온 내게 할 말이야?”
“목숨을 건 정도는 아니었잖아 벨라.”
“꼬마. 너까지 이러기야?”
어처구니없다는 말투와 달리 벨라는 히죽히죽 웃었다.
이어 벨라가 슈시아에게도 무언갈 건넸다.
슈시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서리나무 열매?”
“호오. 역시 맞았군. 남부 대륙에선 서리나무숲에만 존재한다는 이 열매가 놀랍게도 제국에 있는 걸 봤거든. 혹시나 해서 챙겨 뒀는데, 이렇게 쓰일 줄은 나도 몰랐다고.”
서리나무 열매는 결코 시들지 않는다.
그래서 슈시아의 손에 들린 열매는 갓 딴 것처럼 싱그러움이 가득했다.
슈시아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열매의 향을 맡았다.
그리 강하진 않지만, 고향이 떠오르는 그리운 내음.
슈시아의 눈이 벨라를 바라봤다.
“고맙다. 벨라.”
벨라도 만족한 얼굴로 술을 들이켰다.
잠자코 고기를 뜯던 오토가 은근히 벨라에게 물었다.
“내, 내 건 없수?”
“죽고 싶어?”
오토는 바로 꼬리를 내렸다.
벨라가 바토리에게 들으라는 듯 말했다.
“과연 엘프는 고마움을 표할 줄 아는군. 필멸자인 엘프가 저럴진대, 불사자라 불리는 관조자가 오히려 쪼잔하다니. 참 신기한 일이야. 그렇지 않아? 바토리 에르제베트.”
“잊은 모양이로구나. 난 이제 인간이니라.”
“하지만 얼마 전까진 관조자였지.”
“흐응. 난 내가 관조자였던 시절이 잘 기억도 나지 않는구나. 왜냐하면 아틸라와 함께 한 지난 몇 년이 그 몇 배는 행복했으니 말이다.”
“노망이 났군.”
“멋대로 생각하거라. 하지만 어쨌든 플루토를 처리해 귀찮은 일을 줄였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니, 나름의 보답은 하겠다.”
“호오. 어떻게 말이지?”
“앞으로는 그냥 ‘바토리’라 부르려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