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9. 격변의 제국 (2)
이후 카스피는 틈틈이 벨라에게 지도를 받았다.
그동안 아틸라를 따라다니며 레벨업을 통해 성장을 이어 가던 그녀였지만, 그건 사실 제대로 된 훈련은 아니었다.
카스피는 살수로서의 교육을 끝까지 받지 못했다.
아틸라를 만나 두 번의 임무 실패를 겪은 탓에 하싸씬에서 추방됐기 때문이다.
그랬던 카스피가 새로운 스승을 만났다.
그것도 무려 하싸씬의 단주이자, 사상 최강의 살수라 불리는 셰이카 라딤을.
“괘, 괜찮은 거요? 살쾡이 암살자.”
“뭐가.”
“저 여자가 갑자기 파문 살수를 처리하겠다며 공격이라도 하면 어쩌려는 거요!”
“영주 나리 바보야? 그럴 거면 진작 그렇게 했겠지.”
“아, 아무튼 내가 두 눈에 불을 켜고 있소! 저 여자가 살쾡이 암살자에게 해코지라도 하려 하면 내 가만있지 않을 테니!”
“가만있지 않으면 어쩔 건데? 설마 벨라와 싸우기라도 하려고?”
“그, 그건……!”
“내 신경은 쓰지 말고 영주 나리나 잘 해. 정신 바짝 차리라고. 또 아틸라에게 얻어터지지 말고.”
카스피가 벨라에게 훈련받는 것처럼, 오토도 아틸라와 짬짬이 대련을 하고 있었다.
벨라와 훈련하는 카스피를 보며 오토는 자신 역시 더욱 강해져야 한다는 것을 자각했다.
그래서 아틸라에게 부탁을 했고, 마땅히 할 일이 없었던 아틸라가 받아들인 것이다.
“새끼. 몇 번을 알려 줘도 못 알아먹네.”
대자로 널브러진 오토에게 흑철검을 겨누며 아틸라가 말했다.
“시간 끌지 말고 일어나라.”
“크흑……! 아틸라 님, 조금만 살살……!”
슈시아도 그들을 보며 혼자만의 훈련에 매진했다.
얼마 전 벨라에게 속절없이 당한 슈시아는 자신의 근접 전투 능력을 향상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슈시아를 위해 아틸라는 종종 펀치에게 거대화를 시전해, 슈시아와 대련하도록 만들었다.
우어어어!
애초부터 엘프는 짐승과 친화력이 좋다.
그런 상황에 대련이 이어지자 슈시아와 펀치는 급속도로 가까운 사이가 됐다.
“하하하. 펀치!”
남은 건 바토리와 도롱뇽이었다.
바토리는 여전히 불만 가득한 얼굴로 벨라를 봤다.
“……저년을 어서 죽여 없애야 하는데.”
그러나 아틸라와 눈이 마주치면 온화하게 웃는 얼굴로 바뀌었다.
바토리의 품 안에서 그 모습을 올려다보며 도롱뇽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사실 도롱뇽의 머릿속은 무척이나 복잡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신경 쓰이는 건 샤를의 환수가 된 드라코리치와의 관계.
그리고 언제쯤 자신이 완전한 힘을 되찾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아. 힘을 되찾았을 때 정말 기분 최고였는데.’
대악마의 현신이 된 샤를과 아틸라가 맞붙었을 때, 도롱뇽은 일시적으로 본연의 힘을 되찾았었다.
도롱뇽은 틈만 나면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한 번 힘을 맛보고 나니 지금의 상황이 미치도록 답답하구나! 카아앗!’
그렇게 저마다의 이유로 몸과 마음을 혹사하며 북상하던 일행은 카잔 군주령의 이스마라에 도착했다.
“와. 전에 왔을 때와 똑같네. 저것 봐봐 영주 나리! 그때 그 여관도 있어!”
“뭐 시간이 얼마나 지났다고 달라졌겠수.”
“그냥 그렇다고 하면 되지, 꼭 토를 달아.”
카스피의 말대로 이스마라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지난번의 여관이 좋겠구나.”
일행은 바토리의 의견대로 지난번에 머물렀던 여관을 재방문하기로 했다.
그곳에서 일행은 에단과 아벨을 다시 만났고, 자이언트 리자드를 토벌하는 임무를 함께 수행했었다.
여관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아틸라는 바토리가 재방문을 원했던 이유를 알았다.
낯익은 얼굴의 남자가 홀로 앉아 우아하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
여전히 격식을 차린 듯한, 그러나 장난스럽게 보이는 붉은 의복을 입고.
남자의 얼굴이 아틸라를 바라봤고, 과장스럽게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아틸라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플루토.”
“오랜만이군요 검은늑대의 아틸라. 그리고 바토리 에르제베트.”
바토리는 도도한 표정으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플루토는 오토와 카스피에게도 눈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그의 사시안은 오토와 카스피에게 불편함을 넘어 불쾌함마저 느끼게 했다.
플루토는 테이블 하나를 이어 붙여 넓은 자리를 만들었다.
아틸라는 말없이 그곳에 앉았고, 이어 나머지 일행도 각자의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마지막으로 자리에 앉은 플루토가 손가락을 튕기자 기다렸다는 듯 술상이 차려졌다.
“낯선 일행이 둘이나 추가됐군요.”
플루토가 슈시아와 벨라를 번갈아 바라봤다.
그러나 아틸라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플루토는 관조자다.
역용술의 대가인 셰이카는 몰라도, 서리나무의 왕인 슈시아를 알아보지 못할 리는 없다.
“뭔데 넌.”
벌컥벌컥 술병을 들이켠 벨라가 히죽 웃으며 물었다.
정중한 목소리로 플루토가 답했다.
“바토리 에르제베트의 친구입니다.”
“난 너 같은 친구를 둔 적이 없느니라.”
플루토가 난감한 표정을 했다.
“너무 매몰찬 것이 아닙니까 바토리 에르제베트. 당신은 내 파트너인 레비아의 오랜 친구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친구 또한 될 수 있겠지요.”
“넌 벨리알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 벨리알은 나와 아틸라가 우호적으로 보는 대상이 아니지.”
“그러나 벨리알은 당신과 검은늑대의 아틸라를 우호적으로 대하고 있습니다.”
플루토의 말에 바토리가 콧방귀를 뀌었다.
슈시아는 둘의 대화를 가만히 지켜봤다.
그녀는 바토리에게 플루토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아틸라가 말했다.
“넌 이곳에서 우릴 기다렸다. 우리에게 할 말이 있어서겠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겁니까. 아틸라.”
“말을 빙빙 돌리는 건 취향이 아니라서.”
“요툰헤임의 개입이 더욱 강해지고 있습니다.”
아틸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먼 옛날 이 세계의 주인이었던 요툰들.
고대인과 드래곤의 협공에 다른 차원으로 도주했던 그들이 다시금 이 세계로 돌아오려 하고 있다.
물론 아틸라는 그것에 대해 알고 있었고, 실제로 요툰헤임과 중간계를 잇는 통로를 제거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아틸라는 그것에 대해 잊고 있었다.
지금 아틸라의 머릿속은 대악마의 현신이 된 샤를과, 점점 밝혀지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것으로 가득했으니까.
“그래서 카르노피아의 용기사인 아벨 카리누스가 케렌시아로 움직일 수 없었던 겁니다.”
“아벨이 요툰과 전쟁을 치르고 있다는 건가.”
“그 말대로입니다.”
벨라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근데 대체 뭐야 이 광대 같은 녀석은. 쥐새끼처럼 몰래 아틸라의 뒤를 캐고 다니는 거야? 너 뭐 하는 놈인데.”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바토리 에르제베트의 친구라고.”
“너 같은 친구는 둔 적이 없다고 나 또한 말했느니라.”
쓸데없는 이야기로 소란스러워지기 전에 아틸라가 말을 끊었다.
“전할 말은 그것뿐인가. 플루토.”
“그럴 리가요.”
플루토는 여유로운 동작으로 술잔의 술을 마셨다.
“벨리알은 고대하고 있습니다. 아틸라, 당신을 다시 조우할 날을 말이지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나?”
“자세한 것은 모릅니다. 그러나 벨리알은 알고 있습니다. 결코 피할 수 없는 이 세계의 위협. 그 안에서 당신이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는걸.”
플루토는 오르피나와 비슷한 말을 하고 있었다.
- 알테라는 이 세계를 파멸로부터 구할 수 있는 존재. 그것이 알테라이자, 또한 그대입니다.
벨리알(아자젤)은 오르피나와 같은 사도다.
그렇다면 벨리알의 목적은 오르피나의 목적과 동일한 것일지도 모른다.
“벨리알은 황도에 있는 건가.”
아틸라의 물음에 플루토는 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누가 보아도 긍정을 뜻하는 웃음.
“아벨 카리누스는 샤다이 황제에게 당신의 뜻을 전했습니다.”
“나의 뜻을 전했다고? 황제에게?”
“당신은 클라우디우스 제국과의 동맹을 위해 다시 이곳을 찾은 것이 아닙니까.”
생각지 못한 정보였다.
물론 아틸라는 아벨이 높은 확률로 아틸라의 뜻을 받아들일 것을 예상했었다.
그러나 황제에게 직접 내용을 전달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아벨 카리누스는 당신을 만나기 위해 케렌시아로 움직이려 했습니다. 그때 요툰을 멸하라는 황명이 내려왔고, 그래서 아벨은 당신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 대신 샤다이 황제를 직접 만나 내용을 전달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황제의 대답은?”
“그건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벨리알은 황도에서 중요한 요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 벨리알이 당신이 황도에 당도하는 것을 기다리고 있지요. 나쁜 결말은 아닐 것입니다.”
결국 황도에 도착해 봐야 알 수 있다는 거로군.
“샤다이 황제의 입장에서도 당신의 제안은 솔깃한 내용일 테지요. 현재 클라우디우스 제국은 간헐적으로 되풀이되는 적대적 용족의 등장과 요툰헤임의 일로 골치를 앓고 있으니까요. 그런 상황에 수해 각지에서는 이변이 속출하고, 언데드 군단까지 나타났습니다. 게다가 황제는 이제 그 언데드 군단을 조종하는 자가 남부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왕국을 통일하고 제국을 선포한, 샤를 아인하르트라는 것까지 알게 되었지요.”
아틸라는 생각했다.
본래 그는 아벨에게 언데드 군단과 아인하르트 제국을 막기 위해 힘을 합치자는 제안을 했었다.
그런데 그 상황에 요툰헤임이 끼어들었고, 그것은 아틸라가 제국과의 동맹이라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유리한 기회로 다가왔다.
물론 요툰헤임과 중간계의 겹침 현상은 위험한 일이다.
그러나 아틸라에겐 샤를의 위협을 제거하는 것이 먼저였다.
“샤다이 황제로서는 남부와 손을 잡고 요툰과 언데드의 위협을 제거하는 것이 방책일 것입니다. 또한 당신은 모르고 있겠지만, 남부에서 올라오는 언데드 군단은 더욱 강력해졌습니다.”
“시체 골렘과 변종 리치 말인가.”
아틸라가 마주했던 그 언데드들은 강했다.
물론 아틸라의 상대는 아니었지만, 그런 언데드의 숫자가 많아진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설령 소수라 해도, 일반적인 제국의 병력으론 퇴치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것도 제국의 입장에선 골치가 아프겠지요. 하지만 정작 중요한 건 시체 골렘이나 변종 리치 같은 것이 아닙니다.”
“아니라고?”
“버서커 카르타고와 데스나이트.”
아틸라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며 플루토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처음 언데드 군단이 제국을 침공했을 때, 제국에선 여러 실력 있는 기사단과 용병단 외에 암피테르 용기사를 운용했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상당한 수완을 발휘하며 언데드들을 섬멸했지요. 그러는 와중에 몇 마리의 암피테르가 격추되긴 했지만 말입니다.”
아틸라는 불길한 예감이 드는 것을 감각했다.
“암피테르와 용기사들의 시체는 여러 언데드의 손을 거쳐 카르타고에게 옮겨졌습니다. 아니 어쩌면 샤를 아인하르트에게 넘어간 것인지도 모르지요. 아무튼 암피테르와 용기사들은 어둠의 힘으로 부활했습니다. 그렇게 ‘언데드 용기사’로 다시 태어난 그들은 카르타고의 수족이 되어 제국 침공에 앞장서고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