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8. 격변의 제국 (1)
여섯 마리 말이 북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말에 올라탄 이는 아틸라, 바토리, 오토, 카스피, 슈시아, 그리고 벨라였다.
일행 간에는 좀처럼 대화가 그치는 일이 없었다.
주로 대화를 이끄는 이는 벨라였다.
벨라는 무언가 슬픈 과거를 지녔을 것 같지만 겉으로는 한없이 쾌활한, 그런 비운의 미녀 용병다운 말투로 떠들고 있었다.
바토리는 언젠가 반드시 저년을 죽여 버리겠다며 으르렁댔다.
도롱뇽 역시 바토리의 곁에서 시시각각 기회를 노렸고, 슈시아도 살기 가득한 눈으로 벨라를 노려봤다.
카스피만이 그들과는 조금은 다른 시선으로 벨라를 봤다.
동료들과 벨라 사이엔 아틸라가 있었다.
아틸라가 눈썹을 찌푸리며 오토에게 눈짓했다.
아틸라의 눈치를 살피던 오토는 벨라의 말에 적당히 맞장구를 쳤다.
“저, 정말 당신이 시카리오 암살단을 무너뜨렸단 말이우?”
“하하하하! 그렇다니까? 그게 놈들의 본거지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단주라 불리던 놈을 죽였으니 뭐, 맞겠지.”
오토는 벨라가 큰 소리로 말하거나 웃을 때마다 어깨를 움찔했다.
그는 벨라의 정체가 하싸씬의 단주이자 최강의 귀살자인 셰이카 라딤이라는 것을 알았다.
일행이 만날 수 있는 최악의 인물 중 하나와 한시적으로나마 팀을 이루게 된 것이다.
굳이 비슷한 예를 들자면, 오토는 일행에 카르타고가 포함된 것 같은 감각을 느끼고 있었다.
“정말이야? 정말 네가 시카리오를 전멸시켰다고?”
오토의 뒤를 이어 카스피도 물었다.
하싸씬의 단주 셰이카에겐 이런 어투로 말하기 힘들었겠지만, 지금 카스피 앞에 있는 이는 자칭 비운의 미녀 용병 벨라였다.
“응? 뭐야 꼬마. 너까지 의심하는 거야?”
“아, 아니. 의심하는 건 아니고.”
카스피는 시카리오를 상대한 일이 있다.
시카리오의 살수들은 보통내기가 아니었고, 특히 우두머리 살수는 놀랄 만한 실력자였다.
그런데 셰이카는 그런 시카리오의 본거지를 박살 냈다고 말하고 있었다.
‘아무리 벨라가 강하다 해도 혼자서 암살단 하나를 전멸시켰다는 건 믿기 어려워. 게다가 시카리오의 살수들은 어중이떠중이들도 아니었다고.’
벨라를 향한 적대감이 더욱 그 생각을 부추겼다.
하지만 카스피가 간과하는 것이 있었다.
벨라, 아니 셰이카는 혼자가 아니다.
셰이카는 이곳, 클라우디우스 제국에 ‘암부’와 함께 왔다.
물론 암부가 없었다 해도 시카리오를 무너뜨렸다는 결과는 변치 않았을 테지만.
“여기서 쉬고 간다.”
슬슬 해가 저물고 있었기에 일행은 야영을 하기로 했다.
야영 준비를 하면서도 일행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확실히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난 사냥감을 잡아오도록 하지.”
그렇게 말한 벨라가 카스피를 돌아봤다.
“이봐 꼬마.”
“응?”
“같이 가자고.”
“뭐, 뭐?”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벨라는 숲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카스피는 조금은 불안한 눈으로 아틸라를 돌아봤지만, 이내 벨라가 사라진 방향으로 달렸다.
“아, 아틸라 님. 괜찮겠수?”
“뭐가.”
“살쾡이 암살자와 벨라를 단둘이 보내도 되겠느냐, 이 말이우.”
“못 미더우면 따라가든가.”
“이제 와 내 발로 어찌 쫓아간단 말이요!”
후우, 한숨을 뱉으며 오토가 말했다.
“땔감이나 구해 오겠수.”
“나도 함께 가자꾸나 철혈귀검아.”
“나도 가겠다.”
기다렸다는 듯 바토리와 슈시아가 나섰다.
아틸라가 그들을 막았다.
“너흰 여기 있어라. 어이 오토. 펀치와 함께 다녀와.”
고개를 끄덕인 오토가 펀치와 함께 떠났다.
그렇게 자리엔 아틸라, 바토리, 슈시아, 도롱뇽이 남았다.
커다란 나무에 등을 기대앉으며 아틸라가 말했다.
“쉬고 있어라.”
“흐응. 그러지 않아도 난 조금 피곤한 상태란다. 다만 일행이 늘어난 탓에 모닥불도 조금 더 커야 할 터인데, 철혈귀검 혼자 보낸 것이 조금 마음에 걸리는구나.”
“내 생각도 같다. 아틸라.”
아틸라는 눈동자를 굴려 바토리와 슈시아를 봤다.
“펀치도 함께 보냈으니 염려 마라.”
이번엔 슈시아가 말했다.
“동부 전선에서의 전쟁 때문인지 상당히 출출하군. 아무래도 카스피와 벨라가 구해 오는 사냥감만으론 배를 채우기 힘들 것 같다. 어떤가 바토리. 너와 나, 둘이서 따로 사냥을 해보는 것은.”
“그것참 좋은 생각이로구나. 그런 연유로 야만전사야. 네가 좋아하는 토끼를 잔뜩 잡아올 테니 잠시 기다리려무나.”
그렇게 말한 바토리가 도롱뇽을 봤다.
“옳지 도롱뇽아. 너도 함께 가겠느냐.”
바토리는 도롱뇽을 잡아 품 안에 넣었다.
평소라면 바토리의 가슴 사이가 답답하다며 난리를 칠 도롱뇽이었지만, 오늘만은 아주 고분고분하게 그녀의 품에 자리를 잡았다.
“그럼 아틸라. 다녀오지.”
“금세 잡아오겠느니라 야만전사야.”
아틸라가 별다른 말이 없자 두 여인은 서로를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발을 움직이려 할 때였다.
“잠깐.”
아틸라가 두 여인을 불러 세웠다.
“토끼를 잡아오겠다고?”
“그렇다.”
“그렇단다.”
“엘프가 언제부터 육식을 했지?”
슈시아가 조금 당황한 얼굴로 답했다.
“물론 나무 열매도 따올 생각이다.”
“과일이라면 케렌시아에서 가져온 게 넉넉히 남았다.”
“그렇긴 하지. 하지만 이곳에 오는 길에 먹음직스럽게 열린 나무 열매들을 봤다. 분명 아틸라, 너도 마음에 들어 할 거다.”
“난 필요 없으니 앉아 있어.”
“하지만 야만전사야.”
“바토리. 슈시아.”
아틸라의 눈이 두 여인을 똑바로 바라봤다.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마라. 셰이카는 필요한 존재다. 게다가 녀석은 우리에게 적대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다.”
바토리와 슈시아는 뜨끔했다.
아틸라의 말대로 두 여인은 셰이카를 기습할 생각이었다.
애써 속마음을 감추며 바토리가 말했다.
“우린 단지 카스피가 걱정될 뿐이란다. 그래서 멀리서나마 카스피가 안전한지 확인해 볼 요량으로…….”
“됐으니까 앉으라고.”
그 말에 슈시아가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바토리가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쪼르르 아틸라 옆에 앉는 것을 보고는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벌렸다.
심지어 바토리는 슈시아를 향해 이리 오라며 손짓까지 했다.
“다 들켰으니 이리 오려무나.”
* * *
카스피는 벨라의 옆을 따라 달리고 있었다.
벨라는 매우 빠른 속도로 일행이 지나온 길을 되돌아가는 중이었다.
카스피는 굳이 이렇게까지 멀리 움직인다는 것에 불안감을 느꼈다.
“사냥하러 어디까지 가는 거지? 벨라.”
“넌 느끼지 못한 거야?”
“뭐라고?”
“꼬리가 붙었잖아.”
일행 중 아무도 감지하지 못했지만, 벨라는 뒤를 미행하는 기척을 느꼈다.
벨라가 히죽 입가를 올렸다.
“그래. 시카리오의 잔당들이로군.”
벨라는 놀라운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추격자가 마력을 운용하는 자들였다면 바토리와 도롱뇽이 먼저 알아챘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는 시카리오.
벨라나 카스피와 같은 살수였다.
‘추격자라고? 난 느끼지 못했는데?’
카스피도 몸의 감각을 끌어올렸다.
머지않아 카스피도 추격자의 기운을 감지했다.
“난 정면. 넌 오른쪽으로 가는 거야 꼬마.”
“뭐?”
카스피는 의아했다.
우측에서는 딱히 살수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벨라가 오른손을 들어 방향을 가리켰다.
“저 두 나무 사이로 진입하는 거야. 네 사냥감은 그쪽에 있어. 확실히 처리하라고.”
벨라가 정면으로 몸을 뺐다.
카스피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벨라의 지시를 따랐다.
벨라는 뛰어난 살수다.
그녀가 자신을 우측으로 보낸 것엔 이유가 있을 것이다.
화륵.
카스피는 전신을 귀기로 덮었다.
귀안도 발현했다.
시카리오는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다.
하싸씬 이상의 암살단이라 상정하고 대응해야 한다.
차앙! 창!
좌측에서 검과 검이 부닥치는 소음이 들렸다.
벨라는 이미 전투를 시작했다.
카스피는 아직이었다.
조금 전 벨라가 말했던 두 나무 사이를 지났건만 여전히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카스피는 불안했다.
자신이 기척을 감지할 수 없을 정도의 강자가 이곳에 있는 것일까.
‘이럴 줄 알았으면 아틸라도 함께 왔어야 했는데.’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카스피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괜찮아. 지지 않아. 설령 엄청난 강자가 나타난다 해도 벨라가 날 도와줄 거야.’
그렇게 생각하던 카스피는 깜짝 놀랐다.
벨라에게 의지하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미, 미친 거야 카스피? 저 여자는 적이라고! 적!’
그때 저만치 수풀이 흔들렸다.
움직임을 보니 한두 명은 아니었다.
다만 살기가 느껴지지 않았고, 그래서 카스피는 더욱 긴장했다.
‘살기를 감추는 건 살수의 기본.’
카스피는 귀수를 뽑았다.
왼손엔 단검을 쥐었다.
카스피는 처음부터 가진 실력의 전부를 내보일 생각이었다.
아틸라는 카스피가 귀살의 힘을 발현하는 걸 우려했지만, 생존자를 남기지 않으면 그만이다.
휘리리릭.
카스피의 몸이 강한 회전을 머금었다.
정면의 수풀을 향해 표범처럼 달렸다.
수풀 속에서도 시커먼 형체들이 앞다퉈 튀어나왔다.
그 순간 카스피의 눈이 부릅떠졌다.
수풀에서 나온 형체는 인간이 아니었다.
토실토실하게 살이 오른, 여섯 마리의 커다란 검은 토끼였다.
단검을 휘둘러 녀석들을 무력화시키며 카스피가 소리쳤다.
“비, 빌어먹을 여자! 나더러 토끼나 잡으라고?”
* * *
부연 달빛이 새어 들어오는 숲속에 벨라는 홀로 서 있었다.
지면에 널브러진 수십 구의 시체.
그들 모두는 벨라가 휘두른 단 한 번의 칼질에 목숨을 잃었다.
벨라는 서늘한 눈빛으로 시체를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 카스피에게 보이던 것과 완전히 달라진 그 눈빛은 푸르스름한 월광을 받으며 더욱 음산하게 빛났다.
카스피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체 뭐 하자는 거야? 이럴 거면 왜 함께 오자고 한 거냐고.”
벨라는 싱긋 웃으며 뒤를 돌았다.
직전까지의 날카로운 눈동자는 그곳에 없었다.
벨라가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 목적은 사냥감을 찾는 거였잖아. 추격자를 쓰러뜨리는 건 덤일 뿐이지. 네가 목적을 달성했고, 난 덤을 처리했다. 그뿐이야.”
워낙 당당하게 말하니 카스피도 더는 따질 말이 없었다.
카스피는 긴 한숨을 내뱉으며 바닥에 쓰러진 살수들을 봤다.
‘어림잡아 서른 명 정도인가. 이 많은 살수들을 이렇게 순식간에 처리했다고?’
시체의 몸에 드러난 상흔만으로도 카스피는 벨라가 얼마나 뛰어난 살수인지 새삼 자각했다.
내가 저렇게 강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카스피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아틸라에게도 더욱 힘이 되어 줄 수 있을 것이고, 당분간 마법을 자제해야만 하는 바토리를 보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슈시아의 코를 납작하게 해 줄 수도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던 카스피는 문득 벨라의 시선을 느꼈다.
카스피의 눈이 벨라를 바라봤다.
벨라는 이전에도 몇 번인가 본 적이 있었던 편안한 눈으로 카스피를 마주 보고 있었다.
카스피는 그 눈빛에서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저도 모르게 이렇게 말했다.
“날 지도해 줄 수 있겠어? 벨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