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7. 황도를 향해
지배하는 존재.
그 말을 듣자마자 아틸라가 떠올린 건 엘(아몬)이었다.
‘엘이 황도에 있다고?’
가능성은 충분했다.
엘은 먼 옛날부터 아자젤(벨리알)과 함께 움직였다.
바토리가 공주였던 시절, 사르데니야 왕국을 찾은 사도 역시 엘과 아자젤이었다.
- 북쪽을 목적지로 삼으시길. 지금의 난 당신에게 이 정도 말밖에 해 줄 것이 없네요.
그때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제 확실해졌다.
‘아자젤이 말했던 북쪽은 클라우디우스 제국이다.’
물론 아자젤은 지난번 제국을 찾았던 아틸라 일행이 남부로 되돌아가도록 유도했다.
제국을 향하라 해 놓고 다시 남부로 돌려보낸다는 것은 의외라 생각될 수 있지만, 아틸라는 그것에 분명한 이유가 있으리라 여겼다.
남부로 돌아온 아틸라는 오르피나를 만났다.
- 알테라는 이 세계를 파멸로부터 구할 수 있는 존재. 그것이 알테라이자, 또한 그대입니다.
오르피나는 아틸라와 그의 동료들이 이 세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 말했다.
- 그대는 서리나무 엘프를 이끌고 전선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곳에 그대의 운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말대로 아틸라는 전선에서 운명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샤를은 대악마 아몬의 현신이 됐다.
그렇게 언데드 군단의 군주가 된 샤를은 9개 왕국을 통합해 아인하르트 제국을 세웠고, 이제는 북부 클라우디우스 제국을 공격하고 있다.
아틸라의 생각은 이랬다.
‘엘은 아자젤과 플루토를 통해 날 남부 대륙으로 돌려보냈다. 이유는 샤를을 대악마의 현신으로 만들어 수해에 새로운 통로를 생성하기 위해.’
그것이 가능한 일일까 하는 의문은 있다.
그러나 엘이 대단히 강력한 예지의 힘을 지닌 존재라면, 가능성은 충분하다.
실제로 엘은 오르피나를 통해 도롱뇽을 지하마계에서 중간계로 돌려보냈다.
심지어 오르피나는 아득한 세월이 흐른 뒤 파우스트의 흑마술사 할리가 소환진을 열 것이라는 것과, 그 위치까지도 알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엘이 지닌 엄청난 예지력을 짐작할 수 있다.
아틸라는 결정했다.
‘황도로 가야 한다.’
어서 황도로 움직여 오르피나의 마지막 성물을 찾고, 엘을 만나야 한다.
엘을 만나면 모든 의문의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왜 자신을 낳았는지.
왜 지구를 떠났는지.
그리고 왜 자신을 이 세계로 불러들였는지.
“눈 뜨고 잠이라도 자는 건가. 아틸라.”
셰이카의 목소리가 아틸라를 생각에서 끌어냈다.
아틸라는 무표정한 얼굴로 셰이카를 봤다.
“벨리알을 지배하는 존재. 그 존재는 어디에 있는 건가.”
“모른다. 다만 난 그 존재가 벨리알의 기운과 함께 강철바위 드워프들에게 다가오는 기척을 감지했다. 그래서 그곳을 떠났다.”
“처음엔 그 기척이 없었다는 거로군.”
“그랬다면 애초부터 잠입하지도 않았겠지.”
아틸라는 셰이카가 넘겨줬던 종이를 다시금 펼쳐 봤다.
북부 대륙의 세부적인 지리를 모르는 아틸라로서는 종이에 표시된 위치가 정확히 황도의 어디쯤인지 알 수 없었다.
또한 그곳으로 가는 길에 어떤 난관이 있을지도 몰랐다.
“넌 앞으로 어쩔 생각이지? 셰이카.”
“북부에서의 목적은 이뤘다. 남부로 돌아갈 것인지는 조금 고민해 봐야겠군.”
“우릴 하워드가 있는 곳으로 안내할 수 있겠나.”
원래 아틸라는 케렌시아에서 아벨을 만나기로 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며칠 머무는 동안 아벨은 오지 않았다.
레비아에게 서신을 남겨 두고 떠난다면 별일은 없을 것이다.
“뭐? 날 동료로 삼겠다고? 그거 진심이야? 이거 생각지도 못한 제안을 받았는걸? 하하하하하!”
정말로 의외였는지 셰이카는 벨라의 표정과 목소리로 웃었다.
직전까지의 셰이카 라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과연 역용술의 대가라 불릴 만한 극적인 변화.
카스피가 아틸라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아틸라.”
카스피는 우려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속엔 공포심도 포함됐다.
카스피는 아직 셰이카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틸라도 그것을 알았다.
아틸라는 셰이카와 검을 섞었고, 그 찰나에 불과한 시간 동안 셰이카의 진면목을 확인했다.
‘나의 예상을 뛰어넘는 실력자다.’
아틸라의 순수한 감상이었다.
셰이카는 강하다.
아틸라조차 셰이카와 정면으로 맞붙는다면 승리를 확신할 수 없었다.
‘아니. 지금의 상황을 생각한다면, 패배할 확률이 높겠지.’
셰이카는 바토리와 슈시아를 쓰러뜨렸다.
슈시아는 몰라도, 바토리는 규격을 벗어난 강자다.
아무리 약화된 상태라 해도 바토리는 아틸라와 함께하며 수차례 레벨업을 했고, 그래서 처음 인간이 되었을 무렵보다 훨씬 강해져 있었다.
게다가 카스피는 셰이카에게 심상치 않은 말을 했다.
‘바토리에겐 무슨 수작을 벌인 거지?’
‘말해. 넌 어떻게 그런 마술을 부릴 수 있는 것인지.’
카스피의 말로 미루어, 셰이카에겐 바토리를 쓰러뜨릴 수 있었던 특별한 힘이 존재한다.
그건 아틸라가 알지 못하는 힘이다.
그리고 셰이카는 카스피에게 ‘벽’이란 표현을 썼다.
‘귀살자에겐 숨겨진 힘이 있다. 벽을 넘어서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아주 특별한.’
셰이카는 저 ‘벽’이란 것을 넘었을 것이다.
그래서 셰이카는 아틸라가 짐작하던 모습보다 강해졌다.
마치 레벨업을 통해 새로운 스킬을 습득하며 더욱 강해지는, 아틸라 그 자신처럼.
아틸라는 카스피의 레벨이 몇 단계 상승한 것을 확인했다.
‘넌 조금 전 나와 대결하며 벽을 넘었다.’
조금 전 셰이카가 카스피에게 했던 말대로, 카스피가 그 ‘벽’이라는 것을 넘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불안 요소는 있었지만 아틸라는 셰이카를 한시적으로 믿어도 좋겠다는 판단을 했다.
셰이카는 일행을 죽이지 않았다.
아울러 일행에게 적대적이지 않은 셰이카라면, 미지의 적을 조우했을 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다시 묻겠다 셰이카. 우릴 하워드가 있는 곳으로 안내할 수 있겠나.”
“나름 재밌을 거 같긴 하지만, 네 여자친구가 가만히 있겠어?”
셰이카의 시선이 슬쩍 바토리를 바라봤다.
아틸라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카스피는 조금 당황한 얼굴로 얼굴을 붉혔다.
“바토리 에르제베트는 내가 너희와 함께하는 걸 원하지 않을걸? 심지어 내게 기절 당하는 추태까지 보인 뒤라면 말이야. 눈에 쌍심지를 켜고 날 죽이겠다며 덤비겠지. 그렇게 된다면 나도 더는 여유를 부릴 수 없을 거야. 그래. 어쩔 수 없이 실력을 내보일 수밖에 없겠지. 바토리 에르제베트는 상당히 위험한 마법사니까 말이야.”
말과 달리 셰이카는 조금도 위협을 느끼는 얼굴이 아니었다.
여전히 벨라의 얼굴과 말투를 쓰고 있었기에 더욱 그렇게 보였다.
사실 저 얼굴엔 지금의 어투가 더 어울리긴 했다.
“내가 막아 주겠다.”
바토리가 셰이카에게 덤비는 상황은 이쪽도 곤란하다.
승리자가 누구이든 말이다.
“호오. 그럼 서리나무의 왕도?”
“슈시아에게도 잘 말해 두지.”
셰이카가 카스피를 돌아봤다.
“그럼 꼬마. 너는?”
“나, 난 싫어.”
그렇게 말한 카스피가 의기소침한 고양이처럼 아틸라의 눈치를 살폈다.
“하, 하지만 난 아틸라의 뜻을 따를 거야.”
셰이카가 히죽 웃었다.
“그럼 교섭 성립인가? 아틸라.”
“그런 것 같군.”
“조건이 하나 있다.”
“뭐지?”
그렇게 물으며 아틸라는 내심 우려했다.
셰이카 정도의 실력자가 어떤 조건을 내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려와 달리 셰이카가 내건 조건은 간단했다.
“난 지금 벨라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거든. 그러니까 너희도 날 셰이카가 아닌, 벨라로 대해 줬으면 좋겠어.”
“호칭을 벨라라 부르면 된다는 건가?”
“아니. 호칭만이 아니라 정말로 벨라로 대해야 한다는 거야. 쉽게 말하자면 난 하싸씬의 단주도 아니고, 귀살의 일족도 아니야. 난 클라우디우스 제국의 용병 벨라 타나토스지. 그것도 아주 놀라운 실력을 가진, 또한 무언가 슬픈 과거를 지녔을 것 같지만 겉으로는 한없이 쾌활한, 그런 비운의 미녀 용병 말이야.”
“…….”
아틸라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뭐? 비운의 미녀 용병?
저게 무슨 웃기지도 않은 코스프레란 말인가.
“뭐야. 거절하는 거야? 나야 뭐 너희와 함께하지 않아도 상관없는데.”
그 말에 카스피가 반색했다.
하지만 이어진 아틸라의 대답을 듣고는 다시 얼굴을 구겼다.
“조건을 받아들이지. 동료들에게도 그렇게 전해 두겠다.”
“잘 생각했어.”
“대신 이쪽에서도 조건이 있다.”
“응? 넌 조건을 붙일 만한 입장이 아닐 텐데 아틸라.”
“지금의 너라면 어렵지 않은 일일 거다.”
“뭐, 일단 들어나 보자고.”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동료들에게 손대지 마라. 눈감아 주는 건 이번 한 번 만이다.”
아틸라의 얼굴 표정과 목소리는 서늘했다.
셰이카가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참나! 저 꼬마도 그렇고, 대체 다들 왜 이러는 거지? 먼저 공격한 건 내가 아니라 바토리 에르제베트 쪽이었다니까? 난 정당방위였다고!”
아틸라는 무심한 얼굴로 셰이카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면서 심안을 시전했다.
아틸라가 셰이카에게 조건을 건 것은 동료들의 안전을 위함이 주목적이었지만, 심안의 발현을 위해서이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는.
[ 권능, 심안을 활성화할 수 없습니다. ]
[ 심안은 원작자의 세계와 상대의 세계가 강한 교감을 일으켰을 경우에만 발동되는 제한적 권능입니다. ]
빌어먹을, 이번에도 실패였다.
아틸라가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셰이카가 표정을 바꿔 키득키득 웃었다.
“아무튼 좋아. 상황을 보면 알겠지만, 난 너희와 적대적인 관계를 갖고 싶은 생각이 없으니까.”
셰이카가 윗입술을 핥았다.
“적어도 꼬마가 일정 수준 이상 강해지기 전엔 말이야.”
“카스피가 필요한 만큼 강해진다면 우릴 공격하겠다는 뜻인가?”
“글쎄. 어떨까.”
“그렇게 한다면 내 쪽에서도 최선을 다해 상대해 주지.”
“호오. 그런 덩치와 얼굴로 말하니 겁나는걸? 마저 승부를 내고 싶어질 정도야. 아아, 물론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그럴 일은 없을 테니 염려할 것 없고. 하하하하!”
두 사람의 대화는 그쯤에서 끝났다.
시체 골렘의 검은 피를 온몸에 뒤집어쓴 오토가 시체 같은 얼굴로 달려오며 외쳤기 때문이다.
“으아아 아틸라 님! 어떻게 나만 쏙 빼놓고 갈 수가 있소! 나 정말 죽을 뻔했단 말이오오오오!”
* * *
그렇게 셰이카, 아니 벨라는 일행의 한시적 동료가 됐다.
물론 반발은 있었다.
기절에서 깨어난 바토리, 슈시아, 도롱뇽, 펀치 모두가 아틸라의 말에 기겁했다.
특히 바토리는 벨라를 당장 죽여 버리겠다며 길길이 날뛰었다.
슈시아도 바토리 못지않게 싫은 기색이었지만 바토리가 워낙 난리를 치는 바람에 애써 인내하는 듯했다.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벨라는 일행에 합류했고, 전선의 언데드를 더욱 안쪽으로 밀어 넣는 것에 성공한 일행은 케렌시아로 돌아갔다.
여전히 아벨의 소식은 없었다.
그래서 레비아에게 서신을 남겨 둔 일행은 곧장 황도를 향해 말을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