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3. 케렌시아의 용병 (6)
에레트리아의 군주는 깊은 상심에 빠져 있었다.
먼 옛날, 에레트리아는 왕국이었다.
그러나 제국이 일으킨 정복 전쟁에 패하며 제국에 편입됐다.
‘위대하고 존엄하신 클라우디우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클라우디우스 황제 폐하 만세!’
이후 에레트리아는 제국의 앞선 기술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였다.
본래 에레트리아는 비옥한 대지를 지닌 나라였고, 금속 자원도 풍부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며 에레트리아 군주령은 정복 전쟁 이전보다 더욱 살기 좋은 곳으로 변모했다.
‘제국의 여러 지역 중에서도 백성들이 가장 행복한 곳은 단연 에레트리아 군주령이지.’
‘암암! 그곳에선 적어도 굶어죽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고 하니까!’
‘그뿐인 줄 아나? 군사력 또한 보통이 아니라 하더군!’
에레트리아를 방문했던 모험가나 음유시인들은 자신들만의 방법으로 에레트리아를 칭송했다.
그런 연유로 에레트리아의 군주는 매년 상당량의 세금을 징수당한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남부러울 것 없이 안락한 삶을 살았다.
황도와의 물리적 거리가 멀다는 것도 군주에겐 큰 이점으로 작용했다.
그러던 것이 한순간에 변했다.
‘나, 남쪽 수해에서 괴생명체가 나타났습니다!’
‘몬스터는 아닙니다!’
‘죽여도 죽지 않는 괴물이라 합니다!’
수개월 전, 남쪽 수해를 뚫고 언데드들이 난입한 것이다.
언데드는 강했다.
무력도 무력이었지만, 언데드가 가장 두려운 점은 역시 불사의 육체를 지녔다는 것이었다.
에레트리아의 군주는 영주들에게 소집령을 내렸다.
직접 군을 이끌고 나타난 영주도 있었고, 소집에 응하지 않은 채 대가만을 지불한 영주도 있었다.
어느 영지에선 영주가 직접 참여하는 대신 손수 용병단을 고용해 기사단과 함께 보내기도 했다.
케렌시아의 영주 레비아가 그랬다.
그녀가 보내온 병력, 특히 ‘라이칸 용병단’은 지난 전쟁에서 큰 전공을 세웠다.
‘케렌시아 기사단과 라이칸 용병단이 남쪽 전선 방어에 성공했습니다!’
‘방어를 넘어 반격을 시도해 언데드들을 몰아냈습니다!’
‘라이칸 용병단이 고지를 탈환했다는 소식입니다!’
그들 덕분에 전장의 일부는 한동안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라이칸 용병단은 심신의 충전과 병력 보급을 위해 다시 케렌시아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들이 전선을 이탈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언데드들이 남쪽 전선에 등장했다.
놈들은 이전의 언데드보다 더욱 강했다.
‘케렌시아에선 아직 소식이 없느냐!’
군주는 다급해졌다.
물론 제국에서 여러 기사단과 용기사들을 보내왔지만, 그들만으론 부족했다.
실제로 제국에선 드래곤 마스터나 황궁 기사단 같은 최정예 무력 집단은 지원해 주지 않았다.
전선이 밀리기 시작했다.
병사들의 사기도 떨어졌다.
그들은 어제까지 어깨를 맞대며 싸우던 동료들이 언데드가 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고, 또 그들의 몸에 창검을 꽂아야 했다.
‘크, 크흑……!’
‘난 더 이상 못 하겠어……!’
그러던 중이었다.
마침내 케렌시아에서 라이칸 용병단이 도착했다는 소식이 군주의 귀에 들려왔다.
* * *
“라이칸 용병단! 돌겨어어억!”
월터가 큰 소리로 외쳤다.
지난 원정에서 나름의 재미를 본 용병들이 그에 화답하며 달렸다.
“훠이훠이! 가자고!”
“이번에도 놈들을 몰아내면 군주께서 추가 포상을 내려 주시겠지?”
“아이고! 저 치매 걸린 단장이 동전 주머니나 또 잃어버리지 않으면 다행이지!”
“그건 그래! 으하하하!”
“그래도 케렌시아의 영주께서 모두 메꿔 주시지 않았나!”
“하긴. 그러지 않았다면 단장 모가지가 저렇게 붙어 있지도 못했을걸? 크하하하하!”
라이칸 용병단의 기세는 높았다.
다른 무엇보다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저것 봐! 벨라가 앞장서기 시작했다!”
“우와아아아아!”
벨라가 언데드 사이로 뛰어들었다.
그와 동시에 언데드 머리통 세 개가 허공으로 솟았다.
화르르륵!
잘린 머리의 단면은 화염에 휩싸여 있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벨라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언데드들이 죽어 나갔다.
환호하는 용병들을 보며 카스피가 입술을 비죽댔다.
슈시아도 전에 없는 투지를 드러내며 등 뒤의 활을 꺼냈다.
“저런 경박한 여자에게 밀리지 말고 우리도 갑시다 아틸라 님!”
오토의 외침에 아틸라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토리는 후방에 빼두었다.
바토리의 호위는 펀치와 도롱뇽에게 맡겼다.
왼팔이 상당히 치유됐다고는 하지만, 대국경의 관문을 지날 무렵으로 돌아간 것에 불과하다.
‘바토리의 마법은 최대한 아껴 두는 편이 좋다.’
며칠 전 벨라와의 마찰 때 바토리가 마법을 발현하긴 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아틸라의 한 마디에 그녀는 마법을 갈무리했다.
‘언데드는 우리만으로도 충분하다.’
아틸라는 언데드들을 살폈다.
대부분은 남부 대륙의, 혹은 제국의 병사들이 언데드화한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곳곳에 심상치 않은 놈들이 있었다.
‘저놈들이 지휘관이로군.’
월터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저건 지난 원정에선 보이지 않았던 놈들이다.
아틸라의 입가에 송곳니가 드러났다.
콰앙! 검과 방패를 맞부딪쳤다.
그때였다.
퍼퍼퍼퍼퍼퍼퍼펑!
하늘 위에서 떨어진 불덩이들이 언데드들을 불태웠다.
뒤이어 거대한 불의 창이 날아와 지휘관급 언데드를 줄줄이 꿰뚫었고, 그다음엔 온 하늘을 메우는 불화살의 소나기가 나머지 언데드들의 머리와 가슴에 꽂혔다.
언데드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잿더미가 됐다.
“시, 시, 시시시벌! 저게 뭐야!”
“후퇴해! 모두 후퇴하라고!”
멋모르고 돌격하던 라이칸 용병단이 기겁을 하며 후퇴했다.
그 안엔 혈혈단신으로 언데드의 모가지를 따던 벨라도 있었다.
이곳저곳 검댕이 묻은 얼굴의 벨라가 불에 붙은 옷자락을 잘라 내며 튀어나왔다.
그러고는 이 사태를 일으킨 주범을 찾아 눈동자를 굴렸다.
아틸라는 이미 범인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이어 오토, 카스피, 슈시아도 얼빠진 얼굴로 이 사태를 일으킨 범인을 바라봤다.
바토리였다.
* * *
도롱뇽과 펀치는 폭주한 바토리를 보며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미, 미친 할망구! 그만둬! 마법 쓰는 거 그만두라니까!”
불행 중 다행이라면 그녀가 아직 왼팔의 마력은 사용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보통의 마력이라도 지금의 바토리에겐 나름의 데미지가 가해진다는 걸 도롱뇽은 알고 있었다.
“야 곰탱이! 빨리 커다래져서 바토리 할망구 좀 막아 봐! 안 그러면 우리 둘 다 야만 미물한테 맞아죽는다!”
끼아옹!
“비, 빌어먹을 안 되겠다! 넘어뜨려! 발모가지를 콱 부러뜨려 버리라고!”
도롱뇽과 펀치는 바토리를 말리려 애썼다.
그러나 둘에게 바토리는 동료였고, 당연히 그녀의 몸에 해를 입히면서까지 제지하지는 못했다.
불안해진 도롱뇽은 안력을 높여 아틸라를 찾았다.
이어 아틸라의 서늘한 표정을 발견하자마자 기겁하며 외쳤다.
“히이이익! 난 이제 죽었다!”
아틸라가 무어라 소리치는 게 보였다.
그와 동시에 카스피와 슈시아가 이쪽으로 달려왔다.
바토리를 막으라고 아틸라가 보낸 것이 분명했다.
“빠, 빨리 와라 살쾡이 미물! 엘프 미무우우우울!”
언데드 무리를 불바다로 만든 바토리였지만 그녀의 눈은 다른 것을 찾고 있었다.
새빨간 불의 파도 속에서 꿈틀대는 것이 보였다.
이 정도의 마법 공격을 맞고도 살아남은 언데드가 있었다.
바토리는 조금 놀랐지만, 이내 그것을 시야에서 지웠다.
그녀가 찾는 타깃은 언데드가 아니었다.
쉬지 않고 움직이던 바토리의 눈이 이내 어느 한 곳에 고정됐다.
바토리의 입술이 귀 끝까지 찢어졌다.
그래. 거기 있었구나.
파아아아앙!
바토리의 손에서 불의 창이 쏘아졌다.
조금 전 언데드 지휘관들을 꼬치로 꿰어 버린 강력한 마법.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타깃이 손에 쥔 검날이 번득이는가 싶더니, 바토리가 발사한 불의 창을 튕겨 버린 것이다.
바토리의 눈이 부릅떠졌다.
‘저건……!’
슈시아가 바토리의 시야에 드러났다.
이어 바토리의 등 뒤로 카스피가 나타났다.
카스피와 슈시아는 무력을 행사해서라도 바토리를 막으라는 아틸라의 명령을 받았다.
카스피는 그 임무의 적임자가 자신이라는 것을 알았다.
바토리는 마법사다.
그리고 마법사 잡는 것은 살수.
게다가 바토리의 시야는 현재 슈시아로 가득 찬 상태다.
‘바토리. 미안.’
카스피가 바토리의 덜미로 단검을 뻗었다.
물론 날이 아닌 손잡이 부분이었다.
그러나 카스피의 단검은 바토리에게 닿지 못했다.
바토리의 등 뒤로 펼쳐진 무형의 장막이 카스피의 공격을 튕겨 냈다.
‘크읏……!’
카스피는 포기하지 않고 바토리의 측면으로 난입했다.
슈시아가 반대편을 맡았다.
압도적인 활 솜씨에 묻혀 있었지만, 슈시아는 웬만한 살수 못지않은 민첩성과 무기 공격력을 가지고 있었다.
부웅.
슈시아가 몽둥이처럼 활을 휘둘렀다.
카스피도 재차 단검을 뻗었다.
그러나 바토리의 눈은 두 동료를 보고 있지 않았다.
자신이 발현한 불의 창을 파쇄한 뒤, 무서운 속도로 달려드는 벨라를 보고 있었다.
바토리의 손에서 다시금 공격 마법이 발현됐다.
그것을 벨라가 회피했다.
가히 눈으로 보고도 믿어지지 않는 몸놀림이었다.
그제서야 카스피와 슈시아도 벨라를 발견했다.
둘은 바토리를 향하던 공격을 멈추고 벨라를 막아섰다.
바토리는 다시 한번 공격 마법을 발현하려 했다.
그런데 되지 않았다.
자신을 향해 왼팔을 뻗은 벨라가 보였다.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바토리는 벨라가 무언가의 힘을 발휘한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저 아이는 대체……!’
벨라에게서 심상치 않은 살기를 발견한 슈시아가 마력 화살을 쐈다.
벨라의 검이 번득였고, 다섯 발의 마력 화살이 공중에 분해됐다.
슈시아는 보고 있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퍼억!
슈시아의 복부에 벨라의 검집이 꽂혔다.
급소를 가격 당한 슈시아의 몸이 지푸라기처럼 허물어졌다.
본래대로라면 슈시아가 이렇게 쉽게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슈시아는 바토리를 타격하기 위해 평소와 다른 방식으로 활을 쥐고 있었고, 또 누구보다 강력한 마법사인 그녀를 기절시키기 위해 온 신경을 한쪽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런 연유로 벨라에게 쏘아진 마력 화살 또한 일곱 발이 아닌 다섯 발이었다.
“슈시아!”
카스피가 벨라를 향해 단검을 뻗었다.
벨라는 팽이처럼 몸을 회전시키며 카스피의 뒤를 잡았다.
“아직 멀었네. 꼬마.”
벨라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카스피는 이를 악물며 후방으로 단검을 뻗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베었을 뿐이다.
“난 너희를 죽일 생각이 없는데, 넌 그렇지 않은 것 같네?”
카스피는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쳐다봤다.
벨라에게 덜미를 타격 당한 바토리가 바닥으로 쓰러지고 있었다.
도롱뇽과 펀치는 이미 기절한 상태다.
“후……. 그러게 왜 마법은 난사해가지고.”
혼절한 바토리를 보며 벨라가 내뱉었다.
“진짜 위험했잖아. 이번엔.”
벨라가 고개 돌려 카스피를 봤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흥미의 미소를 그렸다.
“자. 이렇게 됐는데 꼬마, 넌 어쩔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