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8. 케렌시아의 용병 (1)
카스피가 슈시아를 처음 만난 건 메피스토펠레스의 공간 환술이 구 아스투리아 왕국을 뒤덮었을 때였다.
[ 서리나무숲을 찾아 그곳의 발키리들을 이끌고, 파우스트의 관조자 ‘루이제’의 구울 군단을 물리치십시오. ]
아틸라는 이 임무를 달성하기 위해 슈시아를 포함한 발키리 부대를 이끌었고.
보상으로 카스피와 크누트를 같은 세계선으로 소환하는 것에 성공했다.
‘아틸라아아아으앙!’
그렇게 메피스토펠레스의 환술 세계에 갇혀 있던 카스피는 아틸라와 같은 세계선으로 돌아와 슈시아를 만났다.
바토리와는 다른, 엘프만의 아름답고 신비로운 외모를 지닌 슈시아.
카스피는 슈시아를 견제했다.
‘왜, 왜 저렇게 예쁜 거야! 게다가 아틸라와도 제법 가까운 사이로 보이고…….”
다행히도 슈시아와 발키리 부대는 이후의 전투에 참여하지 못했다.
그러나 당시 아틸라가 슈시아에게 했던 말은 카스피의 뇌리에 오랜 시간 남아 있었다.
‘미안하군 슈시아. 하지만 널 데려가지 못하는 건 누구도 아닌 내가 제일 아쉬운 일이라고.’
이후, 한동안 카스피는 슈시아를 만날 일이 없었다.
카스피가 슈시아와 재회한 건 샤를의 오른팔을 치유하기 위한 여정에서였다.
첫 만남으로부터 제법 많은 시간이 지났기에, 카스피는 슈시아를 견제하던 마음을 내려놓고 편안히 아는 척을 하려고 했다.
여기서 문제가 일어났다.
‘말로만 듣던 귀살의 일족이라니.’
슈시아는 카스피를 기억하지 못했다.
‘뭐야. 날 기억조차 못 한다고?’
카스피는 자존심이 상했다.
그러나 이후 슈시아와 함께 여러 일을 겪고, 칼날 산맥의 드레이크를 쓰러뜨리며 카스피는 슈시아에게 나름의 동료애를 갖게 되었다.
애초부터 카스피는 살수와는 어울리지 않는, 바보처럼 온순한 성격을 지닌 인물이었다.
같은 바보인 오토와 죽이 잘 맞는 것엔 그런 이유도 있었다.
그리고 얼마 전 카르타고의 언데드 군단을 상대하며 슈시아는 다시 동료가 됐다.
‘반말이 편하다면 다시 반말로 돌아가겠다. 울보 도롱뇽.’
슈시아는 간혹 농담 섞인 말을 내뱉곤 했지만, 대체로 매사에 진지한 모습을 보였다.
언젠가 바토리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슈시아가 처음부터 저런 성격은 아니었다고 한다.
어찌 됐든 지금의 슈시아는 늘 장난기 넘치는 카스피와 그리 잘 맞는 성격은 아니었다.
게다가 간혹 오토를 얕잡아보는 듯한 말도 카스피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토는 일행 중 최약체다. 어떤 실수를 범할지 알 수 없지.’
사실 그것엔 명백한 오류가 있었다.
평소 오토를 가장 괴롭히는 대상은 다름 아닌 아틸라였고, 바토리와 카스피마저 오토를 깔보듯 장난치는 것을 즐겼다.
따지고 보면 슈시아는 말이 너무 직설적일 뿐, 오토에게 가장 정중한 모습을 보이는 동료였다.
그렇지만 인간의 마음은 객관적이지 않고, 팔은 언제나 안으로 굽는 법이다.
카스피는 슈시아를 동료라 여기면서도, 한편으론 불편함을 갖고 있었다.
그것이 이번에 폭발했다.
‘오토가 남부 대륙의 하나뿐인 용기사라는 말은 다소 과장된 것 같군.’
지구에서의 아틸라는 동료 중 유일하게(펀치를 제외한다면) 오토의 존재를 몰랐다.
그 말에 오토가 크게 실망했다는 것을 카스피는 알고 있었다.
이전에 아틸라가 처음으로 지구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을 때, 오토는 아틸라와 함께 지구에 가겠다는 의지까지 보였을 정도로 아틸라에게 깊은 동료애를 드러냈었다.
‘그, 그럼 나도 가겠소! 그 지구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는 모르나 내, 내 검술이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거요!’
그래서 어떻게든 오토에게 기운을 주려 한 말이었는데.
슈시아가 눈치도 없이 초를 친 것이다.
“야! 엘프!”
카스피는 화가 났다.
저도 모르게 귀안을 발동하고, 전신을 귀기로 덮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눈치 없이 내뱉은 말이 아니야. 슈시아는 제법 눈치가 빠르다고. 적어도 나나 영주 나리보다는 훨씬 더 말이야.’
카스피는 바보였지만, 그래도 사람 보는 눈은 있었다.
슈시아가 기다렸다는 듯 직관의 눈을 뜨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한 번쯤은 상대해 보고 싶었지. 말로만 듣던 귀살의 일족을 말이야.”
“후회할 텐데. 발키리.”
슈시아의 시위에 마력 화살이 걸렸다.
스컹! 카스피도 귀수를 뽑았다.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다.
새로운 발키리의 시조이자 현 엘프 세계관 최강자인 슈시아.
이 세계에 둘밖에 남지 않은 귀살의 일족이자 초특급 살수의 경지를 눈앞에 둔 카스피.
“흐응. 재밌는 여흥거리가 되겠구나.”
언제 실망했었냐는 듯 바토리가 흥미롭게 눈을 빛냈다.
오토도 낯빛을 바꾸며 카스피와 슈시아를 돌아봤다.
“뭐, 뭐요 갑자기.”
다섯 마리 군마가 평원에 멈춰 섰고, 한줄기 바람이 그 사이를 지나갔다.
아틸라가 말했다.
“그만둬라 카스피. 슈시아.”
카스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나 슈시아는 흔들림 없는 눈으로 카스피를 노려봤다.
슈시아의 화살은 아직 카스피를 겨누고 있지 않다.
그러나 어느 쪽을 향해 쏘아지든, 저 마력 화살이 타깃에 적중할 것이라는 걸 카스피는 알고 있었다.
“그렇게 싸우고 싶다면 내가 직접 상대해 주지.”
아틸라가 흑철검을 손에 쥐었다.
화들짝 놀란 오토가 강철검과 강철방패를 뽑으며 카스피를 보호했다.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아틸라가 말했다.
“뭐야 오토. 너도 나와 싸우겠다고?”
“아니, 그, 그, 그게 아니고요 아틸라 님.”
오토가 진땀을 흘리며 변명했다.
아틸라가 이렇게까지 나오자 카스피와 슈시아도 별 수 없었다.
카스피가 귀수를 해제했다.
슈시아의 손에서도 마력 화살이 사라졌다.
“아쉽게 됐군 카스피. 기대하고 있었는데.”
“내가 하고 싶은 말인걸? 엘프.”
자신을 슈시아라는 이름이 아닌 엘프라 부르는 카스피를 보며, 슈시아가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반면 카스피는 미소 띤 얼굴이었다.
그것엔 이유가 있었다.
‘아틸라가 내 이름을 먼저 불러줬어.’
조금 전 아틸라는 둘의 싸움을 말리며 카스피의 이름을 먼저 불렀다.
‘그만둬라 카스피. 슈시아.’
카스피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아틸라는 슈시아보다는 나와 더 가까운 거야. 그래서 내 이름을 먼저 부른 거야.’
카스피는 얼떨떨한 표정의 오토를 보며 히죽 웃었다.
“뭐야 영주 나리. 설마 그 실력으로 아틸라와 붙어 보겠다고?”
“아아니 그럴 리가 있수? 난 그냥 혹시나 해서…….”
카스피의 눈이 바토리를 봤다.
바토리는 카스피를 마주 보며 편안히 미소하고 있었다.
‘영주 나리와 바토리도 내 편이야.’
근거는 부족했지만 카스피는 그렇게 믿었다.
그러자 갑자기 슈시아에게 미안한 감정이 일기 시작했다.
‘음. 그러고 보니 그럼 슈시아는 우리 일행 안에서 조금 외롭지 않을까.’
직전까지 살기를 드러내던 것도 잊은 채 다른 생각에 빠져드는 카스피였다.
* * *
일행은 에레트리아 군주령에 도착했다.
레비아가 영주로 있는 대도시 케렌시아는 전쟁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은 모습이었다.
“이렇게 다시 보게 되는구나 레비아.”
“이번엔 새로운 일행이 추가됐네? 바토리.”
슈시아와 레비아가 인사를 주고받았다.
엘프 중에서도 몇몇 특별한 존재는 고대어를 알고 있었고, 그래서 슈시아는 레비아와 제국어로 대화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일행은 레비아의 성에서 며칠 머무르기로 했다.
바토리의 마력 역류를 눈치챈 레비아가 치유에 도움을 주기로 했기 때문이다.
“근데 아틸라. 저 여자 믿을 수 있는 거야?”
“그러게나 말이오! 바토리 아가씨에게 뭔가 수작이라도 부리면……!”
카스피와 오토가 우려를 표했다.
하지만 아틸라는 레비아가 바토리에게 허튼 행동을 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레비아는 바토리와 친분이 두텁다.
그러나 아틸라가 안심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심안 덕분이었다.
“쓸데없는 걱정 말고 이참에 푹 쉬기나 해라. 머지않아 전선으로 떠나야 하니까.”
아틸라는 홀로 성 밖을 나섰다.
며칠 편안한 곳에서 쉬었더니 좀이 쑤셨다.
얼마 전 레비아가 고용한 ‘라이칸 용병단’의 단장을 만나야 할 일도 있었다.
일행은 바토리의 치유가 마무리되는 대로 라이칸 용병단에 소속돼 전선에 투입될 예정이었다.
“아틸라. 나도 같이 가.”
그런 아틸라를 카스피가 조르르 따라왔다.
바토리는 레비아와 있는 일이 많았고, 오토는 성의 술과 음식에 푹 빠져 있었기에 카스피는 내심 무료함을 느끼고 있었다.
끼아옹! 아틸라 대신 펀치가 카스피를 반겼다.
말없이 걷던 아틸라가 문득 말했다.
“카스피.”
“응? 아틸라.”
“슈시아와 너무 투닥대지 말도록 해.”
“……지난번에 딱 한 번뿐이었는걸.”
아틸라는 대답 없이 피식 웃었다.
“근데 아틸라.”
“왜.”
“아틸라는 21살이지?”
“뭐, 그렇지.”
“그리고 난 25살이야.”
아틸라는 물끄러미 카스피의 얼굴을 봤다.
얘는 또 왜 갑자기 이런 얘기를 하는 거지.
“근데 말이야. 아틸라는 원래 지구의 김도현이었잖아. 그럼 김도현이었을 땐 몇 살이었어?”
“그게 왜 궁금한데.”
“그냥. 대답하기 뭣하면 이것만 알려 줘. 김도현이었을 때의 아틸라는 지금의 아틸라보다 나이가 많았어?”
“그랬지.”
카스피의 얼굴이 밝아졌다.
“정말? 정말이야 아틸라?”
“그래.”
“헤헤헤헤.”
“왜 그렇게 웃는데.”
“그럼 말이야. 김도현이었을 때의 아틸라가 22살이었다고만 가정해도, 여기서 5년을 보냈으니 27살이 되는 거잖아?”
“뭐, 그런 셈이지.”
“그럼 나보다 연상인 거네? 아틸라는.”
음? 그게 그렇게 되나?
“그럼 말이야. 내가 오빠라고 불러 줄까?”
“뭐?”
아틸라는 어이가 없어 그렇게 되물었다.
그러고는 저도 모르게 주위를 살핀 뒤, 바토리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곤 안심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빌어먹을. 내가 왜 이런 걸로 안심하고 있는 거지.
“아하하하! 농담이야 농담!”
그렇게 말한 카스피가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러고는 뒤돌아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때마침 저무는 석양이 카스피의 활기찬 얼굴과 늘씬한 몸을 붉게 비췄고, 아틸라는 잠시 멍하니 그녀의 모습을 봤다.
“뭐야 아틸라. 방금 엉큼한 영주 나리 같은 표정이었다고.”
뭐가 그리 좋은지 카스피는 실실 웃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다시 발을 움직였고, 목적지에 도착했다.
“저 여관이야 아틸라?”
“그래.”
두 사람은 여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은 난장판이었다.
수많은 용병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중엔 아틸라가 만나기로 했던 용병단장도 있었다.
“크윽……! 큭……!”
“크허억…….”
용병들이 부들부들 떨며 몸을 일으켰다.
사망한 용병은 없었다.
코피를 흘리는 몇몇 이들을 제외하면 딱히 출혈이 있는 자도 보이지 않았다.
누가 용병들을 저 지경으로 만들었는지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동그란 식당 테이블에 걸터앉은 호리호리한 체격의 여자가 벌컥벌컥 술을 마시고 있었으니까.
복장으로 보아 그녀 역시 용병인 듯 보였다.
여자가 말했다.
“뭐야. 술 좀 마시려 했더니만, 이게 다가 아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