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7. 귀살자와 발키리
남부 대륙과 북부 제국을 가로막은 수해의 강.
그 사이엔 마치 다리처럼 수해를 가로지르는 긴 통로가 있다.
그 통로가 무슨 연유로 생겨난 것인지 아틸라는 모른다.
다만 아틸라, 아니 패영전의 원작자 김도현에겐 남부 대륙을 통일한 샤를이 제국을 공격하기 위한 경로가 필요했고.
그래서 탈리 왕국 북쪽에 북부 제국과 이어지는 긴 통로가 있다는 설정을 만들었다.
아틸라는 이번에 그 통로를 경험했다.
통로는 너무도 인위적이었다.
‘마치 고속도로를 뚫어 놓은 것처럼.’
탈리 왕국의 ‘대국경의 관문’을 지나 북부 제국의 ‘관문 요새’로 오며, 아틸라는 이 통로가 결코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는 확신을 했다.
통로의 좌우 경계가 지나치게 반듯했다.
그래서 아틸라는 바토리에게 물었다.
“엘에게서 남부와 북부를 잇는 수해의 통로가 생겨난 원인에 대해 들은 적이 있나?”
바토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다. 그것에 대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던 것 같구나.”
“그렇군.”
아틸라의 얼굴에 약간의 실망이 담겼다.
그 모습을 보며 바토리는 먼 옛날 엘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수해는 왜 있는 거야?’
‘수해는 원래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았어. 그랬던 것이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났고, 확장을 시작했지.’
‘왜 그랬던 거야?’
‘이 세계는, 인간을 반드시 박멸해야만 하는 독소(毒素)로 여겼거든. 그래서 수해라는 이름의 항체(抗體)를 만들어 낸 거야.’
‘독소? 항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엘.’
‘바토리는 걱정할 거 없어. 아까도 말했듯 수해는 외부로의 확장을 멈췄으니까. 물론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내부는 더욱 무시무시하게 변하고 있지만.’
‘그러니까 수해에 들어가지 않으면 상관없다는 말이지?’
‘바토리는 수해에 들어가게 될 거야.’
‘내가? 왜? 난 들어가고 싶지 않은데…….’
‘지금 당장은 아니야. 먼 훗날. 아주아주 먼 훗날의 일이야. 그리고 바토리는 세계의 비밀을 마주하게 될 거야.’
‘먼 훗날이면 얼마나 먼 훗날인데?’
‘사르데니야 왕국 위에 또 다른 왕국이 생겨나고, 그것이 제국이 되고, 또 그것이 완전히 다른 것으로 바뀔 때쯤.’
거기서 바토리의 사고가 멈췄다.
‘……완전히 다른 것?’
엘은 지금의 북부 제국이 ‘완전히 다른 것’으로 바뀔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때의 바토리가 세계의 비밀을 마주할 것이라고 했다.
“야만전사야.”
바토리는 그것에 대해 아틸라에게 말했다.
물론 이전에도 일행은 바토리에게 엘과의 대화 내용을 들었었다.
그러나 샤를이 대악마의 현신이 되고, 수해에서 여러 이상 현상이 발생하고 있는 지금은 그 내용이 새롭게 들렸다.
“엘이 말이 사실이라면, 앞으로 북부 제국에서 어떤 큰 변혁이 일어난다는 건가.”
“하지만 아틸라 님. 제국에선 이미 변혁이 일어나고 있지 않수. 용계에서 넘어온 용족들. 그에 따라 등장한 용기사들. 그리고 그 요툰헤임과의 겹침 현상도 있고 말이우.”
“흐응 철혈귀검아. 요즘 머리가 조금 좋아진 것 같구나.”
“몇 번을 말하지만 난 제법 머리가 좋소!”
“그럼 아틸라. 엘이 말한 ‘완전히 다른 것’이라는 건, 대격변이 완료된 뒤의 대륙을 뜻하는 게 아닐까?”
카스피가 물었지만 명확한 해답을 아는 이는 없었다.
슈시아가 입을 열었다.
“의문점이 하나 생기는군. 그 엘이라는 사도는 어떻게 이렇게나 먼 미래에 발생할 일을 미리 알 수 있었던 거지?”
아틸라의 눈치를 보며 오토가 말했다.
“뭐, 그건 엘이 사도 중에서도 특별히 강력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겠수?”
“영주 나리 말이 맞아. 엘은 그…… 대악마 아몬이기도 하니까.”
“그렇다 해도 쉬이 납득하기 어렵군. 대개 신들이 어느 정도의 예지력을 지녔다고는 하지만, 그 엘이라는 사도는 너무 특별한 것 같거든.”
슈시아는 이번 북부 제국으로의 여정에 함께하기로 하며, 일행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 이야기 속엔 바토리와 엘의 대화 내용도 있었다.
그때부터 슈시아는 엘이라는 사도에 대해 궁금증을 가졌다.
아틸라가 그랬었던 것처럼.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한단다. 슈시아.”
바토리가 아틸라를 바라봤다.
아틸라는 엘의 핏줄이다.
그리고 아틸라는.
“야만전사야.”
아틸라는 조금 억울하다는 생각을 했다.
언제부턴가 자신은 바토리에게 이름을 불러 주고 있는데, 그렇게나 이름을 불러 주길 원했던 바토리는 여전히 자신을 야만전사라 부르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왠지 자존심이 상했다.
또 이번 화제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느낀 아틸라는 조금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것으로 소심한 복수를 했다.
“왜.”
“너 또한 미래의 일에 대해 알고 있지 않았느냐. 엘처럼 말이다.”
아틸라는 물끄러미 바토리를 봤다.
일행들을 봤다.
언젠가 아틸라는 일행에게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나는 검은늑대 부족의 아틸라가 아니다.’
‘난 지구에서 온 김도현. 지구를 찾아온 붉은 눈의 귀공자가 강제로 날 이 세계로 이동시켰다. 정신을 차리니 난 이 몸 안에 들어와 무덤 속에 묻혀 있었고, 무덤을 뚫고 부활했다.’
그때의 아틸라는 자신이 패영전의 원작자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자신의 동료들이 지구의 어느 웹소설 작가가 만든 소설 속 등장인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넌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너무도 많이 알고 있다. 그 까닭에 대해, 이제는 말해 주어도 괜찮지 않느냐.”
바토리의 말에 오토, 카스피, 슈시아, 그리고 도롱뇽과 펀치마저도 귀를 쫑긋 세웠다.
그들 모두가 궁금히 여기던 일이었다.
아틸라는 어떻게, 이 세계에 대해 그리도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걸까.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가 공기를 울렸다.
“이유는 나도 모른다. 다만 난 지구에 있었을 무렵 다른 세계에 대해 떠올린 적이 있었다.”
아틸라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내 머릿속의 그 세계는 추상적이지 않았다. 상당히 구체적이었지.”
“그, 그게 대체 무슨 소리요?”
“난 그 세계를 살아가는 자들과, 그들이 두 발을 딛고 선 대륙, 그리고 그 세계와 접하는 여러 세계를 상상할 수 있었다. 인간, 엘프, 드워프, 요정. 그들이 살아가는 크리엘도라 대륙. 그것을 둘러싼 정령계, 용계 등의 세상까지도.”
아틸라는 굳이 소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
아니, 아틸라는 이미 이 세계가 소설 속 세상이라는 가능성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지구를 찾은 사도 아자젤에 의해 난 이 세계로 이동했다. 그리고 깨달았지. 이 세계가, 지구에서 내가 떠올렸던 그 세계와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것을.”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일행은 흔들리는 눈으로 아틸라를 바라봤다.
바토리가 말했다.
“네가 떠올렸던 그 세계 속엔, 나의 존재도 있었더냐.”
비수와도 같은 질문이었다.
바토리는 지금, 이 세계의 커다란 틀뿐 아니라 ‘하나의 인간’처럼 아주 세밀한 부분까지 아틸라가 알고 있었는지를 묻고 있었다.
아틸라는 바로 답하지 않았지만, 고민 또한 길지 않았다.
“그래. 난 지구에 있었을 때부터 널 알고 있었다. 바토리.”
바토리의 눈이 빛났다.
바토리는 늘 자신과 아틸라 사이에서 강한 운명의 끌림 같은 것이 작용한다 생각했었다.
그것을 확인받은 셈이다.
“그, 그럼 아틸라. 나는? 나도 알고 있었어? 지구에 있었을 때부터?”
카스피의 물음에 바토리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럴 리 없지 않느냐 카스피. 나와 아틸라는 엘이라는 존재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너와 아틸라 사이엔 그런 접점이 없으니 말이다.”
“그, 그런가 헤헤…….”
카스피가 뒤통수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그때였다.
“알고 있었다.”
들려온 목소리에 카스피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틸라가 다시 말했다.
“난 지구에 있었을 때부터 카스피를 알고 있었다.”
“저, 정말? 정말로 날 알고 있었어 아틸라?”
아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스피는 뭐가 그리 기쁜지 환호성을 질렀고, 바토리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아틸라를 봤다.
그러나 바토리의 충격은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난 슈시아도 알고 있었다.”
“음?”
“흐에에엣?”
“뭐라?”
아틸라의 눈이 도롱뇽을 향했다.
“도롱뇽 녀석도 알고 있었다. 물론 녀석의 이름이 도롱뇽이 될 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내 이름은 도롱뇽이 아니다! 카아아앗!”
이쯤 되자 오토가 두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그, 그렇다면 아틸라 님은 나 역시도 알고 있었다는 말이……!”
“아니. 넌 몰랐다. 네 존재는 조금도 내 머릿속에 없었지.”
“히이익!”
오토가 기겁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고는 금세 울상이 됐다.
‘나, 나는 아틸라 님의 머릿속에 없었어? 저 요망한 도마뱀 새끼마저 있었는데?’
오토는 심장이 무겁게 뛰는 것을 감각했다.
갑작스러운 소외감마저 느꼈다.
아틸라가 펀치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펀치. 너도 내 머릿속에 없었다.”
끼아옹! 펀치가 괜찮다는 듯 소리치고는 혀를 헥헥댔다.
이후 일행은 생각나는 인물들에 대해 아틸라에게 물었다.
샤를, 피핀, 제롬, 키릴을 비롯한 수많은 인물들의 이름이 거론됐다.
아틸라는 대부분 그들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며 긍정했고, 그럴 때마다 바토리와 오토의 얼굴은 점점 흙빛이 됐다.
“그런데 묘하군 아틸라. 다른 인물도 아닌 라일 플라마에 대해선 알지 못했다는 것이.”
슈시아의 의문은 합당했다.
아틸라가 알고 있던 이들은 대체로 이 세계에서 뛰어난 강자이거나, 또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들이었으니까.
아까부터 오토의 눈치를 살피던 카스피가 거들었다.
“마, 맞아! 라일 정도면 상당한 강자이면서 중요한 인물이니까. 그치만 난 그보다 더 이상한 건 아틸라가 영주 나리를 몰랐던 거라고 생각해. 그, 그게 그렇잖아! 영주 나리는 나바라 왕국의 왕이자 남부 대륙에 하나뿐인 용기사인데! 그런데도 아틸라가 몰랐다는 건 조금, 아니 아주아주 많이 이상한 일이지. 그렇지 않아 바토리?”
카스피는 동조를 구할 대상을 잘못 골랐다.
바토리는 멍해진 눈으로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눈치도 없이 슈시아가 말했다.
“오토가 남부 대륙의 하나뿐인 용기사라는 말은 다소 과장된 것 같군. 아틸라, 샤를 아인하르트, 그리고 버서커 카르타고도 용기사이니까 말이야. 특이 이들 셋은 제국의 기준으로 따지자면 ‘드래곤 마스터’에 속하는 뛰어난 용기사가 아닌가. 굳이 정정하자면 오토는 남부 대륙의 하나뿐인 ‘암피테르 용기사’겠지.”
“야! 엘프!”
카스피가 버럭 소리쳤다.
귀기가 깃든 그녀의 눈엔 살기가 담겨 있었다.
슈시아도 직관의 눈을 뜨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한 번쯤은 상대해 보고 싶었지. 말로만 듣던 귀살의 일족을 말이야.”
슈시아가 등 뒤의 활을 꺼내들었다.
카스피도 입가를 찢었다.
어느새 그녀의 몸 전체는 붉은 귀기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후회할 텐데. 발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