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6. 동부 전선으로
바토리의 말에 아틸라가 움찔했다.
그것을 포착한 바토리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흐응.”
아틸라는 괜히 피부가 따끔따끔한 듯한 감각을 느꼈다.
그래서 슈시아에게 눈짓했다.
그러나 슈시아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불필요한 거짓말은 삼가고 싶군. 그 대상이 바토리 에르제베트라면 더더욱.”
슈시아는 바토리가 얼마나 무서운 마법사인지 잘 알고 있었다.
비록 짧은 시간이긴 했지만, 바토리는 드라코리치와도 박빙의 대결을 펼쳤다.
슈시아가 꼬리를 내리자 바토리는 더욱 의기양양한 얼굴로 아틸라를 봤다.
아틸라는 지금의 상황이 달갑지 않았다.
그래서 줄곧 바토리에게 묻고 싶었던 것을 물었다.
“수해의 목소리를 들었나?”
바토리의 얼굴빛이 변했다.
의기양양했던 표정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것만으로도 아틸라는 바토리가 목소리를 들었다는 것을 짐작했다.
“수해의 목소리라니, 그게 무슨 말인데 아틸라?”
카스피가 눈을 동글게 뜨며 물었다.
그녀는 수해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카스피만이 아니다.
아틸라와 바토리를 제외한, 이곳의 모든 이가 수해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건 나 역시도 궁금하군. 아틸라.”
생각에 빠져 있던 아벨도 물어 왔다.
아벨은 핏빛 수해를 봤다.
그것이 군집하며 몬스터와 같은 형상을 이루는 것을 봤다.
‘그것이 목소리를 내었단 말인가.’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아벨은 핏빛 나무로 얼키설키 얽힌 그 괴물이 최심부 수해의 일부일 거라 짐작했다.
그렇다면 그 존재가 목소리를 내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엥? 그 빨간 수해가 말을 했단 말이우? 난 못 들었는데?”
오토와 슈시아도 궁금하다는 얼굴로 아틸라를 봤다.
그러나 아틸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 이야기를 하려면 먼 과거에 있었던 일부터 꺼내야 한다.
아틸라는 아벨이 있는 곳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래도 난 이만 자야겠구나.”
바토리가 자리에 누우며 말했다.
눈치 빠른 슈시아도 잽싸게 자리를 잡고 누웠다.
“그렇군. 힘든 하루였으니까.”
“응? 뭐, 뭐야.”
“갑자기 자는 거유? 이, 이렇게 똥 싸다 끊긴 느낌으로?”
카스피와 오토만이 아쉬운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댔다.
그러나 아틸라의 서늘한 얼굴을 보자마자 서둘러 자리에 누웠고, 일행의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 * *
이튿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일행은 아벨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늘 그렇듯 아틸라가 불침번을 설 때면 일행은 마음껏 숙면을 취했고, 그래서 아벨이 떠나는 것을 감지하지 못했다.
“아벨은 어딜 간 거야 아틸라?”
“관문 요새로 갔다.”
관문 요새는 심층부 몬스터 때문에 엉망이 됐다.
게다가 현재 그곳엔 관문 기사단도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아벨은 요새에 머물며 관문 기사단의 복귀를 기다렸을 것이다.
그러나 아틸라의 등장이 그의 계획을 바꿨다.
“아벨은 나와 이야기하고 싶었기에 잠시 동행한 거다. 너희가 잠에 빠져들고, 머지않아 자리를 떠났지.”
일행이 잠든 후, 아벨은 더는 수해의 목소리에 대한 것을 묻지 않았다.
대신 멀지 않은 곳에서 벌어진 수해의 이상 현상에 대해 알렸다.
그 사건으로 관문 기사단장을 포함한, 관문 기사단의 많은 인원이 죽었다는 사실을 아벨은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틸라에겐 심안이 있었고, 그래서 아틸라는 그곳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었다.
‘관문 기사단장까지 죽었을 정도라 이거지.’
아틸라는 아벨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며, 현재의 관문 기사단은 부단장인 ‘샤비 아우렐리아’가 맡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아벨은 아틸라와 대화를 마친 뒤, 다시 관문 요새로 날아갔다.
그는 그곳에서 관문 기사단을 기다린 후 나름의 행동을 취할 것이다.
“그래. 제국과 동맹을 맺겠다는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더냐.”
“글쎄.”
아틸라는 아벨이 자리를 떠날 때까지 그의 심중을 주시했다.
아벨은 아직 선택을 내리지 않았다.
“그럼 이제 우린 어디로 가는 거요? 아틸라 님.”
“일단은 동쪽 에레트리아 군주령으로 간다.”
“에레트리아 군주령이라면 지난번에 갔던 곳 아니우?”
“오. 새끼. 기억하고 있었냐?”
아틸라가 의외라는 듯 말하자 오토가 자신만만하게 턱을 추켜올렸다.
“이래 봬도 내 머리가 제법 좋소! 살쾡이 암살자와는 다르게 말이오! 으하하하하!”
“뭐야 영주 나리. 나도 기억하고 있었거든? 에레트리아의 4대 도시 중 하나인 케렌시아엔 바토리의 친구 레비아도 있잖아.”
“잘 알고 있구나 카스피. 내가 보기에 철혈귀검은 그것까진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무, 무슨! 나도 다 알고 있었소!”
“시끄럽고. 출발한다.”
아틸라가 말에 오르자 나머지 일행도 말 위에 올라갔다.
일행은 동쪽을 향해 말을 몰았다.
바토리가 잽싸게 아틸라 옆으로 말머리를 붙였다.
“야만전사야.”
“왜.”
“지난번처럼 말 한 마리에 같이 탈 생각은 없는 것이더냐.”
“없어.”
“왜 생각이 바뀌었느냐. 지난 여행에서의 일이 넌 즐겁지 아니하였더냐.”
무어라 퉁명스레 내뱉으려던 아틸라의 입이 굳어졌다.
지난 여행에서의 일이 떠오른 것이다.
‘……이젠 기억이 났느냐.’
아틸라가 도롱뇽에게 자이언트 리자드를 포식시키기 위해, 에단과 아벨의 눈을 피해 따로 움직였던 날.
바토리는 아틸라에게 입을 맞췄다.
“왜 아무 말이 없는 것이더냐.”
바토리가 비죽 입술을 내밀었다.
그러나 잠시 후, 무언갈 깨달았다는 듯 그녀의 눈이 배시시 초승달을 그렸다.
두 뺨을 발갛게 물들이며 바토리가 물었다.
“그날의 일을 떠올린 것이더냐.”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기억나지 않는 것이더냐. 그럼 그때처럼 다시 기억나게 해 주어야겠구나.”
바토리가 아틸라를 향해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틸라가 손을 뻗어 그것을 막았다.
“……하지 마.”
“흐응.”
바토리가 혀로 윗입술을 핥았다.
그 모습을 보며 아틸라는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야만전사야.”
“또 왜.”
“내가 마법을 사용하는 것이 싫더냐.”
“아직 몸이 완치되지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네가 날 지켜 주려무나. 슈시아에게 맡기지 말고 말이다.”
바토리가 자신의 덜미를 만지며 말했다.
“……많이 아팠느니라.”
아틸라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 모습이 만족스러웠는지 바토리가 맑게 웃었다.
“에레트리아 군주령으로 향하는 까닭은 역시 언데드 때문이더냐.”
“그래.”
아틸라와 샤를의 마력 충돌로 파괴된 수해는 에레트리아 군주령의 남동쪽 방면이다.
때문에 에레트리아 군주령은 현재 언데드와 제국군 간에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아틸라와 바토리의 의미심장한 대화에 섣불리 끼어들지 못하던 오토와 카스피는 화제가 바뀌자마자 말문을 열었다.
“그, 근데 이렇게 휙 떠나도 되는 거요? 아벨 그 용기사가 갑자기 등 뒤에서 나타나 브레스라도 쏘아 대면…….”
“마, 맞아! 아벨은 아직 동료라 말하기 뭣하잖아. 지난번 남부로 이동할 때도 그리 호의적이진 않았고.”
“아벨과는 이미 이야기가 끝났다. 에레트리아 군주령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지.”
“케렌시아로 갈 생각이더냐.”
바토리의 물음에 아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레비아에게 고용된 용병 자격으로 전선을 살펴볼 생각이다. 언데드 군단의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 또 지휘관급으로는 누가 있는지도 알아두어야 하니까.”
“남부를 걱정하는 것이더냐.”
역시 바토리는 아틸라의 속마음을 꿰뚫고 있었다.
아틸라가 전선을 향하는 표면적인 이유는 제국과 동맹을 맺기 전, 적의 상황을 파악하고 싶어서였다.
제국은 샤를과 그의 부하들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현재 제국을 침범한 언데드들을 살펴본다면, 차후 제국과 동맹을 맺을 때 보다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편으로 아틸라는 제국을 침입한 언데드의 지휘관들을 확인하고 싶었다.
제아무리 언데드 군단이라 해도 용기사를 거느린 제국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게다가 아벨의 속을 들여다본 아틸라는 제국이 제법 안정적으로 언데드 군단을 막아 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샤를의 입장에서도 지휘관급 언데드를 투입시킬 수밖에 없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마저 카르타고나 수블라 같은 강자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놈들은 남부에서 무언가 꿍꿍이를 벌이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그 꿍꿍이란 분명.’
나바라, 샹크리스, 수오미, 탈리의 4개 왕국을 점령하려는 움직임일 것이다.
그러나 아틸라는 그런 염려의 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걱정은 무슨. 키릴과 라일이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또 넌 마음에도 없는 소릴 하는구나.”
“그런 적 없다.”
“하긴 아틸라 님이 북부 제국으로 올라왔다는 건 극비로 부쳐 두었으니, 샤를도 그리 쉽게 4개 왕국을 침략하진 못할 거요.”
“응응. 맞아 아틸라.”
“수해의 목소리라는 건 뭐지?”
내내 조용하던 슈시아의 물음이었다.
아틸라는 슈시아를 돌아봤다.
슈시아의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아틸라와 바토리를 흘끔거리는 그녀의 두 볼엔 홍조가 깃들어 있었다.
“펀치.”
아틸라는 펀치의 입안에서 도롱뇽을 꺼냈다.
도롱뇽은 아벨이 볼 수 없도록 펀치의 인벤토리에 숨겨뒀었다.
“카앗! 잘 자고 있었는데! 꼭 이럴 때만 꺼내더라!”
불평의 말을 무시하며, 아틸라는 도롱뇽에게 수해의 목소리를 들었느냐고 물었다.
“듣긴 뭘 들어!”
아틸라의 예상대로였다.
도롱뇽은 수해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아틸라는 수해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우린
너희를 기억한다
그리고 그때 아틸라는 수해가 말하는 ‘너희’가 자신과 바토리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 증거로 수해의 목소리를 들은 이는 오직 아틸라와 바토리뿐이었다.
이유가 무엇일까.
답은 간단했다.
“수해는 먼 옛날 주신의 다섯 사도에게 공격당했다. 그 일로 수해는 외부로의 확장을 제한받고 내부로 확장을 시작했지. 이번에 수해는 감지한 거다. 나와 바토리에게서 다섯 사도와 같은 기운이 풍겨 나온다는 것을.”
그 말에 바토리가 왼팔을 만지며 말했다.
“그래. 이제 알겠구나. 수해는 나와 아틸라에게서 ‘오르피나’와 ‘엘’의 힘을 느꼈던 것이다.”
오르피나와 엘이 주신의 다섯 사도라는 것은 이미 밝혀졌다.
또한 아틸라는 자신의 아버지가 ‘대악마 아몬’이자 ‘사도 엘’일 가능성에 확신에 가까운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것이 이번 일로 완전하게 증명된 것이다.
“내 마력이 역류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구나. 수해는 오르피나의 힘을 발현하려는 날 감지하고, 공격했다.”
바토리는 그때의 감각을 기억했다.
그것은 일반적인 마법과는 다른, 어떤 ‘원념(怨念)’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바토리는 그 무시무시한 수해의 원념을 견딜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아틸라가 물었다.
“엘에게서 남부와 북부를 잇는 수해의 ‘통로’가 생겨난 원인에 대해 들은 적이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