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만든 세계 속 광전사가 되었다-334화 (334/425)

334. 핏빛 수해의 의지 (4)

병사들은 보고 있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심층부 몬스터는 외곽부 몬스터와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강하다.

외곽부 최강의 포식자 중 하나인 오우거조차 심층부 몬스터에 비하면 한낱 먹잇감에 불과하다.

물론 병사들은 심층부 몬스터를 직접 상대해 본 일은 없었다.

다만 관문 기사단이 몇 차례 심층부 몬스터를 만난 일이 있었고, 그래서 그들은 종종 심층부 몬스터에 대한 이야기를 병사들에게 하곤 했다.

아무튼 관문 요새의 병사들은 심층부 몬스터가 무지막지하게 강하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 그런데 어떻게 저 전사가 혼자서……!”

병사들의 눈이 파문처럼 흔들렸다.

그들은 잭과 수비대장을 잡아먹은 심층부 몬스터를 아틸라, 카스피, 슈시아가 합심해 쓰러뜨렸다는 것을 몰랐다.

성루와 관문이 무너지며 피어오른 흙먼지가 그들의 시야를 가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후 병사들이 확인한 건 목이 잘린 산양 머리의 몬스터와, 저 멀리에서 뱀 머리 몬스터와 혈전을 벌이는 아틸라, 그리고 관문을 향해 말을 달려오는 남부의 4인뿐이었다.

병사들은 당황했다.

이대로라면 남부의 인간들이 관문을 넘게 될지도 모른다.

‘마, 막아야 하나? 하지만 저들은 우리에게 적대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잭과 수비대장을 잡아먹은 몬스터도 결과적으론 저들이 처리했지.’

‘지금도 남부의 전사 하나는 홀로 심층부 몬스터를 상대하고 있다.’

‘아니, 무엇보다 관문을 닫고 버틴다 해도 저런 괴물 같은 자들을 우리가 막을 수 있을까!’

수비대장은 죽었다.

지휘를 할 만한 선임도 보이지 않았다.

병사들의 눈이 서로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관문을 열어!”

“어서 관문을 열어라아아!”

그그그그……! 육중한 소음을 울리며 관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쉽지는 않았다.

무너진 성루의 충격 탓인지 문은 상당히 뻑뻑했다.

“어서 열어!”

“더 빨리!”

그그그그그그……!

십여 명의 병사들이 이마에 굵은 핏줄을 돋우며 관문을 여는 것에 집중했다.

나머지 병사들은 아틸라와 몬스터의 전투를 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아틸라가 보고 있는 풍경을 보지 못했다.

스스스. 스스스스스슷.

바람 한 점 불지 않건만 수해가 몸을 흔들었다.

아틸라는 불안감을 느꼈다.

쉴 새 없이 검과 방패를 움직이면서도 시선 한쪽은 계속해서 수해를 응시했다.

아틸라의 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눈앞의 현실인 뱀 머리 몬스터보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수해의 조짐이 더욱 불안했다.

그러던 중 아틸라는 들었다.

귀를 통해 들린 것은 아니었지만, 그 정체불명의 음성은 아틸라의 머릿속 문을 활짝 열고 들어왔다.

두근.

심장이 뛰었다.

메아리처럼 울리는 목소리.

아틸라가 아는 형식의 언어가 아니다.

그렇지만 아틸라는 그것의 의미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우린

너희를 기억한다

덜미에 돋아나던 소름이 전신으로 번졌다.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악의(惡意)로 가득한 목소리.

아틸라는 목소리의 주인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아니, 소리를 내는 존재는 하나일지 모르나, 그 안에 담긴 의지는 분명 ‘복수(複數)’였다.

우린

너희를 기다렸다

음울한 목소리에 맞춰 수해의 그늘이 확산됐다.

지금껏 수해 속에만 머물러 있던 그늘이 먹물이 퍼지듯 밀려나왔다.

그 광경을 보며 아틸라는 확신했다.

목소리의 주체는 수해였다.

콰드득!

흑철검이 뱀 머리 괴물의 목에 꽂혔다.

아틸라는 힘주어 바깥으로 검을 빼냈고, 그래서 괴물의 목은 부러질 것처럼 덜렁거렸다.

괴물의 목에서 분수처럼 피가 쏟아졌다.

그럼에도 괴물은 죽지 않았다.

본래 심층부 몬스터는 강하다.

아틸라가 지금 ‘무의식의 세계’에 한 발을 걸친 상태가 아니었다면, 이런 치명상을 입히는 것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인가? 수해의 의지가 내게 반응하는 이유는.’

아틸라는 수해에 처음 온 것이 아니다.

그는 이미 수차례나 수해를 경험했고, 상당수의 몬스터를 쓰러뜨렸다.

그러나 수해가 말을 걸어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너는 또다시

우리를 공격했다

이번엔 ‘너희’가 아닌 ‘너’였다.

‘내가, 너희를 공격했다고?’

아틸라는 관문 요새로 오는 동안 상당한 몬스터를 죽였다.

그러나 그건 아틸라의 일방적인 사냥이 아니었다.

선제공격을 가한 건 몬스터 쪽이다.

그렇다면 수해의 말이 의미하는 건.

‘방금 죽인 심층부 몬스터를 말하는 건가.’

아틸라는 성벽 위에 널브러진 산양 머리 괴물을 떠올렸다.

아틸라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수해가 말했다.

아니다

그 순간 뱀 머리 괴물이 칼날 같은 꼬리를 휘둘렀다.

아틸라는 흑철방패로 그것을 막았다.

예상을 뛰어넘는 힘에 아틸라의 왼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너는

이전과 달라졌다

수해의 일정 범위가 기린의 목처럼 늘어났다.

그것이 순식간에 다가와 뱀 머리 괴물을 삼켰다.

수해는 마치 육식동물처럼 뱀 머리 괴물을 질겅질겅 씹었다.

괴물의 피가 후드득후드득, 지면에 떨어졌다.

생각지도 못한 소름 끼치는 광경에 아틸라는 두 눈을 부릅떴다.

꿀꺽, 괴물을 삼킨 수해가 더 가까이 다가왔다.

보랏빛을 넘어 완연한 핏빛으로 변한 그것이 고개를 갸웃했다.

너는 달라졌다

수해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변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악의만큼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크게 번졌다.

너희는 우리를 속였다

아틸라를 응시하던 수해가 고개를 돌렸다.

수해의 눈이 바라보는 건 관문 방향이었다.

아틸라는 수해가 말하는 ‘너희’에 대해 깨달았다.

스스스스스스스.

수해의 몸이 흔들렸다.

진동의 폭이 커졌다.

이내 끊는 물처럼 몸을 뒤틀었다.

……, ……. …… ……!

수해가 비명을 질렀다.

이번만큼은 아틸라도 의미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다만 아틸라는 보았다.

비명을 지르는 핏빛 수해의 몸통에서 괴물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순간 아틸라가 떠올린 생각은 하나였다.

달아나야 한다.

이히히힝!

말머리를 돌린 아틸라가 관문을 향해 달렸다.

관문 앞엔 오토, 카스피, 슈시아, 바토리가 있었다.

그들은 활짝 열린 관문을 넘지 않고 아틸라를 기다리는 듯했다.

‘빌어먹을 오토 새끼! 왜 넘어가지 않고!’

다행인 것은 바토리가 마법을 시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엔 오류가 있었다.

관문 가까이 다가갈수록, 아틸라는 바토리가 마법을 시전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시전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아틸라의 눈이 커졌다.

바토리의 얼굴은 시체처럼 핏기가 없었다.

그녀는 죽은 가지처럼 왼팔을 늘어뜨렸고, 그곳에서 엄청난 양의 출혈이 일고 있었다.

“오토!”

아틸라의 외침에 기겁한 오토가 바토리를 슈시아에게 넘겼다.

바토리를 업은 슈시아가 아틸라를 봤고, 관문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이어 오토와 카스피가 아틸라를 향해 말을 달려왔다.

아틸라는 등 뒤를 돌아봤다.

십여 마리에 달하는 심층부 몬스터가 파도처럼 밀려들고 있었다.

아니, 저건 심층부 몬스터가 아닐지도 모른다.

아틸라는 도롱뇽의 해방 스킬 없이는 이 난관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도롱뇽은 아틸라 곁에 있지 않다.

녀석은 해방 스킬의 사거리를 벗어나 있었다.

‘빌어먹을, 아직인가!’

아틸라는 오토와 슈시아가 달려오는 이유가 도롱뇽 때문일 거라 짐작했다.

과연 카스피의 손엔 도롱뇽이 쥐여 있었다.

길게 혀를 빼물은 채 켁켁대는 녀석의 얼굴이 보였다.

카스피의 오른팔에 귀기가 깃들었다.

아틸라를 향해 힘껏 도롱뇽을 내던졌다.

“가라! 도롱뇨오오오옹!”

아틸라를 향해 날아오던 도롱뇽의 눈빛이 변했다.

동공을 좁힌 도롱뇽의 눈동자가 하늘을 올려 봤다.

아틸라의 시선도 자연스레 하늘을 향했다.

펄럭.

아틸라의 머리 위로 그늘이 드리웠다.

태양이 사라진 자리엔 붉은 비늘을 흔드는 거대한 드래곤이 있었다.

아틸라는 드래곤 위에 올라탄 용기사의 얼굴을 봤다.

아틸라가 익히 알고 있는 사내였다.

‘아벨!’

키랴랴랴랴랴랴!

카르노피아가 불의 브레스를 뿜었다.

그것이 밀려들던 몬스터들을 습격했다.

파드드드드드드……!

브레스의 힘은 엄청났다.

아틸라는 놀랐다.

카르노피아는 이전에 아틸라가 봤을 때보다 더욱 커다래져 있었다.

‘세베스티아 이상이다.’

덩치뿐 아니라 브레스의 위력도 세베스티아를 능가했다.

아틸라는 처음 카르노피아를 봤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의 카르노피아는 세베스티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나약한 개체였다.

키에에! 키에에에에에!

몬스터들이 비명을 질렀다.

몇 마리는 이미 잿개비로 화했다.

카르노피아의 기습은 수해의 허를 찔렀고, 완벽하게 성공했다.

어쩌면 수해가 아틸라에게 의지를 집중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퀴리릭! 퀴리리릭!

살아남은 몬스터들이 카르노피아를 공격했다.

그러나 놈들 또한 중상을 입었고, 그런 상대에게 타격을 허용할 정도로 카르노피아는 약하지 않았다.

핏빛 수해가 괴성을 질렀다.

더욱 목을 길게 빼며 카르노피아를 습격했다.

카르노피아는 날아드는 핏빛 수해가 극도로 위험하다는 것을 직감했다.

날개를 움직여 더욱 높은 하늘로 올라가려 했다.

그것을 수해가 추격했다.

……! ……. …… ……! ……, ……!

아벨은 수해가 발하는 외침을 듣지 못했다.

그는 핏빛 수해를 처음 보았다.

그러나 아벨은 심층부 수해가 보랏빛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눈앞의 핏빛 수해가 뜻하는 게 무엇인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아벨의 몸이 기울었다.

카르노피아의 상승이 멈췄다.

아벨은 어느 몬스터의 기다란 팔이 카르노피아의 발목을 붙잡았다는 것을 알았다.

‘카르노피아!’

아벨의 눈이 부릅떠졌다.

기다렸다는 듯 핏빛 수해가 아가리를 벌렸다.

붉은 나무의 군집체인 그것은, 그 순간만큼은 드래곤마저 잡아먹는 포식자처럼 보였다.

아벨은 검기를 발현해 카르노피아의 발목을 붙잡은 몬스터의 팔을 잘랐다.

그러자 제2, 제3의 팔이 날아와 카르노피아의 몸을 휘감았다.

‘위험하다!’

아무리 아벨이 평범한 용기사가 아니고, 또 카르노피아가 강력한 드래곤이라 해도 이 상황을 벗어나는 건 무리였다.

아벨은 죽음의 그림자가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기습은 성공적이었지만, 그 탓에 이렇게 위기를 맞았다.

아벨은 지친 상태였다.

이곳에 오기 전, 관문 기사단의 생존자들을 살리기 위해 그는 많은 심력을 소모했다.

그들을 구하는 도중 아벨은 관문 요새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보랏빛 수해를 봤다.

그래서 관문 기사단을 안전한 곳으로 인도한 뒤 서둘러 관문 요새로 날아왔다.

그러고는 요새를 습격하려는 괴물들을 보자마자 생각할 겨를도 없이 하강해 브레스를 뿜었다.

그래서 아벨은 보지 못했다.

저 무시무시한 몬스터들과 싸우던 자가 아틸라였다는 것을.

또한 아틸라를 구하기 위해 달려온 카스피가, 아틸라에게 도롱뇽을 내던졌다는 것을.

크르르르르……!

아벨의 귓전으로 사나운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우렁찬 포효로 바뀌었다.

키랴랴랴랴랴랴!

흑염의 브레스가 핏빛 수해를 덮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