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9. 격변의 대지 (4)
연합군과 언데드 군단의 전쟁이 끝나고 수개월이 지났다.
샤를은 아틸라에게 예견했던 대로 남부 9개 왕국을 통합해 대제국을 선포한 뒤, 황제가 됐다.
과거 발루아, 아스투리아, 후마이야, 노르드, 카스티야, 라든, 에이시스, 델로스, 그리고 센트럴 왕국의 영토가 하나로 합쳐진 거대 제국 ‘아인하르트’는 이렇게 탄생했다.
아인하르트 제국의 등장은 남부 대륙의 많은 것을 바꿨다.
제국에 편입되지 않은 왕국은 나바라, 샹크리스, 수오미, 탈리의 4개 왕국이 전부였다.
자연스레 4개 왕국은 아인하르트 제국을 견제하며 연합 체제를 구축했다.
또한 적색 마탑, 청색 마탑, 황색 마탑도 임시 중앙 마탑을 선별해 협력 관계를 도모했다.
임시 중앙 마탑의 역할은 적마탑이 맡았다.
새로운 중앙 마탑주는 적마탑의 탑주인 라일 플라마로 결정됐다.
* * *
다섯 마리 군마가 북쪽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어이 오토. 넌 이번에야말로 왕국이나 돌보라니까 또 따라나서는 거냐.”
“아이고 아틸라 님 또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신다. 나와 요롱이 없이 어떻게 그 먼 거리를 이동하겠다는 거요!”
“요롱이는 없어도 돼. 어차피 군마를 타고 이동할 거니까.”
“흐응, 그렇지만 야만전사야. 만일을 위한 선택으로 요롱이가 있다는 게 그리 나쁜 일 같지는 않구나. 물론 철혈귀검 저 아이는 용부 역할 말고는 별달리 도움 될 일이 없을 것 같지만 말이다.”
“용부? 용부는 또 뭐요? 바토리 아가씨.”
“말이나 마차를 모는 사람을 마부(馬夫)라 하지 않더냐. 그렇다면 용족을 모는 사람은 용부(龍夫)이지 무엇이겠느냐.”
“케헷헷헷헤! 바토리 할망구 말 한번 잘 했다. 이제 종복 미물 저놈을 용부 미물이라 불러야겠다!”
“저, 저, 저 요망한 울보 도마뱀 새끼가아아!”
“뭐? 울보 도마뱀? 누가 울보라는 거냐! 카아앗!”
“엥? 도롱뇽. 너 지난번에 샤를이 악마왕 됐던 날 아틸라 얼굴 위에서 엉엉 울었다면서.”
“누, 누가 그런 허튼 소릴 한 거냐 살쾡이 미물!”
“내가 했다. 도롱뇽 새끼.”
“응 맞아. 아틸라한테 들었어.”
“나, 나도 아틸라 님에게 들었다 울보 도마뱀아아아!”
“나도 아틸라에게 들었단다 울보 도롱뇽아.”
“켁! 이건 모함이다! 모함이야! 곰탱이 새끼! 어서 뭐라고 말 좀 해 봐!”
끼아옹!
“아무래도 여기선 진실을 말할 수밖에 없겠군요. 드라콘 이스메니오스. 나 역시도 아틸라에게 들었습니다.”
“빌어먹을 엘프 미물. 넌 왜 서리나무숲으로 안 돌아가고 우릴 따라오는 거냐!”
“잊으셨습니까 드라콘 이스메니오스. 서리나무숲은 수해의 어둠에 물들었습니다.”
“그, 그래서 달빛우물숲에서 한동안 같이 살기로 했다며! 빌어먹을 서리나무의 왕이라는 녀석이 저놈의 종복 미물……, 아니 용부 미물 새끼처럼 백성들을 저버리고 놀러 다니는 거냐! 황금바위 난쟁이들은 다시 황금바위산으로 잘도 돌아갔는데!”
“나한테 용부 미물이라고 하지 마라 요망한 도마뱀아아아!”
“아쉽지만 난 오토와는 상황이 다릅니다. 애초부터 엘프는 인간과 달리 독립성이 강한 종이지요. 하지만 또한 엘프는 다른 일족과 사이가 좋지 않기에 달빛우물 엘프와의 잦은 마찰은 피할 수 없을 겁니다.”
“그, 그러니까 대체 왜 따라오는 거냐고!”
“세상이 변했습니다 드라콘 이스메니오스. 서리나무 엘프도 변화한 시대에 적응할 필요가 있겠지요.”
“빌어먹을……! 근데 엘프 미물, 넌 왜 갑자기 존댓말을 하는 거냐! 처음엔 안 그랬는……!”
“반말이 편하다면 다시 반말로 돌아가겠다. 울보 도롱뇽.”
“카앗! 열받는다! 나 열받는다아아! 뭐라고 말 좀 해봐 이 곰탱이 새끼야!”
끼아옹!
“그건 그렇고, 괜찮겠나? 아틸라.”
“뭐가.”
“키릴 크레센시아를 대동하지 않은 것 말이다. 난 요르그 문샤인웰과 같은 드루이드가 아니다. 여차할 때 부상당한 동료를 치유할 수 없다는 이야기지.”
“키릴이 있으면 안정적이긴 하겠지. 하지만 남부 왕국엔 샤를에게 대항할 수 있는 자가 필요하다.”
“라일 플라마가 있지 않나.”
“라일 그 새끼는 안 돼. 샤를을 상대로 버틸 수 있는 건 포이베의 신력을 지닌 키릴이다. 샤를이 대악마의 힘을 손에 넣었으니, 더더욱 빛의 신력을 지닌 키릴이 적임자라는 거지.”
“흠. 듣고 보니 그렇군.”
“슈시아. 너야말로 남부에 남아 키릴을 도와주는 건 어떤가.”
“음? 조금 거슬리는 말이로군. 아틸라, 넌 나의 도움이 필요치 않다는 건가.”
“그런 게 아니란다 슈시아. 아틸라가 괜히 저러는 거란다.”
“맞아. 아틸라는 발키리의 힘이 이번 여정에 큰 도움이 될 거라 했어. 내가 똑똑히 들었다고.”
“나, 나도 들었수!”
“그렇군. 그런데 왜 나만 듣지 못한 거지?”
“그건 아틸라, 저 아이가 꼭 당사자 앞에서는 듣기 싫은 소리만 골라서 하기 때문이란다. 벌써 21살이 되었건만 아직도 하는 행동은 철부지 어린아이와 다를 게 없단다.”
“헤헤. 아틸라에게 그런 면이 있긴 하지.”
“맞소! 아틸라 님의 말은 딱 반대로 해석해서 들으면 아주 정확하더란 말이요. 으하! 으하! 으하하하하!”
“빌어먹을. 나 혼자 갈 거니까 다들 따라오지 마라. 할망구. 특히 넌 아직 몸도 다 회복하지 못했으면서.”
“흐응. 넌 내가 그리 걱정되는 것이더냐.”
“괜히 엄한 곳에서 뒈져서 꼭 필요할 때 없을까 봐 그런다.”
“저것 보거라 슈시아. 내 말이 꼭 맞지 않느냐.”
“과연. 이해했다, 바토리 에르제베트.”
“그냥 바토리라 부르려무나.”
“그러지. 바토리.”
“이렇게 다 함께 있으니 예전 생각난다 영주 나리. 전에도 이렇게 함께 여행했었잖아. 물론 그땐 키릴도 있고 샤를도 있었……, 아…….”
“그, 그, 근데 아틸라 님. 샤를 그 친구는 왜 갑자기 행보를 완전히 바꾼 거요? 지, 지난번에 아틸라 님은 샤를과 한참을 대화하지 않았소.”
“이런 상황에서도 샤를을 친구라 부르는 거냐.”
“그, 그게…… 아무리 생각해도 샤를 그 친구가 그리 나쁜 인간 같진 않아서…….”
“샤를은 인간이 아니다.”
“역시 그런 거요? 샤를은 인간이 아닌…… 엥? 뭐, 뭐요? 인간이 아니라고?”
“샤를은 요정왕국의 공주 ‘아리아나 아인델’과 ‘대악마 아몬’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다. 인간의 피는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았지.”
“힉! 요정이었다고! 그래서 그렇게 기생오라비처럼 생겼던 거요!”
“여, 역시 요정의 핏줄이라 그렇게 잘생겼었던 거구나!”
“뭐, 뭐요 살쾡이 암살자! 여태 샤를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요!”
“여, 영주 나리가 무슨 상관인데!”
“아니 뭐. 사, 상관은 없지만.”
“아무튼 그동안의 샤를은 대악마의 피를 억눌러 왔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 녀석은 대악마의 힘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자신의 목표를 수행하려 하고 있지.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카르타고와 언데드들을 이용해서 말이로군.”
“그래. 원래부터 샤를에겐 두 가지 목표가 있었다. 하나는 전쟁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 녀석의 어머니 아리아나 아인델은 악마의 핏줄을 낳았다는 이유로 마력을 잃고 인간계로 추방됐다. 그리고 인간의 손에 죽임 당했지. 그래서 샤를은 어릴 때부터 전쟁이 없는 세상을 꿈꿨다. 녀석이 대륙을 통일하려 하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이다.”
“전쟁이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전쟁을 일으킨다는 건가. 상당한 모순이군.”
“그렇지만 가장 가능성 있는 방법이기도 하지. 아무튼 샤를은 그렇게 첫 번째 목표를 이루려 했다.”
“그럼 아틸라. 샤를의 두 번째 목표는 뭔데?”
“두 번째 목표는 샤를 스스로 포기했다. 첫 번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였지. 두 번째 목표는 본래 녀석의 어머니인 아리아나 아인델의 뜻이었을 뿐, 샤를 스스로의 목표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 목표가 뭔데?”
“전쟁이 없는 세상에서,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
“아…….”
“잠깐. 샤를 그 친구는 인간이 아니라 하지 않았소? 그런데 어떻게 인간으로 산다는 거요?”
“아 쫌 영주 나리. 그러니까 인간들과 어울려 인간처럼 살아간다는 말이지, 그걸 꼭 그렇게 따지고 들어야 해?”
“저 용부 미물 새끼는 돌대가리라서 그렇다!”
“요망한 도마뱀아아아! 내 뇌가 너보다 백 배는 더 클 거다아아!”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면 내가 백 배는 더 크거든!”
“맞다 아틸라. 도롱뇽은 정말 그때처럼 완전체로 돌아갈 수 없는 거야?”
“아무래도 그런 것 같더군.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빌어먹을……! 이제 완전히 힘을 되찾았나 했더니만…….”
“염려 말거라 도롱뇽아. 그래도 한 번 성공했으니 머지않아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겠느냐.”
“크흑……! 제발 그래야 하는데……!”
“잠깐. 도착한 것 같군.”
슈시아의 말에 일행은 대화를 멈췄다.
다각다각, 다섯 마리 말의 발굽 소리만이 공기를 울렸다.
일행은 탈리 왕국 북쪽의 어느 관문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일행의 앞에 지금껏 본 적 없던 거대한 관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슈시아가 말했다.
“저것이 남부에서 북부 대제국으로 통하는 유일한 관문인가.”
“유일한 관문은 맞지만, 유일한 통로는 아닐지도 모르지.”
아틸라는 샤를과의 접전 중 북쪽 하늘에 생성됐던 균열을 떠올렸다.
균열 속엔 수해가 있었고, 그 너머로 보이는 건 분명 제국의 땅이었다.
균열은 아틸라와 샤를의 충돌로 생성된 마력의 폭풍을 집어삼킨 뒤, 수해를 공격했다.
물론 수해는 강력한 공간이다.
먼 옛날 중간계를 찾은 다섯 사도들도 수해를 정복하지 못했다.
어쩌면 아틸라가 균열 속에서 봤던 것은 환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틸라는 그럴 가능성은 적다고 여겼다.
그날, 균열은 자신과 샤를의 충돌을 이용해 수해를 습격했다.
그리고 아마도 균열은 남부와 북부를 잇는 새로운 통로를 생성했을 것이다.
아틸라는 생각했다.
자신의 짐작이 사실이라면.
이것 또한 바토리가 말했던 ‘이 세계를 움직이는 거대한 의지’에 의한 것은 아닐까.
“우와 영주 나리. 관문 진짜 크다.”
“그러게나 말이오. 하긴 수해 한복판을 지나는 관문이니 뭐,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수.”
오토와 카스피도 제국으로 통하는 관문은 처음 보았다.
아틸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아틸라는 눈앞의 거대한 관문을 보며 강한 기시감을 느꼈다.
새로운 장소를 만날 때마다 경험하는 그만의 특별한 감각이었다.
일행은 주저 없이 관문을 향해 말을 달렸다.
관문을 관리하는 탈리 왕국의 국왕은 이미 만났고, 관문을 지키는 마법사들은 이제 새로운 중앙 마탑주인 라일의 명을 따르는 자들이다.
관문은 워낙 규모가 거대했기에, 한참을 달려도 금세 가까워지진 않았다.
일행의 눈에 비장한 각오가 서렸다.
그들은 관문을 넘어 북부 제국으로 건너갈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