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8. 격변의 대지 (3)
도롱뇽의 흐릿한 시선이 아틸라를 바라봤다.
그러나 아틸라는 여전히 멍한 얼굴로 하늘을 볼 뿐이었다.
푸르르 고개를 털며 도롱뇽이 말했다.
“……빌어먹을 나도 이제 뒈질 때가 됐나. 처울고 지랄이야.”
도롱뇽은 앞발로 눈물을 닦아낸 뒤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 위의 풍경은 여전했다.
키릴이 이쪽을 보며 성력을 발휘 중이고, 바토리는 마멸의 칼날을 운용해 드라코리치를 상대하고 있다.
도롱뇽은 키릴의 어깨너머 비치는 드라코리치를 봤다.
드라코리치의 눈도 도롱뇽을 봤다.
도롱뇽은 드라코리치의 눈빛에서 작은 이변을 감지했다.
그 순간 무언가가 도롱뇽의 몸을 움켜쥐었다.
도롱뇽은 자신의 심장 속에서 가공할 힘이 발산하는 것을 느꼈다.
* * *
바토리는 핏발 선 두 눈으로 드라코리치와 샤를을 노려봤다.
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였다.
그럼에도 그녀의 타깃은 아직 건재했다.
대악마의 현신이 된 샤를.
칼날 산맥의 굴레에서 벗어난 드라코리치.
그들은 바토리가 지금껏 만났던 그 어떤 상대보다도 강했다.
바토리의 입에서 핏물이 흘렀다.
그녀는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왼팔에 담긴 신의 마력이 인간의 육체를 붕괴시키고 있었다.
나는 어찌 돼도 상관없다고, 바토리는 생각했다.
자신은 아틸라를 구하기 위해 이곳으로 달려왔다.
그 목적 하나만을 위해 왼팔의 마력을 개방했다.
물러서지 않겠다.
반드시 목적을 이룰 것이다.
츠커커커컹!
마멸의 칼날이 샤를을 향해 날아갔다.
드라코리치의 브레스는 숨을 다했다.
바토리는 혼자만의 힘으로 저 무시무시한 드래곤의 브레스를 막았다.
그렇다면 다음은 샤를의 차례다.
바토리는 샤를의 의지가 드라코리치를 조종한다는 것을 알았다.
둘 모두를 쓰러뜨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몸통이 아닌, 머리를 제거해야 한다.
바토리는 자신의 모든 의지를 마멸의 칼날 강화에 집중했다.
그러나 의지만으로 불가한 일도 있었다.
바토리의 몸은 임계점을 넘어섰고, 시전자가 약화되자 마멸의 칼날 또한 직전까지의 예리함을 잃었다.
“과연 대단하군. 바토리 에르제베트.”
샤를이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틸라가 만들었던 상처는 이미 완벽하게 수복됐다.
게다가 그 일을 계기로 샤를은 대악마의 힘을 보다 깊숙하게 받아들였다.
지금의 샤를은 더욱 강해졌다.
그런 그에게 기력이 쇠한 바토리의 공격은 위협적이지 못했다.
우우웅.
듀란달에서 솟구친 마기가 채찍의 형상을 그렸다.
그것이 쇄도하는 마멸의 칼날을 포박하고, 부쉈다.
부서져 흩날리는 마멸의 칼날.
바토리의 부릅뜬 눈이 초점을 잃고 흔들렸다.
칼날의 파편 너머 샤를의 푸른 눈이 보였다.
그 눈동자는 더 이상 인간의 것이라 느껴지지 않았다.
“이것으로 끝이다. 바토리 에르제베트.”
드라코리치가 무서운 속도로 하강했다.
샤를의 검은 채찍이 기다란 창날로 모습을 바꿨다.
바토리에게 쏘아졌다.
“바토리!”
키릴이 방패를 꺼내들며 달렸다.
바토리는 소리치려 했다.
키릴이 이곳에 와서는 안 된다.
키릴은 아틸라를 치유해야 한다.
그래야만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이……!
그때였다.
펄럭.
거대하고 시커먼 것이 바토리의 시야를 덮었다.
이어 공기를 찢어발기는 소음이 천지를 울렸다.
파카카카카캉!
샤를이 투척했던 검은 창이 궤도를 벗어나 지면을 강타했다.
바토리는 자신의 시야를 잠식한 존재를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바토리는 이전에도 그 존재를 본 적이 있었다.
먼 옛날 사르데니야 왕국을 멸망시켰던 무시무시한 괴물.
그리고 훗날 자신과 다른 관조자들의 손에 지하마계로 봉인됐던.
“도롱……뇽아…….”
아니, 그것은 도롱뇽이 아니었다.
죽음의 숨결.
규격 외 등급 ‘드라코니안’이라 불리는 최강의 드래곤.
광룡(狂龍) 드라콘 이스메니오스!
키랴랴랴랴랴랴랴!
흑염의 브레스가 하늘을 덮었다.
완전체가 된 도롱뇽의 힘은 엄청났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도롱뇽의 등 위로 익숙한 사내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의 오른손엔 완전한 모습으로 변모한 드라칼리온이 쥐여 있었다.
바토리를 돌아보는 그의 검은 머리가 불꽃처럼 흔들렸다.
“내가 이뤄 주겠다고 말했었지. 바토리.”
바토리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아틸라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그녀는 분명하게 기억했다.
그때처럼 물었다.
“무엇을…… 말이더냐…….”
“그토록 오랜 세월 네가 찾아헤매던 것.”
피로 얼룩진 얼굴 속에서 송곳니가 드러났다.
“그러니 그때까지 죽지 마라.”
그 말을 끝으로 아틸라의 얼굴이 사라졌다.
그는 도롱뇽과 함께 비상했다.
샤를을 향해 드라칼리온을 뻗었다.
콰콰쾅!
듀란달과 드라칼리온이 부닥치며 거센 폭풍이 일었다.
두 전사의 격돌에 하늘이 울부짖었다.
말 그대로 하늘이 울리고, 갈라지고, 또 다른 균열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쿠쿠쿠쿠쿵.
새로운 균열은 북쪽 하늘에서 일었다.
아틸라와 샤를이 검을 섞을 때마다, 드라콘 이스메니오스와 드라코리치가 발톱을 부닥칠 때마다 가공할 마력의 폭풍이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샤를은 균열 너머에서 수해를 봤다.
수해 너머 미지의 세계를 봤다.
콰르르르르르……!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균열로 흡수된 마력의 폭풍이 수해를 공격하고 있었다.
그리고 샤를은 북쪽 하늘에 생성된 저 균열과, 그곳으로 빨려 들어가는 마력의 폭풍이 우연적으로 발생한 일이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이것은 자신의 몸 안에 둥지를 튼 아몬의 의지다.
명확히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대악마 아몬이 자신과 아틸라의 힘을 이용해 수해의 일정 범위를 파괴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나와 아틸라의 힘으로? 하지만 무엇 때문에.’
샤를은 아몬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다만 이 전투를 계속 이어 가선 안 된다는 것만은 알았다.
지금의 아틸라는 위험하다.
그 못지않게 자신이 지닌 대악마의 힘도 위험하다.
샤를은 추측했다.
아틸라의 힘과 자신의 힘은 같은 곳에서 왔다.
마치 자성을 지닌 광석처럼, 두 힘은 서로를 끌어당기기도 하고 밀어내기도 한다.
그리고 지금의 두 사람은 서로의 힘을 최고조로 밀어내고 있다.
그 위태로운 두 힘이 부닥치며 대격변을 앞당기고 있었다.
‘일단은 힘의 충돌을 멈춰야 한다.’
샤를은 아직 자신의 힘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했다.
아틸라 역시 마찬가지.
게다가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마저 완전한 모습이 됐고, 드라코리치도 칼날 산맥의 굴레에서 벗어났다.
‘지금의 상황이 계속된다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승부는 훗날로 미루는 편이 낫다.
각자의 힘을 완전하게 통제할 수 있게 된 뒤로.
“이번엔 여기까지인 것 같군. 아틸라.”
아틸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역시도 지금의 전투가 이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아틸라도 북쪽 하늘의 균열에서 수해를 봤다.
그리고 그 수해 너머의 세상이 제국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틸라는 샤를과 달리 제국을 다녀온 적이 있다.
저 균열 너머에서 발생하는 일이 환각이 아닌 현실이라면, 남부 대륙과 북부 대제국을 잇는 새로운 통로가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물러나라. 샤를.”
아틸라가 말했다.
그에겐 샤를이 지닌 이유 말고도 이번 전투를 멈춰야 할 여러 이유가 있었다.
그그그……! 그그그그그그……!
두 사람이 만들어 낸 충돌은 하늘뿐 아니라 대지에도 변화를 일으켰다.
대지가 갈라졌다.
그 틈으로 용암이 솟아올랐고, 연합군과 언데드들이 추락했다.
이 엄청난 격변이 지상을 혼돈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더 이상 전투를 이어 갈 수는 없다.
게다가 아틸라는 자신의 몸이 극도로 망가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은 무언가의 계기로 개방된 힘이 육체를 지탱하고 있지만, 이것이 영원할 리 없다는 것을 아틸라는 알았다.
그것만이 아니다.
바토리의 몸도 엉망이 됐다.
다행히 근처엔 키릴이 있고, 멀지 않은 북부 전선엔 달빛우물숲의 왕 요르그 문샤인웰이 있다.
그들의 힘이라면 어떻게든 바토리를 치유할 수 있을 것이다.
“난 처음부터 물러나려 했다. 또한 너에게도 손을 내밀었었지. 아틸라.”
“이제 그만 정신을 차리는 것이 어떤가. 넌 정말로 저들의 군주가 되어 온 대륙을 언데드의 숨결로 뒤덮을 생각인가.”
“이 세상은 언데드의 숨결로 덮이지 않을 것이다. 대륙의 주인이 변하는 일은 없다. 다만 언데드들은 전쟁의 재발을 가로막는 강력한 억제제가 될 것이다.”
“언데드들의 감시를 받는 세상 말인가. 그런 통제된 세상보다는 인간들끼리 마음껏 치고받는 지금이 낫겠군.”
아틸라가 비웃듯 말했다.
샤를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아틸라. 넌 모르고 있다. 인간은 악하다. 인간에겐 자신의 악한 본능을 다스릴 수 있는 강력한 힘이 필요하다.”
“그 힘은 인간 스스로의 의지에서 우러나와야 한다.”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잃었다.”
아틸라와 샤를이 서로를 노려봤다.
그러나 그들에겐 느긋이 대화를 나눌 시간 같은 건 없었다.
지금은 두 사람이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마력의 뒤틀림이 발생하고 있다.
또한 아틸라는 망가진 육체를 지지할 수 있을 때 전장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육체가 무너진 뒤엔 늦는다.
육체가 무너지고 나면, 자신뿐 아니라 도롱뇽 역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지 모른다.
그전에 샤를을 보내야 한다.
이렇게 협상할 수 있는 것도 자신에게 아직 샤를을 위협할 힘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틸라에겐 다른 무엇보다도 전투를 멈춰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지금의 샤를은 아틸라보다 강하다.
“승부는 다음에 내기로 하지. 아틸라.”
샤를이 자리를 벗어났다.
아틸라도 샤를과 반대 방향으로 도롱뇽을 움직였다.
두 사람의 거리가 멀어지자 폭풍은 점차 사그라들었다.
그러나 북쪽 하늘의 균열은 이곳에서 발생된 마력의 폭풍을 마지막까지 흡수한 뒤 모습을 감췄다.
전장을 벗어난 샤를이 가장 먼저 한 일은 피핀에게 날아가 손을 내민 것이었다.
“피핀.”
“……샤를.”
잠시 주저하던 피핀은 샤를의 손을 잡았다.
그렇데 두 사람은 그들을 따르는 언데드들과, 금사자 기사단과, 아인하르트의 대군을 이끌고 북동쪽으로 후퇴했다.
샤를을 따르지 않은 연합군의 통솔은 키릴이 맡았다.
군의 사기는 바닥까지 떨어져 있었다.
가장 선두에서 언데드와 싸우던 연합군의 최고사령관이 하루아침에 언데드들의 군주가 됐다.
키릴은 병력들을 이끌고 북서쪽으로 움직였다.
북부 전선 연합군과 합류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그전에 키릴은 바토리를 최선을 다해 치유했다.
바토리는 아틸라가 부활한 직후 혼절했다.
아틸라는 바토리의 치유 과정을 지켜봤고, 치유가 끝나자마자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사실 바토리보다 더욱 심하게 몸이 망가진 건 아틸라였다.
도롱뇽도 원래의 자그만 모습으로 돌아왔다.
도롱뇽은 아틸라와 바토리 사이를 번갈아 뛰어다니며 걱정 가득한 얼굴을 했다.
그러던 중 오토, 카스피, 슈시아가 현장에 도착했다.
슈시아의 제안에 따라, 일행은 요롱이를 타고 북부 전선의 요르그 문샤인웰을 찾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