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6. 격변의 대지 (1)
아틸라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하체의 감각이 사라졌다.
손에 쥔 흑철검과 무휼의 촉감도 흐릿하게 변했다.
그럼에도 아틸라는 몸을 움직였다.
그가 무의식의 세계 속에서도 가장 깊은 장소로 진입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퍼걱!
내뻗은 무휼이 샤를의 가슴에 꽂혔다.
샤를이 외마디 신음을 뱉었다.
그러면서 샤를은 놀라워했다.
듀란달은 분명 아틸라의 척추에 박혔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래. 넌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지.’
샤를은 인정했다.
아틸라는 평범하지 않다.
처음 봤을 때부터 그렇게 생각했고, 지금은 한 점의 의심 없이 확신했다.
아틸라는 자신과 같은 대악마 아몬의 핏줄이다.
저 정도의 상처는 재생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자신이 그렇듯이.
파아앙!
듀란달에 맺힌 오러가 채찍이 되어 아틸라를 덮쳤다.
아틸라의 몸이 지면에 처박혔다.
그 덕에 샤를은 자신의 흉부에 박힌 무휼을 몸 밖으로 제거했다.
쿨럭, 샤를의 입에서 핏물이 흩어졌다.
대악마 아몬의 마기를 받아들이긴 했지만 그의 육체는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시간이 필요한 건가. 아니면.’
샤를은 생각을 이어 갈 수 없었다.
지면을 구르던 아틸라가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짐승처럼 네 발로 달려왔기 때문이다.
쿵쿵쿵쿵! 거리를 좁힌 아틸라가 흑철검과 무휼을 뻗었다.
그 모습은 정말로 사람이 아닌, 짐승이 공격하는 것 같았다.
형식이 느껴지지 않는 괴이한 공격.
샤를은 듀란달을 휘둘러 막았다.
그러면서 느꼈다.
무휼에 당했던 가슴의 통증이 완화되고 있었다.
샤를은 자신의 상처가 수복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그렇다면 아틸라, 너도.’
샤를은 아틸라의 상처를 확인했다.
그러고는 의아한 눈을 떴다.
자신과 달리, 아틸라의 상처는 수복되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곳에서는 미친 듯이 피가 뿜어져 나왔다.
과다출혈로 죽지 않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샤를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래. 이것이 버서커의 권능인가.’
샤를은 아틸라가 자신과 동류의 힘을 갖고 있으면서, 다른 한편으론 자신과 다른 힘을 지녔다는 것을 알았다.
버서커의 권능.
자신은 지니지 못한 힘이다.
샤를은 의문했다.
‘그렇다면 카르타고는 어떻게.’
카르타고는 버서커의 힘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샤를은 아몬의 마력을 받아들이기 전, 아틸라와 카르타고가 버서커로 변해 싸우는 모습을 봤다.
두 전사의 능력은 쌍둥이처럼 닮았다.
그러나 지금의 샤를은 알 수 있었다.
아틸라와 카르타고의 능력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마치 자신과 아틸라의 힘이 같은 존재에게서 파생된 힘이면서도, 완전히 다른 것처럼.
크르르르르르…….
검과 검을 마주한 채 아틸라가 으르렁댔다.
아틸라의 두 눈은 불거진 혈관으로 가득했고 동공마저 사라져 있었지만, 샤를은 상대의 눈에 담긴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살의.’
샤를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틸라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샤를의 얼굴은 평온했다.
어쩌면 가슴속의 감정이 쉬이 얼굴로 드러나지 않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넌 날 이길 수 없다. 아틸라.”
샤를의 안광에서 차가운 광채가 일었다.
전신에서 검은 오러가 폭발적으로 솟아났다.
‘끝을 내야 할 시간이다.’
사실 더욱 빨리 끝냈어야 했다.
샤를은 피핀과 금사자 기사단이 언데드들의 후퇴를 방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또한 샤를은 카르타고에게, 추격하는 적은 제압해도 좋다고 말했다.
이대로라면 카르타고가 그들을 제거할지 모른다.
‘피핀과 금사자 기사단을 죽게 해선 안 된다.’
아울러 조금 전 이곳에 도달한 키릴과, 그녀의 병력 또한 마찬가지로.
파캉!
샤를은 듀란달을 휘둘러 흑철검과 무휼을 동시에 튕겨 냈다.
아틸라는 기묘하게 팔을 꺾으며 반격을 꾀했다.
부드득, 뼈와 근육이 뒤틀리며 기괴한 소음을 발했다.
소름 끼치는 소음만큼이나 아틸라의 공격은 변칙적이고, 강했다.
샤를은 듀란달로 아틸라의 공격을 막았지만, 팔과 어깨에서 지독한 통증을 느꼈다.
아직 덜 아문 가슴 상처에서 재차 핏물이 쏟아졌다.
“아틸라……!”
샤를은 놀랐다.
아몬의 힘을 각성한 자신과 아틸라 사이엔 분명, 아틸라가 넘어서지 못할 격차가 있었다.
그런데 그 격차가 좁혀지고 있다.
샤를은 생각지도 못한 위기감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했다.
“너 역시도 숨겨진 힘을 각성 중인 것인가. 아틸라!”
샤를의 몸에서 변화가 일었다.
샤를은 자신의 심장을 둘러싼 마력이 더욱 단단하게 응집되는 것을 느꼈다.
그의 몸이 수많은 잔상을 퍼뜨리며 검광을 그렸다.
아틸라를 난도질했다.
파캉! 캉! 파앙! 콰드득……!
샤를의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뼈와 살이 분해되는 잔인한 소음이 그의 귀를 울렸다.
아틸라는 샤를의 폭풍 같은 검세를 막지 못했다.
흩어지는 핏물 속에서 그가 야수처럼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손에 쥔 두 자루 검을 놓지 않았다.
파지지짓……!
무휼의 형상이 변화했다.
사실 무휼은 많은 성력을 축적하지 못했다.
그러나 아틸라의 숨겨진 힘 때문인지, 혹은 환술 속이라는 특별한 배경 때문인지 무휼은 흑철검 못지않은 길이의 대검으로 모습을 바꿨다.
아틸라가 자세를 낮추며 전진했다.
날아드는 공격을 온몸으로 받으며, 샤를의 가슴에 무휼을 꽂았다.
콰드드득……!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는 버서커의 전투법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샤를은 채 아물지 못한 흉부에 다시 한번 무휼이 침입하는 것을 허용했다.
샤를의 입에서 제법 많은 피가 쏟아졌다.
중심을 잃고 비틀대는 샤를을 향해 아틸라가 흑철검을 뻗었다.
그 순간 샤를의 안광이 불처럼 타올랐다.
* * *
키릴은 멀지 않은 곳에서 발하는 엄청난 마력의 폭발을 감지했다.
오토에게 사정을 전해 들은 직후 벌어진 일이었고, 그 상황에 놀란 건 키릴만이 아니었다.
요롱이 위에 타고 있던 오토, 카스피, 슈시아, 바토리 모두가 두 눈을 부릅뜨며 폭발의 진원지를 돌아봤다.
요롱이의 등에서 뛰어내린 바토리가 키릴의 말에 올라탔다.
아무런 말도 없었건만 키릴은 고개를 끄덕였고, 폭발을 향해 말을 달렸다.
키릴이 성기사단에게 자리에 머물 것을 명령했기에, 나머지 성기사들은 키릴을 쫓지 않았다.
그 사이 오토는 크누트와 라쿠나를 찾아 움직였다.
그들은 각자 드워프 전사들과 청마탑 마법사들을 이끌며 언데드를 추격 중이었기에, 서둘러 막아야 했다.
그 와중에 피핀은 폭발을 향해 말을 달리고 있었다.
* * *
피핀은 무언가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샤를은 피핀을 포함한 단장급 기사들에게 데스나이트의 처리를 맡겼다.
그리고 자신은 카르타고와 일대일의 결투를 벌였다.
피핀은 샤를의 실력을 믿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피핀은 두려웠다.
카르타고는 이미 샤를을 제압한 적이 있는 전사다.
그러던 중 아틸라와 그의 동료들이 전선에 도착했고, 피핀은 조금이지만 안도감을 느꼈다.
동료 기사들과 함께 데스나이트를 상대하는 것에 집중했다.
이후 피핀은 샤를을 신경 쓰지 못했다.
주의를 분산한 채 싸울 수 있을 정도로 데스나이트는 만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게다가 피핀이 상대하는 자는 데스나이트 중에서도 상당한 강자라 여겨지는 알폰소 카스티야였다.
이후 허공을 뚫고 거대한 언데드 드래곤이 나타났다.
일순 전장의 열기가 차갑게 식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광경이었지만, 피핀은 임무에 충실했다.
샤를은 자신에게 데스나이트의 처리를 맡겼다.
나머지 금사자 기사단원들도 피핀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임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알폰소가 전투를 포기하고 후퇴했다.
알폰소만이 아니었다.
다른 데스나이트를 포함한, 주위의 모든 언데드들이 철수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피핀은 의아함을 느꼈다.
주변을 살피며 원인을 파악하려 애썼다.
그러던 중 피핀은 보았다.
저 멀리 언데드들의 머리 위에서 날개를 펄럭이는 아에스투스와, 그 위에 우뚝 선 카르타고의 존재를.
‘카르타고!’
피핀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카르타고가 저곳에 있다는 것은, 샤를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을 가능성을 의미한다.
덜미에 돋아나는 소름을 감각하며 피핀은 언데드 드래곤이 나타났던 방향을 돌아봤다.
드래곤의 머리 위로 두 개의 그림자가 보였다.
육안으로 식별할 수 있는 거리는 아니다.
그러나 피핀은 직감적으로 두 그림자 중 하나가 샤를일 거라 생각했다.
그렇다면 나머지 하나의 그림자는.
“금사자 기사단은 자리를 지켜라!”
그렇게 외친 피핀은 지체 없이 말을 달렸다.
언데드 드래곤이 조금씩 가까워졌다.
놈은 허공에 생성된 거대한 균열 사이에 앞발을 박고, 어떻게든 이쪽으로 빠져나오려는 모습이었다.
그러던 중 드래곤의 머리를 중심으로 가공할 폭발이 일었다.
피핀의 눈이 부릅떠졌다.
“샤를!”
샤를이 저곳에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피핀은 확신했다.
이유는 모른다.
다만 그의 본능이 그렇다고 외치고 있었다.
“피핀 대장군!”
키릴의 목소리였다.
피핀은 키릴을 돌아봤고, 키릴이 말머리를 붙이며 접근했다.
키릴의 뒤엔 바토리 에르제베트가 있었다.
바토리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어떻게 된 건가! 바토리 에르제베트!”
바토리는 최대한 간략하게 사정을 설명했다.
피핀의 눈에 부릅 힘이 들어갔다.
이어 말도 안 된다는 듯 중얼거렸다.
“샤를이……, 대악마의 현신이 되었다고……?”
“그렇다. 지금 카르타고가 언데드의 철수를 유도하는 것 또한 샤를의 명을 따른 것이다.”
“헛소리 지껄이지 마라 바토리!”
피핀의 두 눈동자는 불신과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 피핀을 차가운 얼굴로 응시하며 바토리가 말했다.
“네 눈으로 직접 확인하려무나.”
드라코리치가 있던 자리는 폭발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두 마리 군마가 그곳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바토리는 안력을 최대한 강화해 정면을 살폈다.
그러나 치솟는 마력의 소용돌이와 자욱한 연기 말고 보이는 것은 없었다.
그때였다.
퍼어어어엉!
폭발의 중심에서 가공할 풍압이 일었다.
그것이 바토리, 키릴, 피핀을 덮쳤다.
바토리는 순간적으로 마력의 장막을 발현했다.
키릴도 피핀과 더욱 근접하며 성스러운 오러를 펼쳤다.
파드드드드드……!
날아든 검은 폭풍이 바토리와 키릴의 마력과 부닥치며 거친 소음을 발했다.
두 마리 군마는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바토리는 보았다.
펄럭.
균열에서 완전히 몸을 빼낸 드라코리치가 유유히 허공에서 날갯짓하고 있었다.
녀석의 머리 위로 샤를이 보였다.
그는 한 손에 검을 늘어뜨린 채, 무심한 얼굴로 지상의 전장을 내려 보고 있었다.
“샤를!”
피핀이 소리쳤다.
어느새 폭발의 흔적은 사라졌다.
그래서 바토리, 키릴, 피핀은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드라코리치의 머리 위에서, 마치 유성처럼 핏물을 흩뿌리며 추락하는 익숙한 그림자를.
바토리의 두 눈에 핏발이 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