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5. 각성 (5)
콰앙! 샤를의 검이 아틸라를 뿌리쳤다.
그 엄청난 반동에 아틸라의 몸이 수 미터 뒤로 밀려났다.
샤를이 아틸라를 향해 검을 겨눴다.
“난 나의 힘을 이용해 크리엘도라 대륙에 영원한 평화를 가져올 것이다. 또한 대격변으로 인해 이 세계에 모습을 드러낼 새로운 적들을 모조리 물리칠 것이다.”
샤를의 입가가 확신에 찬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나 그 미소엔 이전에 샤를이 보여 주곤 했던 순수함이 담겨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샤를. 넌 영생을 살아가는 절대 군주가 되겠다는 건가.”
“내 핏줄에 담긴 대악마 아몬의 힘이 내게 알려 주었다.”
“무엇을 말인가.”
“인간은 악한 존재다.”
샤를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우리가 원하는 세상이 올 수 있을까?’
얼마 전 피핀이 했던 말이다.
또 피핀은 말했었다.
‘대격변 이후의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우리가 카르타고를 물리치고, 남부 대륙을 규합하고, 그것을 넘어 북부 제국까지 통일하면 전쟁이 없는 세상이 찾아올까?’
‘아니면 그건 그저, 다가올 진짜 대전쟁의 서막에 불과한 것일까.’
그 물음에 샤를은 답하지 못했다.
비수에라도 찔린 것처럼 가슴이 아파졌을 뿐이다.
샤를, 그 자신 또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리고 조금 전 카르타고와 검을 겨루었을 때.
카르타고는 말했다.
- 너의 꿈은 무르다. 현실성이 결여돼 있다. 만약 네가 남부의 모든 왕국을 통일한 뒤 북부 대제국을 향한 정복 전쟁마저 승리로 이끈다 해도, 이 세계에서 전쟁은 사라지지 않는다.
- 인간은 나약하다. 나약하기에 두려워하고, 두렵기에 숨겨진 악한 본성을 일깨운다.
- 인간은 전쟁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대격변은 중간계에 여러 세계의 겹침을 유발하는 재앙적 변혁이다. 만에 하나 네가 대륙을 통일해 인간의 전쟁을 종식시킨다 할지라도, 다른 세계에서 넘어온 존재들과의 싸움마저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샤를은 그 말에 공감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대격변은 어머니가 자신에게 부탁했던 꿈을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었다.
샤를은 자신의 내면을 관조했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 진정한 군대를 손에 넣을 수 없다면, 넌 너의 바람을 이룰 수 없다.
진정한 군대.
나의 바람.
- 샤를 아인하르트. 난 너의 미래를 봤다.
샤를은 흔들렸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의지는 지금껏 한 번도 그래본 적이 없을 정도로 중심을 잃었다.
그것을 붙잡아 준 것이 아틸라였다.
아틸라의 등장은 카르타고가 뒤흔든 샤를의 의지를 원점으로 되돌렸다.
그런 줄 알았다.
자신의 몸에 내재된 대악마의 힘이 환술 세계를 구성하기 전까지는.
환술 속에서 샤를은 어머니와 아버지를 만났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는 나의 바람을 이룰 수 있다.’
스스로 인간임을 포기한다면.
‘나는 온 대륙을 영원한 평화의 시대로 인도할 수 있다.’
영생을 살아가는 절대 군주가 된다면.
또한 불사의 존재인 언데드 군단을 이용한다면.
‘나에겐 힘이 있다.’
샤를이 눈을 떴다.
다시금 드러난 그의 안광은 보석처럼 찬란한 빛을 발했다.
그 모습이 너무도 눈부셔 아틸라가 눈을 찡그릴 정도로.
“……인간이 악하다고?”
“그렇다. 아틸라.”
“그래서 언데드 군단을 이용해 인간들의 왕국을 점령할 생각인가.”
“그것은 지금까지 내가 해 왔던 행동과 다르지 않은 일이다. 난 이전에도 나를 따르는 무리를 이용해 타국을 정복했다. 이젠 언데드 군단이 내게 이용될 뿐이다.”
“천만에. 그것은 완전히 다른 행동이다.”
“난 다른 점을 모르겠군. 아틸라.”
샤를의 눈이 먼 측면을 바라봤다.
그의 눈은 전장의 혼란 속에서 피핀과 금사자 기사단을 찾았다.
“난 이미 4개 왕국을 통합한 군주다. 거기에 카르타고가 통합한 5개 왕국이 합쳐졌지. 그렇게 난 남부의 13왕국 중 9개 왕국을 거머쥔 대군주가 되었다.”
“카르타고의 언데드 군단 위에 아인하르트 군(軍)의 힘을 합하겠다는 뜻인가.”
“그 때문에 언데드 군단의 철수를 명한 것이다. 아인하르트 왕국도, 카르타고의 언데드 군단도 내가 가진 힘의 일부이므로.”
“아인하르트의 기사와 병사들이 그것을 납득할 거라 생각하나? 그들은 지금까지 카르타고의 언데드 군단과 전쟁을 치렀다.”
“애초부터 아인하르트 왕국은 정복 전쟁으로 세워진 나라다. 아인하르트의 기사와 병사들, 심지어 백성들마저 서로에게 무기를 겨누던 사이였지. 그러나 이제 그들은 하나의 통합된 왕국의 군인이고, 백성이다.”
“……언데드는 인간이 아니다.”
“나 또한 인간이 아니지.”
샤를이 자조적인 웃음을 머금었다.
“피핀과 제롬, 그리고 금사자 기사단은 내 뜻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기사와 병사들 역시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지. 그들에게도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지금껏 두려움에 떨며 상대해 왔던 언데드들이 든든한 아군이 되는 것이니까.”
“샤를.”
“이번 전쟁을 종식시킨 뒤, 난 황제의 자리에 오를 것이다. 아인하르트 왕국은 제국으로 그 이름을 바꿀 것이다.”
샤를의 눈이 아틸라를 바라봤다.
“넌 어느 편에 설 것인가. 아틸라.”
아틸라는 줄곧 무표정했던 샤를의 얼굴에 아주 엷지만, 인간다운 표정이 드리운 것을 봤다.
“대답 여하에 따라, 난 지금 널 죽여야 할지도 모른다.”
아틸라가 피식 웃었다.
“날 죽이겠다고?”
“난 그러고 싶지 않다 아틸라. 이전부터 난 너와 함께 내 꿈을 향해 달리는 것을 기대했다. 게다가 지금의 난 확실하게 알았다. 너와 나의 몸 안엔 같은 피가 흐르고 있다.”
아틸라는 샤를의 말속에 담긴 의미를 읽었다.
아틸라는 사도 엘이 대악마 아몬과 동일한 존재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또한 사도 엘이 자신의 아버지일 가능성을 높게 내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샤를의 반응으로 미루어 그것은 사실이라 간주해도 무방했다.
그렇다면.
정말로 아틸라의 모든 추론이 사실이라면.
아틸라와 샤를은 ‘형제’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래서였던 건가.’
아틸라는 늘 샤를이 신경 쓰였다.
바토리 역시 그런 언급을 자주 했었다.
아틸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부정했지만, 결론은 바토리의 말이 맞았다.
아틸라는 샤를에게서 묘한 감정을 느꼈다.
그럴 때마다 아틸라는, 샤를이 자신의 내면을 투영한 소설 속 주인공이기 때문일 거라 내심 얼버무렸다.
그 생각 또한 거짓은 아니다.
그러나 그보다 확실한 이유가 있었다.
자신과 샤를에겐 대악마 아몬의 피가 흐르고 있다.
아버지의 피가 흐르고 있다.
‘또한, 그래서였던 건가.’
아틸라는 샤를이 발현한 환술 세계에서 자신만의 독립된 세계를 분리해 냈다.
아틸라가 대악마 아몬의 힘을, 혹은 그 이상으로 강한 힘을 지니고 있지 않은 다음에야 불가능한 일이다.
“나에게로 와라. 아틸라.”
샤를이 아틸라에게 겨눴던 검을 거두었다.
그러고는 왼손을 내밀었다.
“우린 함께할 수 있다.”
아틸라가 샤를에게 그랬듯, 샤를 또한 아틸라에게서 묘한 감정을 느꼈다.
처음엔 호승심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걸 샤를은 이미 오래전에 깨달았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야 샤를은 확신했다.
자신이 아틸라에게서 느낀 감정은.
오랜 친우인 피핀에게서도 느낄 수 없었던, 그 생소하고도 특별한 감정은…….
“거절한다.”
아틸라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허공을 울렸다.
샤를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러고는 잠시 후, 표정을 잃고 차가워졌다.
“그렇다면 아틸라. 넌 대륙을 통일하려는 나의 의지를 방해할 것인가.”
“아니.”
아틸라의 입가에 송곳니가 드러났다.
“바로 지금, 널 두들겨 패서 원래대로 되돌릴 생각이다.”
[ 돌진(突進) ]
아틸라의 신형이 샤를에게 쇄도했다.
서늘한 표정으로 검을 들며 샤를은 생각했다.
자신은 아틸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거부한 건 아틸라 쪽이다.
‘그래. 결국 넌 마지막까지 나의 대적자라는 건가.’
한편 아틸라는, 지금의 자신으로는 샤를을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샤를은 카르타고보다 강해졌다.
대악마 아몬의 힘을 완전히 각성한 그는 이제 신에 버금가는 존재가 됐다.
칼날 산맥의 의지를 거스르면서까지 드라코리치를 이곳으로 끌어낸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아틸라는 다시 한번 버서커의 권능을 발현하기로 했다.
연달아 두 차례 버서커가 되는 건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다.
그러나 아틸라는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아니 무의식중에 자신의 몸에 내재된 환술의 힘을 끌어낸 아틸라는, 지금이라면 가능하다고 확신했다.
그의 생각은 옳았다.
투트틋……, 투트트트틋……!
아틸라의 눈에서 검은자위가 사라졌다.
그 자리에 우툴두툴하게 혈관이 돋아났다.
멈춰가던 전신의 출혈이 재발했다.
분수처럼 사방으로 뻗쳤다.
콰앙!
아틸라의 흑철검과 샤를의 듀란달이 정면으로 맞부딪쳤다.
샤를은 버서커의 권능을 발현한 아틸라를 처음으로 마주했다.
샤를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아틸라의 힘에 놀랐기 때문이 아니다.
“아틸라. 넌 정말로……!”
전력으로 자신을 막으려 하는 아틸라에게 분노했기 때문이다.
쾅! 콰앙! 콰콰쾅!
두 전사의 검이 부닥칠 때마다 풍경이 변했다.
무한한 적색의 공간에서 황톳빛 대지로, 푸르른 들판으로, 별이 빛나는 밤하늘로, 주위 풍경은 끊임없이 제 모습을 바꿨다.
아틸라는 그 광경을 볼 수 없었다.
처음으로 연이어 광폭의 권능을 발현한 그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한계를 넘어섰다.
그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아틸라는 버서커가 됐다.
샤를의 의지를 되돌리려면, 아직 샤를에게 인간의 마음이 남아있는 지금을 놓쳐선 안 된다고 판단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샤를에게 남아있는 일말의 인간성에 기대기 위해, 아틸라는 인간성을 버렸다.
지금의 아틸라는 의식과 무의식을 오갈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는 무의식의 세계 속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으로 진입했다.
그동안 광폭의 권능을 발현하면서도 한 번도 도달하지 못한 영역.
그 낯선 영역에 의지가 매몰된 채, 아틸라는 오직 샤를만을 노려보며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샤를은 감각했다.
아틸라는 강하다.
언제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위태로워 보이지만, 그럼에도 아틸라는 샤를이 위협을 느낄 정도로 강력했다.
‘카르타고에게 밀리지 않는 실력이다.’
대악마 아몬의 힘을 흡수하며, 샤를은 카르타고의 힘을 가늠할 수 있었다.
버서커의 힘을 발현한 카르타고는 특히나 강력한 존재였다.
그런데 지금의 아틸라는 그런 카르타고와 비교해도 부족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샤를은 깨달았다.
강해진 건 자신만이 아니다.
‘아틸라도 강해졌다.’
카아앙!
숨 막히는 교전을 이어가던 중, 흑철검이 듀란달을 허공으로 밀쳤다.
아틸라는 저돌적으로 샤를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그대로 무휼을 샤를의 흉부에 꽂아 넣을 기세였다.
그 순간 관성을 무시하고 추락한 듀란달이 아틸라의 척추를 관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