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만든 세계 속 광전사가 되었다-323화 (323/425)

323. 각성 (3)

청마탑의 탑주 대리 라쿠나 야르비는 저 멀리 허공 위에 떠오른 드래곤의 머리를 보며 아연실색했다.

라쿠나는 저 드래곤의 정체가 드라코리치라는 것을 짐작했다.

아울러 균열 너머로 보이는 풍경이 칼날 산맥 한복판이라는 것도.

“라, 라쿠나 탑주 대리!”

청마탑의 마법사들이 불안한 얼굴로 외쳤다.

라쿠나를 포함한 마법사들은 방금 전까지 지독한 환술 세계에 빠져 있었다.

환술 속에선 무려 사망한 청마탑주 쿨리 야르비가 리치가 되어 수많은 언데드들과 함께 그들을 습격했다.

라쿠나와 청마탑 마법사들에겐 절대로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저것은…….’

라쿠나는 드라코리치 앞에 마주 선 검은 드래곤을 봤다.

그 드래곤이 아틸라의 동료인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라는 것을 알아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라쿠나는 드라코리치를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적은 드라코리치만이 아니다.

여전히 주변엔 수많은 언데드들이 아군을 공격하고 있다.

‘드라코리치는 아틸라 일행에게 맡긴다.’

라쿠나는 마법사들을 독려해 주위의 언데드군, 특히 남부에서 올라오는 언데드들을 섬멸하도록 지시했다.

남쪽의 언데드들에겐 특이점이 있었다.

심하게 훼손되긴 했지만, 그들의 복장은 남부 전선 연합군의 것이었다.

다른 마법사들도 그것을 알아봤다.

“남부 전선은 완전히 괴멸된 건가……!”

드라코리치의 등장과 별개로, 남쪽에서 밀려드는 언데드들은 청마탑 마법사들을 공포에 빠지도록 만들었다.

남부 전선 연합군은 강하다.

북부 전선과 달리, 키릴 크레센시아를 주축으로 움직이는 성 크레센시아 기사단은 언데드를 상대로 무시무시한 무력을 과시해 왔다.

적마탑 마법사들 또한 언데드의 천적에 가까웠다.

‘언데드를 섬멸하는 데 가장 효율적인 마법은 화속성 마법이다.’

그런데 그런 남부 전선이 무너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저 남부의 언데드들이 이곳, 중부 전선까지 밀려들었을 리 없으니까.

청마탑 마법사들은 금사자 기사단과 병사들의 도움을 받아 남쪽의 언데드를 공격했다.

언데드는 멈추지 않는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다행인 점은 데스나이트와 리치가 추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피핀 대장군과 금사자 기사단이 잘해 주고 있다.’

라쿠나는 그들의 존재 덕분에 일말의 안도감을 가질 수 있었다.

그간 샤를의 무력에 묻혀 있었지만, 피핀 역시 괴물 같은 실력의 기사였다.

그를 포함한 금사자의 단장급 기사들은 데스나이트를 상대로 조금도 밀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언데드의 숫자는 많았고, 무엇보다 드라코리치의 등장에 아군은 흔들렸다.

라쿠나는 안력을 높여 드라코리치를 봤다.

그러고는 경악했다.

드라코리치의 머리 위에 우뚝 선 저 그림자는.

‘설마……!’

그때였다.

퍼퍼퍼펑!

하늘 위에서 떨어진 거대한 불덩이가 언데드들의 후미를 덮쳤다.

강력한 화속성 마법.

청마탑 마법사들의 눈이 커졌다.

“적마탑이다! 적마탑의 마법사들이 살아 있었어!”

그뿐만이 아니었다.

두두두두두! 수많은 군마들의 말발굽 소리가 대지를 울렸다.

파캉! 파카카캉!

새하얀 성력을 머금은 아밍 소드가 언데드들의 목을 잘랐다.

아군들이 그것을 알아봤다.

“저것은 광명검(光明劍)……!”

“그렇다는 것은……!”

누군가 소리쳤다.

“성 크레센시아 기사단이다!”

“성기사단이 왔다아아아!

“돼, 됐어! 적마탑과 크레센시아 성기사단은 건재하다고!”

청마탑 마법사들마저 주먹을 부르쥐며 환호했다.

금사자 기사단과 더불어 연합군 최강의 무력 집단이라 불리는 성 크레센시아 기사단.

그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만으로 아군은 희망에 부풀었다.

그리고 그 희망은 성기사단의 선두를 달리는 금발의 기사를 본 순간 절정으로 치달았다.

“키릴 크레센시아!”

“샹크리스 최강의 성기사 키릴 크레센시아가 왔다!”

“남부 전선 총사령관이 전군을 이끌고 왔다아아아!”

“우와아아아아!”

독수리가 양각된 백금빛 아밍 소드에서 눈부신 신력이 뻗쳐 나왔다.

아밍 소드를 적에게 겨누며, 키릴이 외쳤다.

“크레센시아 성기사단! 진겨어어억!”

* * *

아틸라는 드라코리치의 머리 위에 선 샤를을 노려봤다.

샤를의 옆 허공엔 아에스투스가 제 위치를 유지하며 날개를 펄럭이고 있었다.

그 위에서 카르타고와 수블라는 마치 주군을 모시듯 샤를에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아틸라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벌어져선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샤를은 대악마의 마기를 완전히 받아들였다.

그동안 샤를의 몸 안엔 요정의 피와 악마의 피가 섞여 흐르고 있었다.

그중 우위를 점하고 있던 건 요정의 피였다.

샤를의 어머니, 아리아나 아인델은 샤를이 인간으로 살아가길 원했다.

샤를 또한 어머니의 바람대로 살아가길 원했다.

그래서 샤를은 지금껏 무의식적으로, 또 의식적으로 악마의 피를 억눌러 왔다.

그랬던 것이 완전히 변했다.

지금의 샤를은 주신 전쟁을 일으켰던 신들의 우두머리이자, 모든 악마 중 최강의 존재라 불리는 ‘대악마 아몬’의 현신(現身)이 됐다.

샤를의 푸른 눈이 아틸라를 바라봤다.

그리고 속삭였다.

“아틸라. 넌 누구지?”

기시감이 느껴지는 물음.

샤를은 이전에도 같은 물음을 한 적이 있었다.

스켈레톤 드레이크를 쓰러뜨리기 위해 칼날 산맥을 향하던 길.

그때 아틸라는 바토리, 오토, 카스피 외에도 키릴, 슈시아, 그리고 샤를과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샤를의 오른팔을 완전히 회복시키기 위해 시작된 그 여정 속에서, 아틸라는 샤를의 여러 면모를 봤다.

샤를은 아틸라 일행과 금세 친분을 쌓았다.

‘아, 아틸라! 샤를이 또 피식피식 웃고 있어!’

‘뭐가 그렇게 즐거운 건가요? 샤를.’

특히 카스피와 키릴이 샤를과 가까워졌다.

왕의 무게에서 벗어난 샤를은 밝고 쾌활한 청년이었다.

그는 진심으로 아틸라 일행과의 여정을 즐거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인지 야영을 할 때면 샤를은 직접 사냥감을 구해 오곤 했다.

그러던 중 한 번은 아틸라가 샤를과 동행을 요구했고, 둘은 함께 사냥감을 구하러 가던 중 마음속의 이야기를 나눴다.

그날 샤를은 물었었다.

‘아틸라. 넌 누구지?’

아틸라는 드라코리치를 봤다.

놈의 머리 위에 선 샤를을 봤다.

그때의 샤를과 지금의 샤를은 완전히 다른 존재처럼 보였다.

또한 그때의 질문과 지금의 질문이 의미하는 바가 다르다는 것을 아틸라는 알았다.

샤를이 다시 물었다.

“아틸라. 넌 내 아버지와 어떤 관련이 있는 건가.”

“……뭐라고?”

아틸라의 되물음에 샤를이 가늘게 눈을 좁혔다.

샤를은 자신의 몸에 내재된 악마의 힘이 마법진과 반응하며 거대한 공간 환술을 일궈 냈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그 환술의 일부를 아틸라가 갈취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아틸라는 자신만의 독립된 환술 세계를 구성했고, 그 안으로 카르타고를 데려갔다.

“넌 신비로운 존재다 아틸라. 넌 대악마 아몬의 힘에 맞서 독립된 환술 세계를 만들었다.”

아틸라는 샤를이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카르타고도 환술 속에서 비슷한 말을 했었다.

- 넌 환술 세계에 갇혀 있다. 하지만 놀랍군. 넌 어떻게 너만의 독립된 환술 세계를 분리해 날 가둘 수 있었던 것인가.

아틸라는 깨달았다.

조금 전, 자신과 카르타고는 샤를이 의도하지 않은 독립된 환술 세계로 진입했다.

샤를은 그것에 대해 의문을 드러내고 있었다.

“난 내가 발현한 환술을 통해, 나의 핏속에 담긴 기억을 읽었다.”

그 말대로 샤를은 대악마의 힘을 각성한 뒤, 자신의 숨겨진 기억을 읽었다.

그것은 아버지의 기억이자, 대악마 아몬의 기억이었다.

아몬은 주신에게 반기를 들었고, 주신 전쟁을 일으켰으며, 벌을 받았다.

아몬은 주신에게 정신을 파괴당했다.

정신적인 혼돈 속에서 아몬은 중간계를 떠돌았다.

그러던 어느 날 요정섬에 다다랐고, 운명의 여인을 만났다.

‘내 이름은 아리아나 아인델. 당신은 누구죠?’

그리고 샤를은 보았다.

어머니가 사랑했던 대악마.

바로 자신의 아버지를.

‘넌 이곳의 아이가 아니구나.’

아버지는 자신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고 샤를은 일어섰다.

물론 이것은 샤를에게 벌어졌던 진짜 기억은 아니다.

아버지의 기억이 알기 쉽게 변형돼, 샤를의 정신을 파고들었을 뿐.

샤를은 아버지의 생김새를 기억했다.

자신보다 훤칠하게 큰 키.

어깨너머로 길게 늘어진 흑발.

수려하게 빛나는, 그렇지만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검은 눈.

오뚝한 콧날 아래 송곳니를 드러낸 입술.

그때의 샤를은 몰랐다.

다만 그의 얼굴에서 익숙한 감정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했을 뿐.

하지만 환술 세계에서 벗어난 지금은 알 수 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사랑이었던, 대악마 아몬은.’

아틸라와 꼭 닮은 모습이었다.

“다시 묻겠다. 아틸라.”

샤를이 눈을 감았다.

다시금 눈을 뜬 그의 눈동자엔 칼날 같은 광채가 서려 있었다.

“넌 누구냐.”

“질문의 의미를 모르겠군. 샤를.”

“이전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넌 평범한 인간이라기엔 너무도 많은 것을 알고 있거든.”

“…….”

“대답하지 않을 셈인가.”

샤를의 눈빛이 아주 살짝 흔들렸다.

“아틸라. 너는.”

그렇게 말하던 샤를이 미간을 찌푸렸다.

발아래의 드라코리치가 무거운 비명을 질렀기 때문이다.

그그극……! 그그그그극……!

드라코리치가 두 앞발로 억지로 밀어 열던 균열.

그 균열이 조금씩 닫히고 있었다.

“완전한 마법진이 아니었던 건가.”

샤를의 눈이 카르타고와 수블라를 돌아봤다.

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렇게 된 것 또한 아틸라. 네가 방해했기 때문이겠지.”

샤를이 아틸라를 향해 희미하게 미소했다.

그러고는 말했다.

“언데드를 철수시켜라. 카르타고.”

고개 든 카르타고의 안광이 흔들렸다.

그의 눈엔 의문의 빛이 담겨 있었다.

샤를이 이어 말했다.

“단, 추격하는 적은 제압해도 좋다.”

복종을 표하는 것처럼, 카르타고가 고개를 숙였다.

수블라가 말했다.

“그렇지만 악마왕(惡魔王)이시여. 지금이야말로 저들을 일거에 섬멸할 기회…….”

“불복할 셈인가. 수블라.”

샤를이 수블라를 향해 팔을 뻗었다.

그의 손이 허공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수 미터는 떨어져 있던 수블라가 제 목을 쥐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꺽……! 크윽……! 꺼어억……!”

수블라의 두 발이 공중에 떠올랐다.

수블라는 언데드고, 숨을 쉬지 않아도 되는 존재다.

그러나 수블라는 마치 숨이 막히는 듯한 고통을 온몸으로 느꼈다.

수블라가 기겁한 얼굴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서야 샤를은 손아귀의 힘을 풀었고, 아에스투스의 등으로 떨어진 수블라는 꺽꺽대며 사지를 떨었다.

카르타고는 그런 수블라와 함께 아에스투스를 타고 전장 속으로 날아갔다.

멀어지는 카르타고를 내려 보던 샤를이 돌연 검을 뽑아 허공으로 뻗었다.

카앙!

금속성 소음이 날카롭게 공기를 울렸다.

샤를의 푸른 눈이 소음이 발한 곳을 노려봤다.

시커먼 마기를 흩뿌리는 그의 검 너머엔 드라칼리온과, 그것을 움켜쥔 채 날아든 아틸라의 일그러진 얼굴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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