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2. 각성 (2)
‘……어머니?’
샤를은 그제서야 어머니의 존재를 떠올렸다.
그러나 부연 유리 너머를 내다보는 것처럼 흐릿한 기억이었다.
샤를의 눈빛이 변했다.
‘가 보고 싶어.’
샤를의 의지는 그의 발아래 날개 달린 무언가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시원한 바람이 코끝을 스쳤다.
샤를의 긴 금발이 물결처럼 흔들리다 내려앉았다.
샤를은 요정섬의 푸른 들판 위에 서있었다.
‘아름다워.’
샤를은 감탄했다.
그는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본 적이 없었다.
그가 알던 세상은 오로지.
전쟁뿐이었으니까.
‘전쟁.’
전쟁을 떠올리자 샤를은 가슴이 아파지는 것을 느꼈다.
전쟁은 괴로웠다.
많은 사람이 죽었다.
또한 많은 사람이 죽지 않기 위해, 다른 사람을 죽였다.
‘전쟁은, 괴로워.’
샤를은 들풀이 사각대는 소리를 들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한 여인이 들판에 기대앉아 노래하고 있었다.
여인은 아름다웠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목소리 또한 그녀의 눈부신 외모와 어울리게 청량했다.
노래를 마친 여인이 샤를을 돌아봤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여인의 긴 금발을 그림처럼 나풀거리게 만들었다.
‘넌 누구니?’
여인이 물었다.
‘……샤를 아인하르트.’
샤를이 답했다.
‘샤를? 예쁜 얼굴과 잘 어울리는 예쁜 이름이네?’
여인이 웃었다.
샤를은 여인의 얼굴이 어딘가 낯익다는 생각을 했다.
‘난 아리아나. 아리아나 아인델.’
여인이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그러고는 작별 인사를 남기고 뒤돌아 달려갔다.
샤를은 아리아나와 헤어지는 것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아픔을 느꼈다.
그래서 아리아나를 쫓아 달렸다.
그러나 아무리 달려도 아리아나를 따라잡을 수 없었고, 머지않아 아리아나는 샤를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하악……. 하악…….’
샤를은 두 손을 무릎에 짚은 채 숨을 몰아쉬었다.
발 옆으로 흔들리던 들풀이 반짝이는 타일로 모습을 바꿨다.
고개를 들자 샤를은 화려한 궁전 한복판에 서 있었다.
축제라도 벌어진 것처럼 흥겨운 음악이 흘렀다.
많은 사람들이 연회장으로 나와 춤을 추었다.
서로의 손을 잡고 수줍게 얼굴을 붉히는 남녀.
흐뭇한 얼굴로 악기를 연주하는 악사.
신나게 떠들며 뛰어다니는 아이들.
‘아야!’
그중 한 소녀가 샤를과 부딪쳤다.
샤를은 생각보다 강한 힘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러나 샤를을 넘어지게 한 소녀는 이리저리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깔깔대며 어디론가 달려갔다.
소녀는 샤를을 보지 못하는 듯했다.
소녀뿐 아니라,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이 샤를을 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샤를의 눈앞에 손 하나가 펼쳐졌다.
‘괜찮니?’
샤를은 그 손을 잡았다.
부드러우면서도 커다란 손.
자리에서 일어선 샤를은 고개 들어 상대를 봤다.
이 자리의 많은 사람들과는 이질적인 외모를 지닌 사내가 거기 있었다.
훤칠하게 큰 키.
어깨너머로 내려오는 검은 머리칼.
수려하게 빛나는 검은 눈.
사내가 웃으며 말했다.
‘넌 이곳의 아이가 아니구나.’
샤를은 덜컥 겁이 났다.
사내의 말대로, 자신은 이곳의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면서 샤를은 사내의 얼굴에서 익숙한 감정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했다.
누구일까. 이 사내는.
‘샤를?’
낯익은 목소리에 샤를은 고개를 돌렸다.
아리아나가 다가오고 있었다.
샤를은 반가운 얼굴로 아리아나를 봤다.
왜인지는 몰랐지만 눈물마저 흘렀다.
‘오랜만이야 샤를.’
조금 전에 헤어졌을 뿐인데 아리아나는 그렇게 말했다.
그러고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 있었니? 왜 울고 있는 거야?’
샤를은 무어라 대답하려 했다.
그러자 손을 뻗으면 닿을 듯 가까운 곳에 있던 아리아나가 갑자기 멀게 느껴졌다.
아리아나는 검은 머리의 사내와 대화하고 있었다.
그녀는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다.
샤를의 존재는 까맣게 잊어버린 것처럼.
‘난, 잊혀진 걸까.’
샤를이 중얼거렸다.
샤를의 눈앞이 회전했다.
부연 잔상을 남기며 소용돌이치던 그것이 새로운 풍경을 일궜다.
샤를은 다시 공중을 날고 있었다.
이번엔 하늘 위가 아니었다.
아름답게 장식된 방 안을, 마치 공기가 된 것처럼 둥둥 떠다녔다.
그곳에서 샤를은 보았다.
아리아나가 갓난아기를 품에 안고 있었다.
‘아기?’
아기는 아리아나와 무척 닮았다.
아리아나는 그 아기를 소중히 품에 안은 채 누군가와 언쟁하고 있었다.
소리는 먹먹했다.
그래서 샤를은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방의 천장과 벽이 허물어졌다.
샤를은 다시 푸른 들판 위에 서 있었다.
아리아나를 처음 만났던 그곳에, 아리아나가 있었다.
‘아리아나.’
샤를은 아리아나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아리아나는 샤를을 보지 못하는 듯했다.
아리아나의 옆엔 검은 머리의 사내가 있었다.
아리아나는 사내의 품에 안겨 한참을 울었고, 사내는 슬픈 눈으로 샤를을 바라봤다.
아리아나가 흘린 눈물이 들판을 적셨다.
눈물이 어찌나 끝없이 흐르는지 들판엔 강물이 생겨났고 머지않아 홍수가 일었다.
콰콰콰콰! 무서운 소리를 내며 강물이 샤를을 집어삼켰다.
‘아리아나!’
샤를은 아리아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아리아나는 강물의 수면을 디디고 선 채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검은 머리의 사내는 샤를만을 바라봤다.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샤를은 두려웠다.
사내의 검은 눈동자에 삼켜질 것만 같았다.
샤를은 질끈 눈을 감았다.
그러자 온몸을 휘몰아치던 강물이 어디론가 증발하는 듯한 감각이 일었다.
샤를은 눈을 떴다.
눈앞엔 아리아나가 쓰러져 있었다.
아리아나는 죽었다.
인간의 손에.
‘인간이 어머니를 죽였어.’
샤를은 깨달았다.
어머니는 고귀한 혈통을 지닌 왕족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를 만나고, 샤를을 낳은 탓에 왕국에서 추방됐다.
‘어머니는 힘을 잃었다.’
그래서 보잘것없는 인간의 손에 죽임당했다.
아버지 때문에.
‘요정들 때문에.’
어머니의 시체가 모래알처럼 부서져 허공에 흩어졌다.
샤를은 폐허가 된 어느 마을 한복판에 서 있었다.
지저분한 옷을 입은 용병들이 마을을 약탈했다.
피를 뿜으며 쓰러지는 남자들.
비명을 지르는 여자들.
주저앉아 울부짖는 아이들.
‘시끄러워.’
샤를은 귀를 막았다.
하지만 소음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시끄러워.’
샤를은 귓속으로 검지를 넣었다.
그래도 소음은 줄지 않았다.
더욱 깊이 검지를 쑤셔 넣었다.
무언가 찢어지는 감각과 함께 소음이 멎었다.
샤를은 자신의 손을 내려 봤다.
검지를 타고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뚝. 뚝.
핏방울이 바닥에 고였다.
그것이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몸을 부풀렸다.
폭탄처럼 터져 올랐다.
그리고 샤를은 직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거친 소음을 들었다.
온몸이 갑갑하게 압박됐다.
전쟁 중에 죽은 수많은 원혼이 자신에게 들러붙는 것 같았다.
샤를은 원혼들을 뿌리쳤다.
그러나 그들은 끈질기게 샤를에게 달라붙었다.
아직 살아 있는 그를 시샘하는 듯했다.
‘날아올라.’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샤를은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지면이 거칠게 흔들리더니 샤를의 몸이 공중에 떠올랐다.
샤를은 이쪽을 올려다보며 절규하는 원혼들을 서늘한 눈으로 내려 봤다.
나직이 속삭였다.
‘잿더미로 만들어 버려.’
거대한 소음과 함께 샤를의 발밑으로 검은 불꽃이 몰아쳤다.
그것이 원혼들을 불태웠다.
마을을 약탈하는 용병들을 불태웠다.
이웃 영지와 전쟁을 벌이는 기사와 병사들을 불태웠다.
카르타고의 언데드 군단을 불태웠다.
* * *
키랴랴랴랴랴랴랴!
파충류의 거친 포효가 천지를 울렸다.
그것이 공간 환술을 유리처럼 깨뜨렸다.
카르타고와 격전을 벌이던 아틸라.
수블라에게 마법을 몰아치던 바토리.
중앙 마탑의 리치들을 기습하던 카스피.
요롱이의 등에 올라탄 채 아에스투스에게 마력의 화살비를 쏘아 내던 슈시아.
그밖에 샤를의 공간 환술에 빠져 있던 모든 이들이 환술 세계에서 벗어났다.
이어 그들이 본 것은 믿지 못할 광경이었다.
“저, 저게 무슨……!”
하늘 위로 균열이 보였다.
백 명의 인간이 동시에 뛰어들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균열.
균열 너머로 보이는 건 장대한 하얀 산맥과, 그곳에서 불어오는 거친 설한풍이었다.
눈보라는 균열 너머에서 그치지 않고 안으로 들이쳤다.
순식간에 공기가 얼어붙고, 눈발이 휘날렸다.
말도 안 되는 이상 현상이었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그것을 주목하지 않았다.
그보다 놀라운 단 하나의 사건이 그들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크르르르르르……!
균열을 뚫고 등장한 드래곤의 거대한 머리가 이쪽을 굽어보고 있었다.
그 드래곤은 아에스투스와 달랐다.
성체가 된 도롱뇽과도 달랐다.
시커먼 뼈로 만들어진 드래곤.
아틸라가 중얼거렸다.
“……드라코리치.”
그랬다.
눈앞에 등장한 건 칼날 산맥 상단부 우두머리 중 하나이자.
모든 언데드를 통틀어 최상위 포식자라 불리는 드라코리치였다.
드라코리치가 균열의 틈새로 앞발을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마치 창을 열듯, 균열을 잡아 벌리기 시작했다.
우지직……! 우지지지직……!
드라코리치가 내뿜는 피어(Fear)가 주변의 모든 것을 경직시켰다.
오토, 카스피, 심지어 슈시아마저 그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슈시아는 자그만 벌레들이 온몸을 기어 다니는 감촉을 느꼈다.
벌레들은 슈시아의 몸에 있는 모든 구멍을 타고 들어가 머릿속으로 진입했다.
‘이, 이게…… 무슨……!’
다행히도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일행에겐 드라코리치의 피어를 무력화할 수 있는 도롱뇽이 있다.
슈시아는 머릿속을 침입한 벌레들이 깨끗이 증발하는 것을 감각했다.
펄럭.
하늘에서 내려온 아에스투스가 카르타고와 수블라를 등에 태웠다.
아틸라도 도롱뇽의 등에 올라탔다.
바토리와 카스피, 펀치가 함께였다.
“야만전사야.”
“아틸라!”
끼아옹!
아틸라는 도롱뇽에게 의지를 전달해 드라코리치를 향해 날아올랐다.
환술은 깨졌다.
그 영향으로 아틸라도 광폭의 권능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균열과 함께 드라코리치가 나타났다.
한발 앞서 날아가는 아에스투스를 보며, 아틸라는 얼마 전 카르타고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 난 좌표를 원했고, 목적을 이뤘다.
아틸라는 기억했다.
카르타고는 칼날 산맥을 찾은 일이 있었고, 드라코리치를 맞닥뜨렸다.
카르타고의 목적은 드라코리치를 쓰러뜨리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드라코리치의 둥지 안 허공에 균열을 일으키고, 그것을 이용해 자리를 벗어났을 뿐이다.
아틸라는 카르타고가 말했던 ‘좌표’가 무엇을 의미했던 것인지 깨달았다.
‘카르타고는 이곳의 마법진과 드라코리치의 둥지를 잇는 통로를 만들고 싶었던 거다.’
즉, 지난번의 카르타고는 그것을 위한 좌표를 생성하기 위해 칼날 산맥을 향했고, 목적을 이뤘다.
바토리와 도롱뇽도 아틸라와 같은 생각을 했다.
카스피만이 기겁한 얼굴로 빼액빼액 소리쳤다.
“흐에엣!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저거 드라코리치잖아아아!”
아틸라는 드라코리치의 머리 위에 올라선 그림자를 노려봤다.
그림자의 몸에선 카르타고마저 압도할 정도의 마기가 폭풍처럼 솟아오르고 있었다.
아에스투스가 그림자 옆에서 상승을 멈췄고, 카르타고와 수블라가 그림자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아틸라는 이를 악물었다.
절대로 벌어져선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림자의 푸른 눈이 아틸라를 내려 봤다.
그가 속삭였다.
“아틸라. 넌 누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