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만든 세계 속 광전사가 되었다-321화 (321/425)

321. 각성 (1)

바토리의 발끝이 사뿐, 도롱뇽의 척추에 안착했다.

바토리를 발견한 펀치가 우어어! 환성을 지르며 바토리를 껴안았다.

“꽉 잡아라 곰탱이 새끼. 이제 곧 이몸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내려갈 테니까.”

목적을 달성한 도롱뇽이 말 그대로 무서운 속도로 하강했다.

그러고는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도롱뇽은 자신이 있었다.

카르타고가 아무리 강력하다 해도 성체가 된 자신과 펀치, 아틸라, 거기에 더해 바토리마저 가세한다면 결코 살아남을 수 없다.

도롱뇽의 눈이 저만치 널브러진 샤를을 흘끗 바라봤다.

‘뭐, 금사자 미물 새끼는 아직 정신 못 차리는 것 같지만.’

그런 도롱뇽의 등 위에서 바토리는 카르타고가 온몸으로 발산하는 붉은 오러를 봤다.

그것은 그녀에겐 낯익은 것이었다.

버서커 카르타고.

혹은 광전사 카르타고.

바토리와 리베르가 아틸라 이전에 관조했던 단 한 명의 전사.

‘카르타고. 넌 원래도 강했지만, 지금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구나.’

바토리는 버서커의 힘을 발현한 카르타고를 보며 여러 감정을 느꼈다.

만약 파우스트가 카르타고를 죽이지 않았다면, 그녀의 현재는 지금과 완전히 다른 것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어쩌면 인간의 삶을 살다 이미 오래전에 명을 달리했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라면.

‘처음부터 모든 건 이리 될 운명이었을지도.’

바토리의 눈동자가 엷게 흔들렸다.

카르타고는 자신에게 달려오는 아틸라를 보고 있었다.

이어 저만치 쓰러져 움직이지 못하는 샤를을 봤고, 마지막으로 하늘 위에서 하강하는 도롱뇽, 펀치, 바토리를 봤다.

카르타고가 바토리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 상태로 머리 위로 오른손을 들었다.

그의 오른팔은 어느새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화륵.

카르타고의 손끝에서 불길한 검은 기운이 피어올랐다.

바토리와 도롱뇽은 그것에서 강한 위험을 느꼈다.

“바토리 할망구!”

“그대로 가거라! 아틸라를 지켜야 한다!”

화르르르륵!

카르타고를 중심으로 원이 그려졌다.

한두 개가 아니었다.

마치 나무의 동심원처럼, 수많은 원이 저마다의 간격을 두고 사방으로 뻗쳤다.

그제서야 바토리는 상황을 깨달았다.

‘……룬 문자 마법진.’

카르타고는 이곳에 거대한 마법진을 펼치려 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할망구! 카르타고가 마법진이라니!”

도롱뇽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소리쳤다.

카르타고는 마법사가 아니다.

물론 데스나이트가 되며 상당한 마력(마기)을 획득했지만, 저 정도의 거대한 마법진을 일구는 것은 불가능하다.

분명 뛰어난 마법사의 도움이 있었을 것이다.

바토리도 도롱뇽과 같은 생각을 했다.

이 마법진은 치밀하게 준비됐다.

한두 명 정도가 아닌, 상당한 규모의 마법사들이 이 마법진을 위해 힘을 합쳤다.

바토리의 덜미에 소름이 돋아났다.

두 눈에 부릅 힘이 들어갔다.

“중앙 마탑의…… 마법사……!”

깨달음과 동시에 마법진 위로 검은 로브의 마법사들이 등장했다.

마치 지면을 뚫고 솟아오른 것처럼 등장한 그들이 동시에 주문을 외웠다.

마법진이 더욱 강렬하게 빛났다.

룬 문자가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꿈틀대기 시작했다.

카르타고의 옆에서도 마법사 하나가 솟아올랐다.

머리 위의 후드를 젖히자 바토리를 닮은 긴 머리에, 뱀을 닮은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얼마 전에 뵙고 다시 뵙는군요. 바토리 에르제베트.”

바토리를 향해 미소하는 수블라는 수십 년은 젊어진 외모를 하고 있었다.

바토리가 왼팔의 마력을 개방했다.

도롱뇽도 아가리를 벌려 브레스를 발현하려 했다.

그 순간 마법진에서 뿜어진 광채가 온 시야를 잠식했다.

* * *

카르타고를 향해 달리던 아틸라는 주변이 끝도 없는 적색 공간으로 변한 것을 감각했다.

직전까지 주위를 채웠던 모든 것이 사라졌다.

핏물 자욱한 지면도.

끊임없이 주변을 울리던 병사들의 비명도.

하늘 위에서 울부짖는 아에스투스의 포효도.

그럼에도 변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다.

그 변치 않은 유일(唯一)을 보며 아틸라는 웃었다.

카르타고였다.

화르륵!

카르타고의 검에서 오러가 쏘아졌다.

아틸라를 향해 똑바로 직진했다.

아틸라는 카르타고에게 달리는 것을 유지하며 드라칼리온을 뻗었다.

심장을 타고 흐르던 마력이 드라칼리온에 응집됐고, 검신을 넘어 정면으로 방출했다.

카르타고의 오러와 부닥쳤다.

콰콰콰쾅!

오러와 오러, 혹은 검기와 검기와 부닥치며 천둥 같은 소음을 발했다.

그러나 무한의 적색 공간은 그 울림을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였고, 이내 먹먹한 잔향만이 남았다.

어느새 아틸라와 카르타고는 서로의 체취가 느껴질 정도로 근접했다.

두 전사의 검이 거칠게 몸을 섞었다.

우툴두툴 혈관이 드러난 두 눈과, 검붉은 투구 속에서 핏빛 광채만을 내뿜는 두 눈이 서로를 노려봤다.

- 버서커 아틸라.

버서커의 힘을 발현한 이후 처음으로 카르타고가 입을 열었다.

그의 음성은 버서커가 되기 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 넌 환술 세계에 갇혀 있다. 하지만 놀랍군. 넌 어떻게 너만의 독립된 환술 세계를 분리해 날 가둘 수 있었던 것인가.

“……뭐라고?”

그렇게 물으며 아틸라는 사뭇 놀랐다.

눈을 굴려 자신의 몸을 훑었다.

여전히 온몸에선 피가 치솟고 있다.

모든 것을 파괴하려는 욕구가 활화산처럼 전신을 달구고 있다.

불거진 혈관 너머로 보이는 주변은 한없이 붉었다.

자신이 광폭의 권능에 휩싸여 있다는 확실한 증거.

그럼에도 아틸라는 카르타고의 목소리를 선명하게 들었고, 이렇게 대화까지 시도할 수 있었다.

- 지금의 상황이 의문스럽겠지. 네가 버서커의 힘을 발현한 와중에도 평소와 유사한 이성을 유지할 수 있는 건 둥지의 힘 때문이다.

“둥지?”

- 나와 수블라, 그리고 리치가 된 중앙 마탑의 마법사들은 이곳에 마법진을 안배해 두었다. 다시 말해 넌 룬 문자 마법진의 둥지가 될 장소 위에서 나와 맞붙은 것이다.

주위 풍경이 변하기 시작했다.

모래를 머금은 바람이 불어왔다.

말발굽 소리와 금속성의 소음, 처절한 비명이 들렸다.

아틸라는 어느새 전장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기사와 병사들의 복장이 독특했다.

마치 현재가 아닌, 아주 먼 과거의 전쟁 상황을 엿보는 기분이었다.

- 그리운 전장이로군.

카르타고의 목소리가 아틸라의 상념을 깨웠다.

아틸라는 힘차게 카르타고의 검을 밀어낸 뒤 기습적인 공격을 가했다.

카르타고가 흔들림 없이 그 공격을 막았다.

“재미있군. 네 말대로라면 마법진의 둥지가 버서커의 힘을 억누를 정도로 대단하단 말인가.”

- 넌 착각을 하고 있다. 버서커의 힘은 억눌린 것이 아니다. 마법진은 네가 속한 무의식의 세계를 비집고 들어갈 실낱같은 틈을 만들었고, 그 틈을 통해 너의 이성을 짧은 시간 되돌렸을 뿐이다.

“다른 동료들은 어떻게 된 건가.”

- 바토리 에르제베트와 드라콘 이스메니오스, 신수 그리즐리는 다른 환술의 세계로 빨려 들어갔다. 나바라의 왕과 서리나무의 왕 또한 마찬가지다. 그들뿐 아니라 근처에 있던 수많은 이들이 환술 세계에 빠져들었다.

“그렇다면 샤를도.”

그 말에 카르타고의 안광이 춤추듯 일렁거렸다.

- 샤를 아인하르트는 자신만의 환술 세계로 진입했다.

“샤를을 어쩔 셈이지? 카르타고.”

- 너 또한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샤를 아인하르트는 인간이 아니다. 그는 마땅히 돌아가야 할 존재로 되돌아갈 뿐이다.

“녀석을 대악마의 현신(現身)으로 만들 셈인가.”

아틸라의 눈빛이 사납게 변했다.

“결코 네놈의 생각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아틸라는 알고 있었다.

원작에서도 샤를은 몇 번이고 악마의 힘에 굴복할 위기를 맞이한다.

그러나 샤를은 결국 악마의 힘에 굴복하지 않았다.

아틸라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샤를은 이 세계의 주인공이다.”

카르타고의 투구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아틸라는 카르타고가 웃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 역시 너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네 말대로 샤를 아인하르트는 이 세계의 주인이다. 다만 인간의 껍질 속에 숨어 있기에 자신의 운명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을 뿐.

“고작 환술 따위로 녀석의 의지를 무너뜨릴 수 있을 것 같은가.”

아틸라는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드라칼리온에서 폭풍 같은 검기가 솟아났다.

그것이 카르타고를 습격했고, 카르타고는 처음으로 아틸라의 공격에 뒤로 밀려났다.

그 사실을 흥미롭다고 생각하며 카르타고가 말했다.

- 넌 중대한 착각을 하고 있다. 버서커 아틸라.

“착각이라고?”

- 난 ‘벨리알의 눈’을 지니고 있다. 아울러 리치가 된 수블라 템페스타와 중앙 마탑의 마법사들은 인간 중에선 적수를 찾을 수 없는 강자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들은 이 정도까지 정교한 환술 세계를 구성할 수 없다.

카르타고의 말은 사실이었다.

다른 마법과 달리, 이런 류의 공간 환술은 아무나 시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최강의 관조자라 불리던 바토리도 메피스토펠레스와 대악마 아몬의 고서를 만나기 전까진 제대로 된 환술을 구사하지 못했다.

- 환술이란 본래 악마 중에서도 빼어난 힘을 지닌 존재들만이 발현 가능한 신기. 인간 마법사 중 극소수가 구사하는 것은 말 그대로 어설픈 흉내 내기에 불과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카르타고.”

- 우린 공간 환술이 펼쳐질 장소와 작은 불씨 하나만을 제공했다는 뜻이다. 실제로 그 자그만 불씨를 폭발적으로 키워 환술 세계를 구현한 존재는 따로 있다는 말이지.

두근, 아틸라의 심장이 뛰었다.

아틸라는 카르타고의 말에서 하나의 가능성을 도출했다.

- 이제야 깨달았는가. 버서커 아틸라.

카르타고의 안광이 불꽃처럼 타올랐다.

- 대악마 아몬의 핏줄, 샤를 아인하르트가 이 환술 세계를 구성했다.

* * *

샤를은 푸른 하늘을 날고 있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조금 전까지의 자신은 몸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부상당한 상태였고, 그보다 전엔 카르타고와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아틸라와 함께.

‘……아틸라?’

아틸라가 누구였더라, 샤를은 생각했다.

그러자 직전까지 누구와 검을 겨루고 있었는지도 잊어버렸다.

그것만이 아니다.

샤를은 자신의 모든 과거를 잊었다.

‘뭐, 상관없지.’

샤를은 오랜만에 상쾌한 기분을 느꼈다.

기억이 사라졌기에, 정말로 이런 기분을 오랜만에 느껴 보는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샤를은 익숙하게 날았다.

아니 자신이 날고 있다기보다는, 날개를 지닌 거대한 무언가의 등 위에 서 있다는 느낌에 가까웠다.

샤를은 허리를 굽혀 발밑을 더듬었다.

그의 손은 마치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작아져 있었다.

그리고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차갑고 단단한 것이 만져졌다.

‘뭐지? 이건.’

궁금증이 일었지만 샤를은 금세 잊었다.

저만치 눈앞에 거대한 공중섬이 떠올라 있었기 때문이다.

‘저것은…….’

눈으로 본 것은 처음이지만, 샤를은 저 섬의 정체를 직감했다.

어머니가 종종 이야기하던 신비의 성역.

요정들의 섬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