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 예언과 운명 (3)
신과 악마의 모습을 자유로이 오갈 수 있는 존재.
스스로 생각하고도 믿기 힘든 가설이다.
그러나 오늘 만난 오르피나는 그런 존재일 가능성이 있었다.
‘오르피나는 사도였다.’
아틸라는 생각했다.
어쩌면 애초부터 사도란, 그런 능력을 지닌 존재들로 구성된 집단은 아니었을까.
한편 바토리는 아틸라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은 실타래가 마구 뒤엉킨 것처럼 복잡했다.
‘오르피나는 미래를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사르데니야 왕국이 드라콘 이스메니오스에게 멸망할 미래 또한 알고 있었다는 것인가.
바토리는 자신에게 왼팔을 빼앗긴 오르피나가 자조적인 음성으로 중얼대던 것을 떠올렸다.
‘넌 돌이킬 수 없는 금기를 저질렀다.’
‘그러나 나 또한 이리 될 줄 알고 있었으니.’
분명했다.
오르피나는 바토리가 자신의 왼팔을 갈취할 것이라는 미래를 알고 있었다.
‘허나 그것이 드라콘 이스메니오스가 사르데니야 왕국을 멸망시킬 미래까지 알고 있었다는 근거는 되지 않는다.’
바토리의 생각은 다른 것으로 넘어갔다.
언젠가부터 바토리는, 이 세계가 예정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만 같은 필연적인 감각을 느꼈었다.
‘이 세계를 움직이는 거대한 의지.’
바토리는 사르데니야 왕국을 멸망시킨 드라콘 이스메니오스가, 누군가에게 정신 지배를 당한 상태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울러 그녀가 복수를 위해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를 찾았을 때, 그것을 예지한 어느 절대적 존재가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를 보기 좋게 속박해 두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그렇게 도롱뇽을 정신 지배하고, 속박한 존재가 동일한 자라는 것 역시도.
‘무시무시한 놈이었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 같지만, 온몸에서 엄청난 마기를 뿜어 대는 통에 제대로 쳐다볼 수조차 없었지.’
‘놈이 날 속박하고 약화시켰다. 그리고 머지않아 바토리 에르제베트를 포함한 관조자들이 날 찾아올 거라 말했지.’
바토리는 얼마 전에 했던 생각을 반추했다.
사르데니야 왕국이 멸망하던 날, 기다렸다는 듯 등장한 오르피나.
‘심지어 오르피나는 내게 왼팔을 갈취당할 미래를 알고 있었다.’
사르데니야 왕국을 찾은 엘과 아자젤.
두 사도는 바토리의 부친인 사르데니야 국왕과 긴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은 무슨 이야기를 나눈 것일까.
또한 그 자리엔 두 사도와 부친 외에 어떤 존재가 함께 있었을까.
바토리는 떠오르는 인물을 하나둘 머리에 그렸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얼마 전 드라코리치를 만난 이후, 도롱뇽이 했던 말을.
‘난 대악마 아몬의 힘에 잠식돼 오랜 시간 제정신이 아니었다. 내가 기억하는 건 아버지가 고대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어느 고대인의 왕국에서 제법 높은 위치에 있었다는 것.’
바토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도롱뇽의 아버지는 신이었다.
그렇다면 혹시, 도롱뇽의 아버지가 머물렀다는 고대인의 왕국이 사르데니야는 아니었을까.
‘아울러 왕국에서 제법 높은 위치에 있는 인물이라면…….’
달칵, 톱니바퀴가 맞물리는 느낌이 들었다.
조금 전 오르피나가 했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 버서커 카르타고는 알테라의 운명을 위해 안배된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예정된 미래의 일부를 알고 있습니다.
혜성처럼 등장한 불세출의 전사 카르타고.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버서커의 힘.
갑작스러운 카르타고의 죽음.
그러고는 먼 훗날, 카르타고와 동류의 힘을 가지고 등장한 아틸라.
바토리는 기억했다.
수없이 많은 관조의 세월 속에서, 버서커의 힘을 가진 이는 오직 카르타고와 아틸라뿐이다.
‘카르타고는 알테라(아틸라)의 운명을 위해 안배된 존재.’
또한 오르피나는 이렇게도 말했다.
- 카르타고가 지닌 버서커의 힘은 그대의 것과 다릅니다. 카르타고는 광폭의 그림자만을 운용하고 있을 뿐. 그림자는 결코 진짜가 될 수 없습니다.
바토리는 아틸라에게서 카르타고의 모습을 봤다.
그래서 그녀는 내심 아틸라가 카르타고의 무언갈 이어받은 전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오르피나의 말에 의하면 그 생각은 잘못됐다.
‘아틸라가 카르타고의 그림자가 아니라, 카르타고가 아틸라의 그림자였다.’
달칵, 톱니바퀴가 더욱 단단히 맞물렸다.
바토리는 이 모든 상황에서 우연을 가장한 필연(必然)의 힘을 느꼈다.
“뭐, 뭔가 보이는 것 같소!”
오토의 외침이 바토리를 생각에서 깨웠다.
바토리는 잡기술로 안력을 높였다.
그리고 오토가 말한 ‘뭔가’가 서리나무 엘프들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귀안을 발현한 카스피도 같은 광경을 봤다.
아틸라 역시 상황을 짐작했다.
펄럭.
요롱이가 허공에 멈춰 서며 날개를 휘둘렀다.
일행은 피투성이가 된 지면 위에서 놀라운 눈을 뜬 엘프들을 내려 봤다.
그중엔 익숙한 얼굴들이 여럿 보였다.
엘프들도 일행을 알아보고는 손을 흔들며 무어라 소리를 질렀다.
요롱이가 천천히 하강해 지면에 착지했다.
각양각색의 표정을 한 엘프들이 달려왔다.
몇몇은 요롱이를 보고 겁을 먹었는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기도 했다.
그 와중에 가장 앞장서 달려온 여자 엘프가 아틸라를 보며 여러 감정이 교차하는 미소를 지었다.
아틸라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얼굴 한번 보기 힘들군. 슈시아.”
* * *
툿투투퉁!
새하얀 빛의 내는 마력의 화살들이 허공을 날았다.
창공을 장엄하게 수놓던 빛의 화살들은 하늘 최고점에 이른 뒤 동시에 낙하를 시작했다.
그러고는 언데드들을 덮쳤다.
퍼퍼퍼퍼펑!
마력 화살에 적중된 언데드들이 짚더미처럼 바닥을 굴렀다.
그중 대부분의 언데드는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마력 화살에 내재된 ‘생명의 힘’이, 언데드의 동력인 ‘죽음의 힘’을 완전히 파괴했기 때문이다.
“발키리의 마력 화살이 언데드의 수복력을 무효화하고 있다!”
“우오오오오오!”
남부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가장 큰 이유라면 역시, 뒤늦게 연합군에 참여한 엘프 군대가 언데드를 상대로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전보다 더욱 빠르고, 강해진 서리나무의 발키리들은 언데드 퇴치에 최적화된 부대였다.
그것만이 아니다.
비록 그 수가 많진 않았지만, 달빛우물숲에서도 발키리의 힘을 발현한 엘프들이 등장했다.
“달빛우물숲의 발키리들이여!”
“우리들은 위대한 일리시아 세이나자르의 후손이다!”
“우와아아아!”
달빛우물 발키리는 서리나무 발키리에 비하면 많은 것이 미흡했지만, 그들의 마음속엔 위대한 선조 ‘일리시아 세이나자르’가 있었다.
그 사실이 달빛우물 발키리들을 고취시켰다.
또한 그들은 서리나무 발키리들에 못지않은 뛰어난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다.
“달려라! 검을 휘둘러라! 우리의 뒤엔 발키리 부대가 있다!”
기사들이 소리쳤고, 병사들이 화답했다.
그들은 전선에 투입된 발키리들을 보며 전의를 불태웠다.
이곳은 북부 전선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장소였다.
엘프군은 상대적으로 전력이 취약한 북부 전선에 주로 배치됐다.
“검을 들어라! 베고 또 베어라! 상대가 완전히 움직임을 멈출 때까지 멈추지 마라!”
언데드의 머리를 깨부수며 로잘린이 외쳤다.
오토마이어 왕과 아틸라가 엘프들을 규합해 데려왔지만, 북부 전선 총사령관은 여전히 로잘린이었다.
오토마이어를 포함한 아틸라의 동료들이 모두 중부 전선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로잘린의 곁에 있던 아론, 로버트, 던컨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거리며 말했다.
“거 보십시오 총사령관. 총사령관께서도 대장……, 아니 국왕 폐하를 막지 못하시지 않았습니까.”
“맞습니다. 그렇게 도끼눈을 뜨고 우릴 노려보실 땐 언제고.”
“으하하하하! 그 서릿발 같던 로잘린 란틴크 경도 이제 나이가 드시더니 예전 같지 않은…… 크에엑!”
로잘린에게 옆구리를 걷어차인 던컨이 비명을 질렀다.
그 모습에 아론과 로버트가 배를 잡으며 웃었다.
그러나 그러는 와중에도 다음번은 자신들의 차례가 될까 봐 서둘러 몸을 사리는 모습을 보였다.
“정신 똑바로 차려! 적이다!”
로잘린의 외침에 세 기사의 눈빛이 변했다.
동시에 검을 휘둘러 언데드의 목을 베었다.
그들의 검술은 이번 전쟁을 계기로 더욱 첨예하게 다듬어졌다.
세 기사도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으하하하하! 이거 이러다 전쟁 끝나면 아틸라 님만큼 강해지는 거 아니냐 우리!”
“에라이 꿈도 야무진 새끼. 아틸라 님은 우리가 평생 검을 수련해도 발치에도 못 따라갈 거다!”
“그럼 오토 대장만큼은 어때! 그 정도는 어찌어찌 가능할 것도 같은데!”
“미친놈아! 지난번 대장의 그 현란한 칼놀림을 보고도 그런 소리를 하냐! 이젠 오토 대장도 인간을 넘어선 괴물이라고!”
“그럼 할 수 없지! 우린 로잘린 란틴크 총사령관의 무력을 따라잡는 정도로 만족해 볼까!”
“그 정도라면 충분히 가능하지!”
“암암 그렇고말고! 으하하하하하!”
세 기사의 능청스러운 대화에 로잘린을 부글부글 속을 끓였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로잘린은 자신에게 혹독하게 훈련받은 어린 세 견습기사가 어느새, 자신의 실력을 뛰어넘으려 할 정도로 성장했다는 것에 자부심과 보람을 느꼈다.
씨익 입가를 올리며 외쳤다.
“닥치고 검이나 휘둘러라 애송이들! 가장 적게 벤 놈에겐 저녁밥 없다!”
세 기사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로잘린이 견습기사 시절의 자신들을 지도할 때 쓰던 말투였던 것이다.
“아아니 애송이라니, 언제 적 호칭을 쓰시는 거요!”
“맞소! 우리 나이가 벌써 마흔을 훌쩍 넘었소!”
“그러고 보니 우리, 총사령관과 별로 나이 차이도 나지 않는 거 같은데?”
“이참에 그냥 누님이라 부르는 것은 어떨까!”
“로잘린 누님이라! 그거 좋지! 으하하하!”
“언데드가 아니라 내 손에 뒈지고 싶은 거라면 부디 그렇게 불러 보도록.”
“히이이이익!”
* * *
한편 그 시각, 아틸라 일행은 요롱이를 타고 중부 전선을 향하고 있었다.
아틸라의 참전 소식을 들은 샤를이 급히 그들을 불렀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틸라는 정식으로 연합군에 소속된 것이 아니었기에, 샤를의 명령을 따를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아틸라는 궁금했다.
샤를은 결국, 중앙 마탑을 사수하지 못했다.
아틸라는 오른팔을 완전히 회복해, 어쩌면 자신 이상의 힘을 지녔을 샤를이 사실상 전투에서 패배했다는 것에 적잖은 충격을 느꼈다.
“저기 아틸라 님. 샤를 그 친구도 이제 한물간 것 아닙니까.”
오토가 말에 아틸라가 시큰둥하게 답했다.
“뭐?”
“아니 그게 그렇지 않수. 중앙 마탑을 구하기 위해 그렇게나 총력전을 벌였다고 하던데, 결국 빼앗겼다니 말이우.”
“전쟁에 매번 이기기만 할 수가 있겠냐. 그럴 때도 있는 거지.”
바토리가 끼어들었다.
“철혈귀검아. 아틸라 앞에서 샤를을 흉보는 짓은 그만두는 것이 좋을 게다.”
그러고는 장난스러운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틸라는 샤를 그 아이를 아주 각별하게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다.”
“히익! 아틸라 님 설마 ‘그쪽’이었수?”
“뭐라는 거야 미친 새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