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7. 드라콘과 드라칸 (1)
다시 말해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는 여타 드래곤처럼 신의 마력으로 빚어 낸 피조물이 아니다.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는 신의 피를 이어받았다.’
또한 이 세계의 주인이었던 요툰의 피를 이어받았다.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는 다른 드래곤이나 관조자, 정령왕 등의 존재처럼 상징적 의미의 반신이 아니다.
‘그것이야말로 드라콘 이스메니오스가 특별한 존재라 불리는 이유.’
이 희귀한 변종을 신들은 드라칸(Drakan), 혹은 드라콘(Drakon)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드래곤이란 생명체가 이 세계에 태어나기 전의 일이었다.
또한 그 이후 창조된 드라콘의 유사 종족이 ‘드래곤’이란 이름을 갖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아, 아틸라 님! 어떻게 할 거요!”
오토가 소리쳤다.
아틸라는 고민했다.
드라코리치는 분명 자신들을 이곳으로 인도했다.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카르타고를 몰아내는 일에 도움을 달라는 것.’
하지만 쉬이 믿어지지 않았다.
드라코리치는 이쪽의 도움 없이도 충분히 카르타고를 몰아낼 수 있다.
‘무엇보다 드라코리치에겐 칼날 산맥의 수많은 언데드들이 있다.’
의문에 대한 해답은 도롱뇽이 내놓았다.
“드라코리치 녀석은 아주 오랜 시간을 이곳에서 살았다. 칼날 산맥의 모든 언데드는 사실상 놈의 권속이나 마찬가지지. 하지만 드라코리치는 다른 언데드와 비교할 수 없는 압도적이면서도 특별한 마기를 지니고 있다. 때문에 웬만한 언데드들은 드라코리치 근처에만 와도 자신의 마기를 제대로 유지할 수 없어.”
“그렇구나 도롱뇽아. 그래서 언데드 비행종들이 근방에서 자취를 감춘 것이었구나.”
“뭐, 그렇다는 거다.”
그제서야 아틸라는 상황을 이해했다.
완전하게 납득한 것은 아니지만, 도롱뇽의 말에 의하면 드라코리치는 권속들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상했다.
‘마기가 너무 강한 게 문제가 된다고?’
단순히 마기가 강한 것만으로 다른 언데드들이 근처에 올 수 없다는 것에 의문이 남았다.
또한 아틸라가 보기에 드라코리치는 아주 약간의 위험을 무릅쓴다면 아에스투스를 제거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 정도로 드라코리치는 강했다.
그렇다면 드라코리치가 아틸라 일행을 이곳으로 부른 것엔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틸라는 도롱뇽이 했던 말을 되새겼다.
그리고 어떤 단어에 주목했다.
‘드라코리치는 다른 언데드와 비교할 수 없는 압도적이면서도 ‘특별한’ 마기를 지니고 있다.
‘특별한’ 마기.
아틸라는 무언가 떠오를 듯하면서도 떠올리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원래는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오랜 세월 풍화돼 엷은 흔적만을 남긴 흐릿한 기억처럼.
그러나 그것을 떠올리려 애쓸 시간은 없었다.
아틸라는 세 가지 선택지 중 하나를 골라야 했다.
‘첫 번째는 드라코리치를 도와 카르타고를 제거하는 것.’
드라코리치가 우호적인 대상이라면 이보다 좋은 선택지는 없다.
그러나 아틸라는 드라코리치가 우호적 대상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드라코리치는 자신의 의중을 일행에게 드러내지 않고 있다.
만약 카르타고를 제거하거나 물리치는 것에 성공한다 해도, 그 후 일행은 드라코리치에게 공격당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두 번째는 드라코리치의 기습해 제압하는 것.’
드라코리치가 적대적 대상이라면 반드시 이 선택지를 골라야 한다.
드라코리치는 이곳에 있는 모든 자를 통틀어 최강의 존재다.
도롱뇽을 성체로 만들면 시간을 벌 수는 있겠지만, 승리할 가능성은 극도로 적다.
카르타고와 힘을 합쳐 드라코리치를 쓰러뜨리고, 이후의 상황을 생각하는 편이 낫다.
‘세 번째는 어떻게든 요롱이의 정신을 되돌려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것.’
요롱이가 홀린 듯 이곳까지 날아온 이유는 비록 언데드일지언정, 드라코리치가 용족이기 때문일 터다.
그러나 요롱이는 직전에 비해 상당히 정신을 차렸다.
아마도 드라코리치가 카르타고와 본격적인 전투에 들어갔기 때문일 것이다.
달아나려면 지금이 기회다.
그러나 이 선택지를 택한다면 일행은 칼날 산맥의 수많은 괴수를 맞닥뜨려야 한다.
그때 도롱뇽이 말했다.
“드라코리치 녀석은 아마도 나의 기척을 발견하고 이곳으로 불렀을 거다.”
퍼어어엉!
드라코리치와 충돌한 아에스투스가 휘청이며 뒤로 밀려났다.
아에스투스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댔다.
아틸라가 물었다.
“드라코리치가 널 불렀다고?”
“그래. 분명 그럴 거다.”
“이유는?”
“후……. 이야길 하자면 길어지고. 아무튼 야만 미물. 머릿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강 짐작은 간다만 이번만은 날 믿어 봐라. 우린 카르타고를 공격하는 것이 좋을 거다. 카르타고를 물리친 뒤에도 드라코리치는 우릴 적대하지 않을 거야.”
“어떻게 그걸 확신하지?”
아틸라는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도롱뇽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사실 그는 도롱뇽의 말이 아니었어도 첫 번째 선택지를 고르려 했다.
그의 발달된 감각은, 적어도 이번만큼은 드라코리치가 일행을 공격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에 가까운 예감을 떠올렸으니까.
“간다. 오토.”
“조, 좋수!”
오토가 요롱이에게 의지를 불어넣었다.
때마침 요롱이를 속박하던 드라코리치의 마기가 느슨해졌다.
오토도 그것을 느꼈고, 그래서 그는 아틸라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했다.
“날아라 요롱이! 으하! 으하! 으하하하하!”
요롱이가 아에스투스를 향해 비행했다.
도롱뇽의 해방 스킬은 만약을 위해 남겨 두기로 했다.
일행의 접근을 감지한 수블라가 검은 돌풍의 마력을 발산했다.
그러나 바토리의 방어 마법에 막혔고, 그것을 넘어 바토리는 송곳처럼 첨예한 반격을 가했다.
수블라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중앙 마탑을 제외한 4대 마탑 최강자라 불리던 수블라였지만.
또한 리치가 되며 더욱 강한 힘을 손에 넣은 수블라였지만, 바토리를 압도하긴 어려운 모양이었다.
파카카캉!
바토리의 마력이 수블라와, 아에스투스와, 카르타고를 공격했다.
치명상은 없었다.
카르타고가 검의 오러를 사용해 효율적으로 방어했기 때문이다.
- 바토리 에르제베트.
아틸라는 깨달았다.
카르타고는 이전보다 더욱 강해졌다.
그는 자신의 상대를 압도하진 못하더라도,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그 상대가 무려 드라코리치와 바토리였음에도 말이다.
‘괴물 같은 자식.’
그러나 이쪽엔 바토리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아틸라는 흑철검과 무휼을 양손에 쥐었다.
조금 더 근접하면 카스피와 함께 아에스투스의 위에 올라 육탄전을 벌일 생각이다.
‘승산은 충분하다.’
아틸라는 제 실력에 자신이 있었다.
게다가 카스피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
거기에 더해 이쪽엔 바토리가 있다.
키요오오오!
요롱이가 놀라운 속도로 아에스투스를 향해 날았다.
눈앞의 두 드래곤이 두려울 법도 하건만, 요롱이는 거침없이 날개를 움직여 거리를 좁혔다.
마치 일행에게 기회를 주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드라코리치가 살짝 옆으로 위치를 옮겼다.
아틸라는 무기를 쥔 두 손에 힘을 주었다.
그때였다.
우우우우웅.
아에스투스의 뒤편 허공에 검은 균열이 일었다.
균열을 일으킨 건 수블라였다.
손바닥만 한 크기로 시작된 균열은 눈 깜짝할 사이에 아에스투스가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커졌다.
아틸라는 카르타고가 균열로 진입하려 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카르타고!”
- 버서커 아틸라.
균열을 본 드라코리치가 거칠게 포효했다.
카르타고의 푸른 안광이 아틸라를 바라봤다.
- 난 좌표를 원했고, 목적을 이뤘다.
드라코리치의 브레스가 카르타고를 덮었다.
그 속에서 카르타고의 안광이 날카롭게 불탔다.
- 기억하거라. 이 세계는 예정대로 움직이고 있다.
그 말이 끝이었다.
브레스가 지난 자리엔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았다.
* * *
타드듯……, 모닥불이 타올랐다.
아틸라 일행은 울창한 숲의 어느 평지에 모여 있었다.
“흐에에……. 나 죽는다……. 정말로…… 나 죽을 것 같소 살쾡이 암살자…….”
무리하게 요롱이와 정신 감응을 유지했던 오토는 시체처럼 누워 있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주절주절 입을 놀리는 것으로 보아 생각보다 큰 피로는 아닌 듯했다.
카스피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어, 어떡하지 아틸라? 영주 나리가 많이 아픈 것 같은데.”
“엄살이니 신경 쓸 거 없다.”
발끈한 오토가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어, 엄살이라니! 요롱이와 하루 종일 정신을 공유하는 게 얼마나 고된 일인지 알기나 하는 거요! 게, 게다가 우린 칼날 산맥 꼭대기를 다녀왔소! 하단부, 중턱, 상단부의 온갖 괴수들을 맞닥뜨리고 그 빌어먹을 언데드의 왕 드라코리치도 보고 왔단 말이요!”
“후우. 역시 아틸라 말이 맞았네.”
“엥? 그게 무슨…… 꾸에엑!”
카스피가 오토의 목을 힘껏 조르는 것으로 오토의 주절거림은 끝났다.
바토리가 웃으며 말했다.
“이제야 비로소 칼날 산맥을 벗어났다는 것이 체감되는구나.”
바토리는 여전히 덜미에 돋아 있는 소름을 감각했다.
드라코리치와의 조우는 그 정도로 강렬한 경험이었다.
바토리가 그리 느낄 정도이니 오토와 카스피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심지어 오토는 요롱이와의 정신 감응에 많은 신경을 써야 했기에, 상당한 피로가 중첩돼 있었다.
잘 익은 사슴 뒷다리를 으적으적 씹으며 아틸라가 말했다.
“어쨌든 우린 무사히 칼날 산맥을 내려왔다. 달빛우물숲으로 통하는 밀림도 이렇게 찾아냈고.”
카르타고가 균열 속으로 사라진 뒤, 드라코리치는 물끄러미 아틸라 일행을 바라봤다.
정확히 말하자면 드라코리치는 도롱뇽을 보고 있었다.
이전과 달라진 모습의 두 드래곤은 그렇게 한동안 서로를 응시했다.
아틸라는 두 드래곤이 남들에겐 들리지 않는 방법으로 의사소통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드라코리치의 목소리는 그렇다 치고, 도롱뇽의 목소리마저 들리지 않다니.’
아틸라는 지금까지 도롱뇽이 발하는 모든 전음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만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것이 그간 착실히 레벨업 해 온 도롱뇽의 힘인지, 아니면 드라코리치의 힘이 개입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이제 슬슬 이야기를 시작할 때가 된 것 같은데. 도롱뇽.”
아틸라의 말에 모든 일행의 눈이 도롱뇽을 봤다.
그들 역시도 도롱뇽의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롱뇽은 드라코리치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듯 보였으니까.
게다가 오토와 카스피는 드라코리치가 발하던 가공할 공포로부터 자신들을 구한 게 도롱뇽의 마기라는 것을 짐작했다.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도롱뇽이 말했다.
“흠. 아까도 말했듯, 녀석을 드라코리치로 만든 건 이몸이다. 아니, 사실 난 놈이 언데드로 부활할 거라는 걸 짐작하지 못했지. 그래. 난 정말로 몰랐어. 녀석이 그런 죽지도, 살지도 못한 상태로 영겁의 세월을…….”
“쓸데없는 사설은 집어치우고 본론만 말해라.”
아틸라의 말에 도롱뇽이 긴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말했다.
“드라코리치는, 아니 드라칸 코르키코스는 내 형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