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 무가치의 악마 (3)
아틸라는 얼마 전 ‘시나리오 요툰헤임’의 첫 번째 임무를 완료하며 스킬을 얻었다.
[ 새로운 전투 스킬이 개방됩니다. ]
[ 검기(劍氣) ]
[ 일정 시간 검에 드라콘 이스메니오스의 특별한 마력을 주입시킵니다. ]
[ 1레벨의 검기를 발현하려면 반드시 성체가 된 도롱뇽과, 드라칼리온이 필요합니다. ]
[ 검기의 레벨이 향상될수록 조건은 완화되고, 위력은 강해집니다. ]
그리고 아틸라는 지금, 도롱뇽을 성체를 만든 뒤 드라칼리온을 손에 쥠으로써 검기 발현의 조건을 충족했다.
“그래. 드디어 이걸 써먹어 볼 시간이로군.”
1레벨의 검기로 에단의 검기를 막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아틸라는 지체 없이 검기를 시전했고, 드라칼리온의 검신이 카르타고의 그것처럼 검은 오러로 뒤덮이는 광경을 봤다.
샤를이 악마의 힘을 드러낼 때와도 유사한 모습이었다.
쇄도하는 붉은 검기를 향해 드라칼리온을 마주 휘둘렀다.
그러면서 아틸라는 느꼈다.
자신의 검에서, 팔에서, 아니 온몸에서, 마치 마법과도 같은 응축된 기운이 흑빛의 형상을 빚으며 방출되는 것을.
퍼어엉!
두 검기가 부닥치며 강한 파찰음을 냈다.
에단의 눈이 부릅떠졌다.
아틸라가 검기를 운용할 수 있다는 사실은 지금 처음 알았다.
세베스티아가 의지를 전해 왔다.
‘상대의 검기는 완전하지 않다 에단. 단순히 검 위에 검은 마력을 드리우는 것에 그쳤을 뿐. 너의 검기가 더욱 발달된 경지에 도달해 있다.’
세베스티아의 말은 사실이었지만, 굳이 에단에게 언급하지 않은 부분도 있었다.
아틸라의 검기는 분명 에단보다 낮은 경지에 있다.
그러나 검에 드리운 오러만은 결코 에단에게 뒤처지지 않았다.
에단도 그것을 직감했다.
그가 다시 한번 검기를 운용해 아틸라를 공격했고, 아틸라가 방어했다.
재차 검을 휘두르며 에단이 말했다.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세베스티아.’
‘말해 보아라. 에단.’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는 누구의 편에도 서지 않는 드래곤이라 들었다. 그런데 왜 지금의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는 아틸라와 함께하는 거지?’
세베스티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것은 세베스티아로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유는 모른다 에단. 그러나 더욱 놀라운 일은 드라콘 이스메니오스가 아틸라라는 저 인간 전사뿐 아니라, 바토리 에르제베트와 함께하고 있다는 점이다.’
‘바토리 에르제베트?’
에단은 바토리가 마법사라는 것을 확인했다.
지금도 바토리는 아틸라의 등 뒤에서 두 레드 드래곤을 상대하고 있다.
‘바토리 에르제베트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그녀는 순혈 고대인이자, 불사의 관조자였던 존재.’
‘불사의 관조자? 바토리가 불사의 인간이란 말인가.’
‘지금은 아니다. 바토리 에르제베트는 필멸자가 되었고, 그래서 이전의 힘을 상당 부분 잃어버렸다.’
에단은 바토리가 세베스티아의 브레스를 무력화시켰던 것을 기억했다.
또한 지금, 두 레드 드래곤을 상대로 밀리지 않는 전투를 벌이는 광경을 봤다.
‘……저게 힘을 잃은 거라고?’
‘바토리 에르제베트는 관조자들의 정점에 서 있던 존재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선가 바토리는 인간으로 변했다. 아마도 그녀의 파트너인 리베르 파테르가 구슬로 변했기 때문이겠지.’
에단은 세베스티아의 말을 쉬이 이해할 수 없었다.
관조자라는 존재에 대해, 세베스티아는 지금껏 한 번도 에단에게 말한 적이 없었다.
그런 에단의 마음을 세베스티아가 읽었다.
‘에단. 너와 난 페어링된 관계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너에게 일러 줄 의무는 없다.’
드래곤과 인간은 가치 판단의 기준이 다르다.
원래라면 드래곤과 인간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사이다.
다만 페어링의 힘으로 연결되어 있을 뿐이다.
‘알고 있다. 세베스티아.’
‘간단히 설명하지. 바토리 에르제베트는 고대의 인간이다. 아울러 그녀는 드라콘 이스메니오스가 멸망시킨 고대 왕국 사르데니야의 공주였다.’
‘뭐라고?’
에단은 놀랐다.
처음 세베스티아가 바토리에 대해 말했을 때, 에단은 바토리가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순혈을 유지한 특별한 인간이라 이해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바토리는 실제로 고대를 살았던 인물이고, 관조자가 되며 불사의 힘을 얻었다.
그리고 무언가의 이유로 지금은 필멸자로 돌아왔다.
게다가 자신의 왕국을 멸망시킨 광룡, 드라콘 이스메니오스와 함께 움직이고 있다.
‘네 말대로 이해가 가지 않는군. 세베스티아.’
‘바토리 에르제베트는 관조자가 된 후 드라콘 이스메니오스에게 복수하는 것에 성공했다.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는 최근까지 마계의 밑바닥을 헤매고 있었다. 그것이 드라콘 이스메니오스가 이전보다 약해진 이유다.’
‘다시 말해 바토리 에르제베트도,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도 이전의 힘을 되찾지 못한 상태라는 거로군.’
‘그 말대로다. 에단.’
에단과 세베스티아는 많은 대화를 나눴지만, 실제 흐른 시간은 찰나에 가까웠다.
페어링된 드래곤과 용기사는 정신의 언어로 교감할 수 있고, 그 시간은 육성을 통한 대화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빠르다.
‘그렇다면 놈들이 힘을 되찾기 전에, 지금, 쓰러뜨린다.’
에단의 눈에 강한 전투 의지가 깃들었다.
그 순간 드라콘 이스메니오스가 머리를 뻗어 세베스티아의 목을 물려 했다.
- 같은 수에 또 당할 것 같은가. 드라콘 이스메니오스.
세베스티아가 옆으로 목을 빼냈다.
도롱뇽의 이빨은 세베스티아의 목 비늘을 살짝 스쳤을 뿐이다.
그러나.
아틸라에겐 그 한순간이면 되었다.
에단의 눈이 믿을 수 없는 것을 본 사람처럼 커졌다.
[ 돌진(突進) ]
아틸라의 신형이 눈 깜짝할 사이에 코앞으로 다가왔다.
드라콘 이스메니오스의 이빨이 세베스티아의 목을 스친, 그 찰나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세베스티아가 외쳤다.
- 에단!
카아아앙!
드라칼리온과 에단의 검이 맞부딪쳤다.
지금까지는 에단의 검기를 아틸라가 일방적으로 방어하는 형세였다.
아틸라는 에단처럼 검기를 길게 뻗을 수 없다.
그래서 그의 공격은 에단에게 닿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달랐다.
아틸라는 직접 몸을 움직여 에단의 지척으로 왔다.
두 전사는 서로의 숨소리를 느낄 정도로 가까워졌다.
‘무슨 수를 쓴 것인가! 이자는!’
에단은 당황했다.
그는 이런 기술을 쓰는 상대를 한 번도 마주한 적이 없었다.
세베스티아 또한 마찬가지였다.
- 침착해라! 에단!
세베스티아가 고개 돌려 아틸라를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에단이 다칠 위험이 있었기에 적극적이지 못했다.
그사이 도롱뇽이 빙글 몸을 돌려 두 레드 드래곤을 마주 봤다.
바토리가 입가를 올렸다.
“아틸라의 작전은 성공했다. 우린 우리의 일을 완수해 보자꾸나, 도롱뇽아.”
아틸라와 바토리는 도롱뇽이 성체로 머물 수 있는 시간이 그리 길게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승부수를 던졌다.
아틸라가 세베스티아의 등 위로 올라가 에단과 싸우고.
바토리와 도롱뇽은 나머지 두 레드 드래곤을 쓰러뜨리기로.
“무슨 수를 써서든 저 드래곤들을 쓰러뜨려야 한다. 그래야 이번 전투에서 우리가 이길 수 있느니라.”
- 알고 있는 이야기 반복하지 마라.
“준비는 되었느냐.”
- 물론.
도롱뇽이 쩌억 아가리를 벌렸다.
아틸라가 에단과 검을 섞는 동안 도롱뇽은 브레스를 아껴 왔다.
바토리가 용혈의 반지를 통해 도롱뇽의 마력 방출에 개입했다.
“저 어린 드래곤들에게도 보여 주자꾸나. 너와 나의 ‘초 레어 송곳 브레스’를.”
도롱뇽의 목구멍이 꿈틀대며 검은 마력이 집약됐다.
날카로운 소음을 울리며 브레스가 발사됐다.
퍼어어엉!
피할 틈도 없이 레드 드래곤 한 마리의 복부가 관통됐다.
레드 드래곤이 비명을 질렀다.
시커멓게 뚫린 구멍에서 왈칵왈칵 피가 쏟아졌다.
세베스티아도 그것을 감지했다.
그러나 세베스티아는 레드 드래곤들을 돕지 못했다.
에단을 위기에서 구하는 것이 먼저였다.
- 에단!
에단은 드래곤 마스터이기 이전에 뛰어난 기사였다.
그의 검술 실력은 황궁 기사단에 속해도 무방할 정도로 뛰어났다.
그런 에단이, 저 아틸라라는 인간 전사에게 밀리고 있었다.
“아틸라! 대체 넌……!”
에단은 아틸라가 전투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아틸라는 자이언트 리자드를 세 마리나 쓰러뜨렸다.
그러나 지금의 아틸라는 그때보다 더욱 강했다.
“힘을 숨기고 있었던 것인가! 아틸라!”
아틸라가 무기를 휘두를 때마다 에단은 온몸을 울리는 충격을 경험했다.
검기 때문이 아니다.
아틸라가 지닌 가공할 용력 때문이었다.
‘무슨 이런 인간 같지도 않은 자가……!’
세베스티아가 머리를 뻗어 아틸라를 공격했다.
그 순간 세베스티아는 기묘한 일을 경험했다.
아틸라와 에단의 위치가 바뀌었다.
세베스티아는 황급히 머리의 방향을 틀었다.
하마터면 에단을 물어뜯을 뻔했다.
‘성공이군. 바토리.’
에단과 위치 교환한 아틸라는 바토리가 레드 드래곤 한 마리를 전투불능으로 만든 것을 봤다.
놈이 지면으로 추락했다.
남은 레드 드래곤도 온전한 상태는 아니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꾸에엑! 나 변신 풀렸다!”
바토리의 몸이 허공에 떴다.
직전까지 그녀가 발 디디고 있던 도롱뇽이 형편없이 작아졌다.
“도롱뇽아!”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도롱뇽을 바토리가 품에 안았다.
이대로라면 바토리는 지면으로 추락한다.
아틸라는 생각할 것도 없이 달렸다.
“아틸라!”
검을 휘두르는 에단을 완력으로 밀치며 아틸라가 몸을 날렸다.
그의 품에 바토리가 들어왔고, 두 사람은 그대로 하나 남은 레드 드래곤의 등 위를 굴렀다.
푸욱! 아틸라가 드래곤의 비늘 사이에 흑철검을 박으며 몸을 고정했다.
레드 드래곤이 발악을 했다.
아틸라는 다른 손에 드라칼리온 대신 무휼을 쥐었다.
도롱뇽의 해방 스킬이 종료되며 드라칼리온도 원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콰드득! 콰득! 콰지직!
드래곤의 등에 쉴 새 없이 무휼을 꽂았다.
레드 드래곤은 사납게 비행하며 아틸라를 떨어뜨리려 했다.
그러나 레드 드래곤은 바토리와 도롱뇽의 공격에 녹초가 된 상태였고, 그래서 아틸라를 떼어 내기 역부족이었다.
세베스티아가 레드 드래곤을 도우려 했다.
하지만 이미 상당한 상처를 입은 어린 드래곤은 세베스티아와 제대로 된 연계를 펼치지 못했다.
세베스티아는 고민했다.
바토리 에르제베트와 저 인간전사를 쓰러뜨리려면 지금이 기회다.
저 어린 드래곤을 무시하고 브레스를 쏘아 낸다면, 분명 저들을 제거할 수 있다.
그러나 세베스티아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아무리 저들을 쓰러뜨린다는 목표가 있다 해도, 동족의 시체를 밟으면서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면 자신이 증오하는 드라콘 이스메니오스와 다를 바가 없어진다.
그러던 중 세베스티아는 의아한 점을 발견했다.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는 어디로 사라진 건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
분명 기척은 느껴진다.
세베스티아는 그 기척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발견했다.
바토리 에르제베트의 품속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는 자그만 도마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