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 무가치의 악마 (1)
무서운 기세로 내리치는 브레스.
아틸라는 고개 돌려 동료들을 봤다.
동료들을 둘러싼 풍경을 봤다.
‘주위 풍경이 완전히 바뀌었다.’
즉, 이제 이곳은 더 이상 플루토가 만든 마법진의 둥지 속이 아니다.
잠에서 깨어난 바토리가 날카로운 눈을 뜨며 하늘로 팔을 뻗었다.
그녀의 왼팔 소매가 갈가리 찢겼다.
바토리는 세베스티아의 브레스를 막기 위해 폭주의 마력을 발산하려 하고 있었다.
“멈춰! 바토리!”
아틸라는 펀치로 하여금 도롱뇽을 토해 내게 했다.
케헥! 왜 깨워! 등의 헛소리를 내뱉으며 도롱뇽이 튀어나왔다.
아틸라는 주저하지 않았다.
[ 해방(解放) ]
“야만 미무우울! 갑자기 왜 깨우는……!”
키랴랴랴랴랴랴!
도롱뇽은 하던 말을 강제로 끊긴 채 하늘을 향해 브레스를 쐈다.
도롱뇽의 브레스가 세베스티아의 브레스와 맞부딪쳤다.
파드드드드드드……!
가공할 두 마력의 충돌이 하늘과 땅을 울렸다.
카스피가 두 귀를 막으며 비명을 질렀고, 오토는 강철방패를 들어 카스피의 몸을 보호했다.
그러나 강렬한 풍압을 견디지 못하고 둘의 몸이 지면을 굴렀다.
“바보 영주 나리! 그딴 방패로 소용이 있겠어!”
“그, 그럼 어쩌란 말이오! 히이익!”
오토가 다시금 방패를 들어 카스피를 보호했다.
두 드래곤의 호흡은 거의 동시에 끊겼다.
바토리가 도롱뇽의 등에 올라탔다.
“도롱뇽아!”
도롱뇽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아틸라도 몸을 날려 도롱뇽의 몸에 올라탔다.
“어떻게 된 것이더냐.”
대답을 듣기도 전에 바토리는 상황을 짐작했다.
“플루토가 왔던 것이로구나.”
“그래. 세베스티아가 여기 있는 이유는 나도 모르겠군.”
바토리가 입술을 깨물었다.
“……미안하구나. 내가 알아채지 못했다.”
“쓸데없는 소리 마라.”
바토리의 잘못이 아니다.
아틸라도 플루토를 감지하지 못했다.
게다가 바토리가 플루토의 기척을 눈치채지 못한 이유는 다친 동료들을 보살피기 위해 여력 없이 마력을 소진했기 때문이다.
“일단은 세베스티아를 잡는다.”
도롱뇽이 상승을 멈췄다.
천천히 날개를 휘두르며, 도롱뇽의 몸이 허공에 고정됐다.
눈앞의 세베스티아를 똑바로 노려봤다.
- 날개의 상처는 수복한 모양이군. 세베스티아.
세베스티아의 눈에 강한 불쾌감이 서렸다.
- 물러나라 세베스티아. 그러지 않겠다면.
도롱뇽이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댔다.
- 널 죽이겠다.
세베스티아의 눈동자가 부르르 떨렸다.
세베스티아는 분노와 공포의 감정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 먼 옛날 요툰 전쟁에서와 마찬가지로 말인가. 드라콘 이스메니오스.
세베스티아도 이빨을 보이며 으르렁댔다.
그 모습에 도롱뇽이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냈다.
- 건방진.
순식간에 몸을 이동시킨 도롱뇽이 세베스티아의 목을 물었다.
세베스티아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 이대로 널 포식하겠다.
세베스티아의 목에 더욱 깊이 송곳니를 박으며 도롱뇽이 말했다.
세베스티아는 벗어나려 발버둥 쳤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세베스티아는 가진 힘을 온전히 사용할 수 없는 상태였다.
첫 번째 이유는 세베스티아를 포함한 모든 드래곤들이 마음 한구석에 지니고 있는, 드라콘 이스메니오스에 대한 원초적 두려움 때문이었다.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는 드래곤을 포식하는 존재.’
게다가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는 여타 드래곤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태어났다.
그것이 드라콘 이스메니오스가 규격 외 등급 ‘드라코니안’이라 불리며, 모든 드래곤의 정점에 선 이유다.
- 드라콘 이스메니오스!
세베스티아가 앞발을 뻗어 도롱뇽을 공격했다.
도롱뇽은 날렵한 비행술을 발휘해 그것을 피했다.
상황은 언뜻 도롱뇽이 세베스티아를 압도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지금의 도롱뇽은 과거의 드라콘 이스메니오스가 아니다.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약화됐다.
세베스티아도 그것을 깨달았다.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는 약해졌다.’
세베스티아가 무서운 기세로 비행하며 제 목을 흔들었다.
도롱뇽은 끝까지 물고 있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아틸라는 세베스티아에게서 특이점을 발견했다.
‘에단이 보이지 않는다.’
세베스티아의 등 위엔 에단이 없었다.
세베스티아는 혼자였다.
그것이야말로 지금의 세베스티아가 온전한 힘을 발휘할 수 없는 두 번째 이유였다.
용기사와 페어링한 용족은 약화된다.
그리고 용기사와 함께하지 않으면 더욱 약해진다.
‘케헥! 야, 야만 미물! 이러다 나 이빨 다 뽑히겠다!’
다급히 전음하던 도롱뇽이 세베스티아의 목을 놓았다.
세베스티아는 더욱 확신했다.
지금의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하다.
자신이 쓰러뜨릴 수 있는 상대다.
‘그러나 조심해야 한다.’
세베스티아는 지난번 드라콘 이스메니오스가 발현했던 변형 브레스를 기억했다.
게다가 드라콘 이스메니오스의 등 위로 보이는 저 여자.
‘바토리 에르제베트.’
처음 봤을 땐 알지 못했다.
세베스티아가 바토리를 실제로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바토리 에르제베트는 최강의 관조자라 불리던 존재. 그녀의 마력은 드래곤과 비교해도 크게 밀리지 않을 정도다. 게다가 바토리 에르제베트는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를 마계로 추방시킨 인물이다.’
세베스티아는 일전에 만났던 바토리가 손에서 강한 풍압을 일으켜, 자신의 브레스 일부를 무력화시켰던 일을 떠올렸다.
이후 드라콘 이스메니오스의 송곳처럼 뾰족한 브레스가 날아왔다.
그 브레스는 세베스티아로서도 처음 보는 형태였고, 그것에 당한 날개는 생각보다 오랜 회복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지금의 바토리 에르제베트는 관조자가 아니다.’
그녀는 드라콘 이스메니오스처럼 약화됐다.
하지만 그럼에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날카로운 비수를 숨긴 존재들이었다, 저 둘은.
세베스티아는 경계했다.
섣부른 자만심을 갖지 않았다.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는 특별한 드래곤이다. 거기에 더해 바토리 에르제베트는 순혈 고대인.’
그것만이 아니다.
세베스티아는 바토리 옆에 있는 인간 전사의 무력을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 내가 있는 곳을 어떻게 알아냈지? 세베스티아.
도롱뇽이 물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틸라가 도롱뇽의 입을 빌려 자신의 의지를 전달했다.
- 날개를 회복 중인 내게 벨리알이 찾아왔다. 그는 플루토를 따라가면 널 만날 수 있을 거라 말했고, 난 그렇게 했다.
또 벨리알이로군, 아틸라는 생각했다.
그리고 이것으로 플루토가 말한 ‘무가치’가 벨리알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신했다.
- 벨리알이? 게다가 놈의 말을 듣고 움직였다고? 언제부터 너희 드래곤이 신이 아닌 악마의 의지를 따랐다는 건가.
도롱뇽의 빈정거림에 세베스티아가 불쾌함을 내비쳤다.
- 그것이 네가 할 말이라 생각하는가 드라콘 이스메니오스. 너야말로 신의 의지를 거부한 채 수많은 동족을 말살하지 않았는가.
도롱뇽이 사나운 울음소리를 뱉었다.
- 너희는 나의 동족이 아니다. 난 너희들과 다른 존재다.
세베스티아도 낮은 울음소리를 냈다.
- 무엇이 다르다는 것인가. 드라콘 이스메니오스.
- 나에겐 자유의지가 있다. 나는 스스로의 의지로 판단하고 행동한다. 신의 꼭두각시 노릇이나 하며 의지를 함몰시키는 너희와는 완전히 다른 존재다.
세베스티아가 강한 분노를 표출했다.
- 우리를 창조한 건 신이다. 드래곤은 신의 의지를 거스를 수 없다. 그것은 신성모독이다.
도롱뇽이 비웃었다.
- 그래서 이젠 신도 아닌 고대인의 명령을 따르고 있는 것인가.
- 에단 트라쿠스는 나의 주인이 아니다. 드래곤은 고대인의 혈통과 함께 공통의 적에 맞서 싸운다. 먼 옛날 요툰 전쟁에서와 마찬가지로.
- 그렇다면 나 역시 그때와 같은 입장을 취하겠다. 어느 편에도 서지 않고 전쟁에 개입하겠다. 너희 모두는 나의 숨결과, 송곳니와, 발톱에 부서질 것이다.
세베스티아가 파르르 몸을 떨었다.
그러나 이내 눈동자를 또렷하게 빛냈다.
- 할 수 있다면 해 보아라. 드라콘 이스메니오스.
그 말과 함께 세베스티아 뒤의 허공이 흐물흐물해졌다.
세베스티아는 원래 에단과 함께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를 공격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여유가 없었다.
플루토의 타깃이었던 저들은 생각보다 빠르게 습격자들을 처리했고, 둥지로 진입했다.
벨리알의 숨결이 담긴 플루토의 둥지는 강력했다.
하지만 세베스티아는 둥지를 벗어나 에단에게 향하는 것을 주저했다.
‘언제 드라콘 이스메니오스와 바토리 에르제베트가 실력을 발휘해 둥지를 탈출할지 모른다.’
벨리알의 말과 달리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는 기척조차 느낄 수 없었다.
심지어 바토리 에르제베트는 한계까지 지친 상태.
그럼에도 그 둘은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고, 그래서 세베스티아는 둥지 너머의 하늘에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다.
그리고.
세베스티아는 혼자가 아니었다.
우우웅. 우웅.
흐물흐물해진 허공에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세베스티아를 닮은.
그렇지만 크기는 그보다 작았다.
- 균열?
도롱뇽의 눈이 가늘어졌다.
세베스티아가 균열을 열어 두 마리의 레드 드래곤을 소환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균열은 세계선의 붕괴로 말미암아 생긴 재해.
제아무리 세베스티아라 할지라도 혼자 힘으로 균열을 열 수는 없다.
물론 도롱뇽은 먼 옛날 드라콘 이스메니오스였던 시절, 차원의 틈새를 열 수 있는 힘이 있었다.
그러나 그건 그가 단순한 신의 피조물이 아닌, ‘드라콘 이스메니오스’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 어떻게 한 것이냐. 세베스티아.
도롱뇽은 세베스티아가 벨리알의 도움을 받았으리라 추측했고 그 가정은 맞았다.
벨리알은 날개를 회복 중인 세베스티아를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 드라콘 이스메니오스가 어디 있는지 알려 주겠다. 그러나 너 혼자서는 당해 낼 수 없겠지.
벨리알은 자그만 균열을 열었고, 레드 드래곤 두 마리를 강제로 소환했다.
- 이 드래곤들을 소환하고, 부릴 수 있는 힘을 네게 주겠다.
세베스티아는 경악했다.
있을 수도 없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벨리알은 고위악마다.’
그리고 드래곤은 신이 만든 존재.
다시 말해 악마는 신의 피조물인 드래곤을 소환할 수 없다.
‘벨리알은 한때 신이었다.’
그것도 주신을 가장 가까이에서 섬기던 다섯 신 중 하나.
그러나 벨리알은 주신 전쟁 때 반기를 들었고, 악마로 변모했다.
드래곤이 태어난 건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후의 일이다.
‘벨리알은 드래곤의 탄생에 관여하지 않았다.’
따라서 벨리알은 용계에 간섭해 드래곤을 소환할 수 없다.
그런데 그 불가능한 일이 세베스티아의 눈앞에서 일어났다.
- 레드 드래곤 두 마리가 너와 함께한다면, 넌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를 상대할 수 있겠지.
게다가 벨리알은 단순히 드래곤들을 소환한 것을 넘어, 세베스티아의 의지를 따르도록 만들었다.
‘어떻게 된 것인가. 벨리알은 무언가 대가라도 지불했단 말인가.’
신이 아닌 존재가 용계에 간섭을 일으키려면 대가가 필요하다.
물의 정령왕 나이아드가 ‘나이아드의 눈물’을 대가로 블루 드래곤 아에스투스를 불러냈던 것처럼.
‘아니다. 벨리알은 아무 대가도 지불하지 않았다.’
세베스티아의 눈이 흔들렸다.
그렇다면 설마, 벨리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