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 남부로 돌아갈 방법 (3)
아틸라가 반박했다.
“수해를 통하는 길은 이미 바뀌었다.”
그 말대로였다.
아틸라가 지나온 길은 보랏빛의 심층부로 바뀌었다.
플루토가 웃었다.
“당신은 육로를 이용했을 테고, 그 부분에 한정하자면 당신의 말이 맞습니다. 그러나 남부 대륙으로 향하는 길은 육로만 있는 것이 아니지요. 실제로 강철바위 드워프의 성을 공격했던 암피테르의 용기사들은 하늘길을 통해 남부로 진입했습니다.”
“외곽부라면 몰라도, 수해 심층부 위의 하늘은 안전한 장소가 아니다.”
아틸라가 내심 궁금해하던 일이기도 했다.
남부와 북부를 가르는 수해의 깊은 곳엔 심층부가 자리하고 있다.
물론 심층부가 존재하지 않는 범위도 있지만, 일행과 아벨이 경험했듯 수해는 단순한 숲이 아니다.
수해는 스스로 제 모습을 바꾸며 하늘과 땅의 침입자를 공격할 수 있다.
그런데도 암피테르의 용기사들은 수해를 넘어 강철바위성에 도착했고, 하워드 스틸숄더를 비롯한 대장장이들을 납치하는 것에 성공했다.
“그 또한 아틸라, 당신의 말이 맞습니다. 실제로 암피테르의 용기사들은 하늘길을 지나며 많은 피해를 감수했죠. 물론 그 덕에 무익종 드레이크의 용기사들이 무사히 스테로페스의 감옥에 도달할 수 있었지만 말입니다.”
“피해를 감수했다고?”
“당신은 알지 못했겠지만 그 작전을 위해 많은 암피테르와 용기사들이 죽었습니다. 상대적으로 안전한 하늘길을 통해 이동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심층부 수해의 공격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으니까요.”
아틸라는 플루토의 말을 이해했다.
암피테르의 용기사들은 처음부터 피해를 감수한 작전을 실행한 것이다.
또한 그렇게 하늘 위의 암피테르가 수해의 주의를 끄는 동안, 아벨을 포함한 무익종 드레이크의 용기사들은 예정된 육로를 통해 남부로 진입했다.
이젠 그 육로마저 사라졌지만.
“그렇다면 플루토. 넌 내게 그 정도의 위험을 감수하며 남부로 이동하라는 건가.”
“위험 없는 대가란 존재하지 않는 법이죠. 그러나 당신이 모든 위험을 홀로 감수할 필요는 없습니다. 머지않아 제국에선 다시 한번 남부 대륙으로 암피테르의 용기사를 파견할 생각이니까요.”
“제국은 이미 하워드 스틸숄더를 비롯한 드워프 대장장이들을 손에 넣었다. 그런데 용기사들을 재차 잃는다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남하할 이유가 어디에 있다는 건가.”
“제국은 강철바위산에 존재하는 스테로페스의 모루와 망치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제국은 몰랐던 겁니다. 강철바위 드워프의 기술력이 오롯이 담긴 최강의 무구를 만들려면, 스테로페스의 모루와 망치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스테로페스의 모루와 망치.
먼 옛날 스테로페스가 직접 사용하던 거대한 모루와 망치를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가 강철바위 드워프의 몸에 맞게 줄인 도구를 말한다.
현재 강철바위성엔 스테로페스의 모루와 망치가 일곱 개 존재한다.
‘하워드 스틸숄더가 요구한 건가.’
아틸라는 납득하기 어려웠다.
강철바위 드워프들이 제국을 위해 무기를 만들고 있고, 또 더욱 강력한 무기를 제작하기 위해 스테로페스의 모루와 망치마저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
‘정신 지배라도 당한 것인가. 강철바위의 대장장이들은.’
그게 아니라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다.
그것 말고는 완고하기로 유명한 강철바위 대장장이들이 변심한 이유를 찾기 힘들었다.
“강철바위의 대장장이들은 황도에 있는 건가.”
“글쎄. 어떨까요.”
플루토의 두 눈이 광대 같은 웃음을 머금었다.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는 건 하워드 스틸숄더를 비롯한 드워프 대장장이들이 지금 이 시간에도 구슬땀을 흘리며 망치질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 순순히 말할 생각은 없다는 건가.
그럼에도 아틸라는 하워드가 황도에 있을 거라 확신했다.
그것을 단정하며 아틸라는 고민했다.
이대로 북상해 하워드 스틸숄더를 찾아 오르피나의 마지막 성물을 손에 넣을 것인지.
아니면 남부로 돌아가 카르타고의 야심을 무너뜨릴 것인지.
‘둘 모두 나름의 대가와 위험이 있다.’
전제는 플루토의 말을 믿을 수 있느냐는 거다.
그러나 신뢰 여부를 떠나, 플루토가 한 말은 아틸라의 예상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회색 마탑주를 리치로 만들었다는 말엔 조금 놀라긴 했지만.’
아틸라는 아주 높은 확률로 플루토의 말이 진실일 거라 여겼다.
그렇다면 저울질해야 할 위험은.
‘첫째로 오르피나의 마지막 성물을 노린다면, 하워드 스틸숄더가 있는 곳을 특정해 무사히 그를 만날 수 있느냐는 것.’
지금의 제국은 아틸라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하다.
처음 북부 대륙에 넘어올 때까지만 해도.
아틸라는 제국에 이렇게 많은 용기사가 있다는 것과, 심지어 드래곤과 페어링에 성공한 용기사가 있으리라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황궁 기사단 만으로도 위험하다 생각했는데.’
황궁 기사단은 남부와 북부를 통틀어 최강의 무력을 자랑하는 전투 집단.
아틸라의 예상대로라면, 남부 기사단의 쌍벽이라 불리는 금사자 기사단과 성 크레센시아 기사단조차 황궁 기사단의 상대가 될 수 없다.
그런 황궁 기사단에 더불어 제국엔 용기사들마저 있다.
그중에서도 수준급의 실력자들이 황도에 머무를 거라는 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둘째로 성물을 포기하고 남부 대륙을 향해 떠난다면, 무사히 남부에 도착할 수 있느냐는 것.’
사실 아틸라는 관문을 통하는 편이 가장 현실성 있는 방법일 거라 생각했었다.
제국과 남부 대륙 사이에 펼쳐진 수해는 완전하지 않다.
단 한 곳, 북부와 남부를 잇는 긴 통로가 있고, 당연하게도 그곳은 북남의 정예 병력이 주둔 중이다.
제국에서는 무려 황궁 기사단에서 분리된 특수 조직인 ‘관문 기사단’이.
남부에서는 탈리 왕국의 정예 기사단과 더불어 중앙 마탑의 마법사들이 철통같은 경계를 펼치고 있다.
즉 관문을 이용해 남부로 이동하려 한다면 아틸라는 제국의 관문 기사단과 탈리 왕국의 정예 기사단에 더해 중앙 마탑의 마법사들마저 상대해야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아틸라는 심층부 수해를 지나는 것보단 관문을 통하는 것이 확률 높은 방법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플루토는 그것 말고 다른 방법을 제안하고 있었다.
“암피테르의 용기사들이 남하할 때 그들의 뒤를 따라가십시오. 그렇게 한다면 비교적 안전하게 수해를 넘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한 가지 간과한 게 있군 플루토. 우리는 용기사가 아니다. 그들의 뒤를 쫓아 하늘을 날 수 있는 방법이 전무하다는 거지.”
이미 플루토가 알고 있을지도 몰랐지만, 아틸라는 도롱뇽의 정체를 숨겼다.
“그건 염려치 마십시오. 두 마리의 암피테르를 정신 개조해 넘기겠습니다. 그러면 당신들은 두 명씩 암피테르를 타고 남부를 향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암피테르의 정신 개조는 영구적인 효과가 아니니, 무사히 남부 대륙에 도착한 뒤엔 서둘러 암피테르에게서 벗어나는 편이 좋을 겁니다.”
“순혈 용족인 암피테르를 정신 개조한다고? 그것이 가능한 일이라는 건가.”
“물론 나의 힘만으론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무가치’의 힘을 빌린다면, 한시적으로나마 충분히 가능한 일이죠.”
아틸라는 ‘벨리알의 눈’의 그림자 버전이었던 검은 보석을 떠올렸다.
실제로 나바라 왕국의 궁정 마법사였던 리샤르 세바스찬과 그의 일당은 검은 보석의 힘을 이용해 플라이웜과 가짜 와이번을 타고 다녔다.
물론 그것은 ‘뇌 없는 용족’이라 불리는 플라이웜이기에 가능했던 일일 것이다.
그러나 카르타고는 블루 드래곤 아에스투스를 타락시켜 자신의 환수로 만들었다.
그것에 ‘벨리알의 눈’이 큰 역할을 했으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리고 플루토가 말한 무가치가 벨리알이고, 플루토가 ‘벨리알의 눈’과 유사한 힘을 이용할 셈이라면.
암피테르 정도의 용족을 한시적으로 정신 개조하는 일은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아틸라는 마음을 정했다.
하워드 스틸숄더를 찾은 후 남부로 돌아가는 건 위험할 수 있다.
카르타고뿐 아니라 샤를에 대해서도 아틸라는 강한 불안감을 갖고 있었다.
‘일단은 남부로 돌아간다. 카르타고를 쓰러뜨린 뒤 오르피나의 성물을 찾는 쪽으로 가닥을 잡는다.’
그러나 그것엔 선행돼야 할 조건이 있다.
‘심안을 통해 플루토의 진의를 파악하는 것.’
아틸라는 흑철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플루토를 향해 섬광처럼 검을 휘둘렀다.
카캉!
흑철검과 플루토의 마력이 부닥치며 불꽃이 튀었다.
플루토의 대응은 빨랐다.
그 한 번의 공방으로 아틸라는 플루토가 지금껏 만난 그 어떤 관조자보다도 강한 상대라는 것을 직감했다.
물론 바토리는 제외하고 말이다.
“이런이런. 깜짝 놀라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어째서죠? 난 당신과 싸울 생각이 없다는 걸 분명히 밝혔습니다.”
“난 동의한 적 없거든.”
아틸라가 왼손에 무휼을 쥐었다.
마법사를 상대로는 흑철검보다 무휼이 더욱 뛰어난 효율을 발휘한다.
카카카캉!
이번엔 무휼이 플루토의 마력과 부딪쳤다.
둥지를 튼 마법사답게 플루토의 마력은 주문 없이 즉각적으로 발동됐다.
놀라운 점은 마법진의 시동이 전혀 감지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오래전 가스코뉴 공작성에서 상대한 리베르의 둥지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플루토는 북부 야만인과 시카리오 암살단을 제물로 사용해 둥지를 만들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런 식으로 제작된 둥지는 일반적인 둥지와 판이한 성향을 가진다는 건가.’
“이곳에서 당신은 날 이길 수 없습니다. 혹 바토리 에르제베트가 깨어난다면 모르겠지만, 당신과 난 그녀가 감지할 수 없는 공간에서 서로를 마주하고 있죠. 아니 설령 그녀가 깨어난다 해도 지금의 그녀에겐 날 제압할 여력이 있지 않을 겁니다.”
플루토의 말은 사실이다.
바토리에겐 마력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녀에게 어느 정도 수준의 마력만 남아 있었어도, 이렇게 플루토의 기척을 눈치 못 채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물러나십시오 아틸라. 난 당신과 싸우고 싶지 않습니다.”
웃기는 소리.
아틸라는 플루토의 말을 무시하며 맹공을 펼쳤다.
그러나 플루토는 둥지의 이점을 살려 아틸라의 모든 공격을 무효화시켰다.
퍼걱!
둔탁한 소음과 함께 플루토의 머리가 몸에서 분리됐다.
“어? 어어……?”
플루토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플루토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몸의 부활을 기다렸다.
스스슷. 스스스슷…….
플루토의 얼굴에 진한 흥미가 깃들었다.
그의 뾰족한 혀가 윗입술을 핥았다.
실로 먹음직스러운 사냥감이 눈앞에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나의 먹잇감이 아니다. 무가치는 내가 그를 사냥하는 것을 원치 않을 테니까.’
플루토는 아쉬운 얼굴로 재차 혀를 날름댔다.
그러나 그에겐 직접 아틸라를 상대하는 것보다 재미있는 유희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쉽지만 당신의 상대는 내가 아닙니다. 지금 당신에게 걸맞은 상대는 따로 있으니까요.”
부활을 마친 플루토가 공중으로 떠오르며 말했다.
아틸라는 놓치지 않겠다는 기세로 지면을 박찼다.
카아앙!
흑철검과 무휼이 동시에 플루토를 공격했다.
그러나 붉은빛을 내는 수 겹의 마력 장막이 그것을 막았고, 그 순간 플루토가 온데간데없이 모습을 감췄다.
‘사라졌다고?’
그리고 아틸라는 볼 수 있었다.
어느새 완전히 바뀌어 버린 풍경.
그곳의 높은 하늘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거대한 존재를.
아틸라의 눈이 부릅떠졌다.
‘세베스티아!’
키랴랴랴랴랴!
열화(熱火)의 브레스가 아틸라의 시야를 잠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