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 남부로 돌아갈 방법 (1)
샤를은 고지에 올라 지평선을 내려 보고 있었다.
그는 얼마 전 나바라, 샹크리스와 연합군을 결성했다.
표면적으로는 아인하르트를 포함한 3개 왕국이 힘을 합한 것이었지만.
아인하르트는 이미 발루아, 아스투리아, 후마이야, 노르드를 통합시킨 거대 왕국이었기에 실제로는 6개 왕국이 연합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연합군의 병력은 남부 왕국 전체 병력의 4할에 육박한다.’
5대 마탑과 엘프, 드워프의 병력은 제외한 수치였다.
샤를은 자신이 있었다.
그는 오른팔의 힘을 완전히 회복했고, 그것은 그의 기량을 나날이 발전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샤를은 서리나무 엘프와 황금바위 드워프족, 그리고 일부 마탑의 마법사들도 연합군에 포함시킬 생각이었다.
‘성공한다면 지금껏 존재하지 않던 엄청난 군대가 결성될 테지.’
샤를은 기대했다.
본래 샤를의 목적은 정복이 아닌 평화.
‘이번 전쟁은 나의 진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중요한 과정이 될 것이다.’
상황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편이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 샤를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들도 있었다.
첫째는 대격변의 그림자가 점점 짙어지며, 대륙 곳곳에 마계와 명계의 괴이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일이다.
물론 이전에도 대륙엔 마계의 존재들이 등장한 적이 있다.
고위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 그를 추종하는 관조자 집단 파우스트는 강력한 사령술을 통해 언데드를 소환했고, 중간계를 혼란에 빠뜨렸다.
‘그러나 이제 메피스토펠레스와 파우스트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의 괴이들은 세계선의 경계가 무너지고, 그 인과로 여러 세계가 중간계에서 교집합을 일으킴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다.
그리고 현재 연합군 내에서 마계와 명계의 괴이들을 제거하는 데 가장 뛰어난 효율을 보이는 조직은 성 크레센시아 기사단이었다.
그것을 알고 있는 키릴은 괴이들이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자신이 성기사단을 이끌고 토벌 작전을 벌이겠다고 말했다.
‘제가 움직이겠어요 샤를. 성 크레센시아 기사단은 빛의 신 포이베의 권능을 발휘하는 무장 집단. 마계와 명계의 어둠을 멸한다는 특수한 임무를 우리만큼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이들은 없을 거예요.’
키릴의 말은 옳았다.
그러나 연합군의 총사령관 샤를은 그것을 허하지 않았다.
그는 피핀과 금사자 기사단을 보냈다.
‘전면전이 벌어지기 전까지 마계와 명계의 괴이들을 퇴치하는 일은 네게 맡기겠어. 피핀.’
‘연합군의 사기 증진을 위해서라도 전선엔 3개 왕국의 상징이 함께 자리해야만 해.’
‘3개 왕국이 함께 전선을 이끌며 카르타고에 대항한다는 그림을 전 병력의 뇌리에 각인시켜 두는 편이 좋을 테니까.’
피핀은 두말할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피핀은 제롬의 마법이 깃든 무구의 효율을 제대로 확인하고 싶었다.
‘카르타고와 전면전을 벌이기 앞서 좋은 연습 무대가 되겠군.’
머지않아 제롬의 힘은 증명됐다.
그의 마법으로 강화된 무기는 마계는 물론이고 명계의 괴이들에게도 상당한 효율을 발휘했다.
덕분에 제롬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의 마법 부여는 효능이 확실했지만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이 단점이었다.
또한 그 효과가 영구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단점 속에서도 제롬의 마법 부여는 금사자 기사단을 성 크레센시아 기사단 못지않은 대(對) 언데드 부대로 탈바꿈시켰다.
샤를은 다짐했다.
‘카르타고는 내가 쓰러뜨린다.’
‘그러나 놈의 언데드 군단은 지금 이 순간에도 세를 불리고 있지.’
그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언데드 군단을 상대할 아군은 많을수록 좋다. 강화된 금사자 기사단과 크레센시아 성기사단이 그것의 주축이 될 것이다.’
샤를의 심기를 건드리는 두 번째는, 나바라와 샹크리스 외의 다른 왕국들이 좀처럼 힘을 합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는 거였다.
그중 수오미 왕국만은 청마탑 마법사들의 주장에 힘입어 연합군에 참여할 뜻을 밝혔다.
그러나 나머지 왕국들은 아직도 머릿속에서 주사위를 굴리고 있었다.
그들은 카르타고의 언데드 군단을 물리쳐 이번 전쟁을 끝내는 것보다, 이후의 상황에 더욱 관심이 많은 것처럼 보였다.
‘어리석은 자들. 전쟁 이후의 일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뒤 생각해도 충분한 것을.’
샤를은 조소를 머금었다.
지금은 어떻게든 모든 왕국이 힘을 합쳐 카르타고의 언데드 군단을 몰아내는 것이 먼저다.
‘당면한 문제를 해결해야 이후의 상황도 있는 법.’
샤를은 그런 정치적인 문제를 혐오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샤를은 여러 정치적 입장을 무시할 수 없는 일국의 군주 신분이기도 했고.
그래서 그들의 입장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갔다.
‘남은 왕국들이 뒤늦게 연합군에 참여한다면, 그들은 총사령관인 나의 지시에 맞춰 싸워야 한다.’
그들의 눈에 비친 샤를은 아스투리아, 후마이야, 노르드, 발루아를 차례로 삼키며 급속도로 덩치를 키우는 중인 정복왕.
그렇다면 전쟁 이후의 정복전을 위해, 다른 왕국의 군대를 소모전 형식으로 소비해 버릴지도 모르는 일인 것이다.
‘한심한 자들의 머릿속에서 나오는 생각이란 고작 그런 거겠지.’
샤를은 굳이 그럴 이유가 없었다.
이미 아인하르트의 무력은 남부의 모든 왕국을 정복할 수 있을 정도로 거대했다.
금사자 기사단을 포함한 여러 정예 기사단과 전(前) 후마이야 왕국의 전투 코끼리 부대는 다른 왕국의 입장에서는 재앙과도 같은 병기였다.
게다가 이번 전쟁으로 가장 큰 전력 손실이 예상되는 왕국은 아인하르트와 샹크리스다.
‘언데드 군단을 상대로 효율을 발휘할 수 있는 집단은 금사자 기사단과 성 크레센시아 기사단 뿐이니까.’
하지만 그들만으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세를 불려 가는 카르타고의 언데드 군단을 상대하기 역부족이다.
이 정도의 대 연합군을 결성한 샤를이 아직까지 전면전을 피하는 유일한 이유이기도 했다.
그래서 샤를은 다른 왕국들의 협력이 필요했고, 또한 슈시아 세이나자르가 이끄는 발키리 부대의 힘이 절실했다.
‘발키리의 힘이 언데드에게 효과적이라는 건 파우스트와의 전쟁에서 이미 증명됐다.’
그러나 상황을 직시하지 못한 다른 왕국들은 머릿속에서 나름의 주판을 튕기며 머뭇댔고, 그 사이 라든 왕국에 이어 에이시스 왕국마저 카르타고의 수중에 떨어졌다.
그것만이 아니다.
에이시스 왕국엔 바람 속성을 연구하는 회색 마탑이 있다.
카르타고는 직접 아에스투스를 타고 날아가 회색 마탑의 탑주를 죽이는 것에 성공했다.
이후 회색 마탑주는 리치(Lich)로 부활해 카르타고의 측근이 됐다.
‘회색의 마탑주는, 중앙 마탑을 제외한 나머지 마탑의 탑주들보다 강한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고 하지.’
리치로 되살아난 그가 연합군에게 얼마나 강력한 위협이 될지 충분히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리고.
샤를의 심기를 건드리는 세 번째이자 마지막은.
아틸라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아틸라는 수오미 왕국을 넘어 탈리 왕국으로 진입한 후 행방이 묘연해졌다.’
샤를은 믿을 만한 자들을 보내 아틸라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아틸라가 있어야 서리나무 엘프와 황금바위 드워프들을 연합군에 소속시킬 수 있다.
‘어쩌면 달빛우물 엘프들까지도.’
또한 아틸라의 동료인 오토는 나바라 왕국군의 사기 증진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한 존재다.
바토리와 카스피 역시 다가올 전쟁에서 큰 힘이 될 것이다.
‘용중용이라 불리는 드라콘 이스메니오스야 두말할 것도 없겠지.’
카르타고는 블루 드래곤 아에스투스를 지배해 환수로 삼았다.
아에스투스가 공중전을 펼치며 브레스를 쏘아 댄다면 연합군은 괴멸적인 피해를 입을 것이다.
‘상대할 수 있는 전력이라면 제롬을 포함한 마법사들뿐.’
그러나 제롬은 연이은 마법 부여만으로도 바쁜 상황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적색 마탑이 연합군에 참여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
적마탑주 라일 플라마는 샤를과 키릴에게 목숨을 빚진 상태다.
‘하지만 적마탑의 힘만으론 부족하다. 카르타고의 아에스투스를 확실하게 견제하려면, 이쪽에도 드래곤이 있어야 한다.’
드라콘 이스메니오스가 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샤를은 드라콘 이스메니오스가 일정 시간 성체로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틸라가 돌아와야 한다. 그래야 모든 퍼즐 조각이 맞춰진다.’
그러나 샤를은 아틸라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
말 그대로 아틸라와 그의 동료들은 연기처럼 모습을 감췄다.
그 사실에 샤를은 왠지 모를 불안감과 답답함을 느꼈다.
‘어디로 사라진 건가. 아틸라.’
* * *
아틸라는 동녘 하늘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해가 떠오르려면 아직 두어 시간은 남았다.
바토리는 방금 전까지 아기새처럼 조잘대다 잠들었다.
“흐응…….”
잠꼬대처럼 중얼대는 바토리의 얼굴을 아틸라는 물끄러미 바라봤다.
잠들기 직전까지, 그녀는 마력이 회복될 때마다 오토와 카스피에게 잡기술을 시전했다.
그러고는 결국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곯아떨어졌다.
“저래선 누가 업어가도 못 일어나겠군.”
오랜만의 고요.
아틸라는 혼자만의 시간을 즐겼다.
시끄러운 도롱뇽도 펀치의 인벤토리 안에 넣어 두었다.
타오르는 모닥불 소리에 청각을 집중했다.
타닥. 타타닥…….
바토리는 종종 자신의 속을 꿰뚫어보는 것 같은 말을 했다.
그녀는 영겁의 세월을 살아 온 존재다.
아틸라는 흐트러진 바토리의 앞머리를 가만히 내려보다가, 손가락을 들어 그녀의 머리칼을 정돈했다.
좋은 꿈이라도 꾸는 것인지 바토리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아틸라는 그 표정이 지구의 고양이를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바토리를 보며, 때때로 아틸라가 느끼곤 하는 감정이었다.
바토리는 지구의 고양이를 닮았다.
생김새가 닮았다기보다는, 느낌이 비슷하다.
“으힉! 엉덩이! 사, 살쾡이 암살자의…… 엉덩이이…….”
오토가 잠결에 주절대고는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았다.
아틸라는 널브러진 동료들을 바라봤다.
이렇게 동료 모두가 녹초가 되어 쓰러진 상황은 처음이었다.
반대의 경우는 있었다.
카르타고와의 두 번째 대결에서 아틸라는 죽음 직전의 상태까지 떨어졌었고.
바토리, 오토, 카스피, 그리고 청마탑의 마법사 라쿠나와 키릴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
‘이런 상황에서 적이라도 나타나면 위험하겠군.’
아틸라는 모든 감각을 일깨워 주변의 기척에 집중했다.
그러나 딱히 느껴지는 불온한 감각은 없었다.
아틸라는 약해지는 모닥불 안에 장작을 던져 넣었다.
타드듯…….
모닥불에서 연기가 치솟았다.
연기는 이리저리 흔들리며 묘한 무늬를 그렸다.
마치 물결 같았다.
게다가 점점 커지기까지 했다.
눈앞의 시야를 모조리 가려 버릴 정도로, 거대하게.
자그만 장작 하나를 던져 넣어 벌어진 일이라기엔 상당히 놀라운 변화였다.
흔들리는 연기가 더욱 짙어지고, 혼탁하게 시야를 덮었다.
아틸라는 무심한 얼굴로 잿빛의 장막을 응시했다.
머지않아 연기가 사그라졌고, 사라진 장막 너머엔 마치 처음 이곳에 왔을 때부터 존재했던 것처럼 낯선 얼굴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