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만든 세계 속 광전사가 되었다-287화 (287/425)

287. 예정된 존재

대답 없는 아틸라를 보며 바토리가 싱긋 웃었다.

“네 생각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겐 지난 4년이 길고 길었던 삶 속에서 가장 소중한 기억으로 남을 듯하구나.”

바토리뿐만이 아니다.

아틸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만약 무사히 지구로 돌아가게 된다 하더라도.

그래서 패영전 세계가 한낱 소설 속 세상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게 되더라도.

아틸라는 이곳에서 있었던 일들과, 만났던 사람들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지금 네가 하고 있는 생각을 말로 들려주었으면 좋겠구나.”

아틸라는 고개 돌려 바토리를 봤다.

그러나 끝내 입술이 열리지는 않았다.

바토리의 눈이 가볍게 흔들렸고, 아틸라는 그녀의 눈 속에서 약간의 서운함과, 불안함과, 깊은 신뢰를 느꼈다.

바토리가 화제를 돌렸다.

“남부 대륙의 동료들이 걱정되는 것이더냐.”

아틸라는 그들을 염려했다.

그러나 입 밖으로 내어 말하진 않았다.

“아니.”

“그렇다면 왜 플루토를 찾으려는 것이냐. 왜 레비아를 틈새로 진입시키고자 했던 것이냐.”

“글쎄.”

“남부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더냐.”

아틸라는 당장 남부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 아니다.

다만 남부 대륙의 현 상황은 알고 싶었다.

그리고 밝혀진 상황에 따라 아틸라는 즉각 남부로 돌아갈 방법을 모색할 생각도 하고 있었다.

“그건 상황을 봐야겠지.”

“이번에 북부 야만인들에게서 알아낸 것은 무엇이더냐.”

그러지 않아도 아틸라는 이곳으로 말을 달리는 내내 비욘의 말과, 그의 머릿속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을 생각하고 있었다.

“말해 주려무나.”

아틸라는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다만 지금 이야기하면 나중에 오토와 카스피가 깨어났을 때 다시 한번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철혈귀검과 카스피에겐 내가 다시 이야기하겠다.”

바토리는 그런 아틸라의 마음을 귀신같이 알아챘다.

결국 아틸라가 입을 열었다.

“북부의 야만부족 중에 검은늑대 부족이 있다.”

바토리의 눈이 동그래졌다.

“뭐라? 검은늑대 부족? 그건 네 고향 부족의 이름이 아니더냐.”

“그래. 우연히 이름이 같은 것인지, 아니면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인지는 아직 모르겠군.”

“흐응. 신기한 일이로구나.”

아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북부의 검은늑대 부족은, ‘용기사 학살자’로 대표되는 강경파의 행동을 우려하고 있다.”

북부 야만인들은 본래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각자의 땅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제국의 북부 탐사가 그들의 심기를 건드렸고, 크고 작은 마찰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제국의 인간들이 우리 땅을 침범하고 있다!’

‘놈들은 간악한 침략자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야만인들은 제국이라는 거대한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무기를 들었다.

그것은 머지않아 부족 단위로 생활하던 야만인들이 연합군을 결성하는 계기가 됐다.

야만인들은 부족에 상관없이 힘을 합쳐 제국의 군대와 싸웠다.

‘도끼를 들어라! 제국군을 섬멸해라!’

‘요호호호호호!”

개개인의 힘은 야만인이 앞섰다.

게다가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한 전사들이었다.

그러나 압도적인 숫자로 밀어붙이는 제국군을 야만인들은 쉬이 물리칠 수 없었다.

전선 없는 전쟁은 지루하게 길어졌다.

제국군의 목적은 야만인을 토벌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북부 야만인들은 제국의 군대가 자신들의 땅을 밟는 것을 허락지 않았다.

‘지금은 탐사에서 그칠지 모르지만, 다음번엔 우리의 땅을 노릴 것이다.’

야만인들의 우려는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제국은 분명 크리엘도라 대륙 전체를 제국령으로 만들려 하고 있다.

그러던 중 야만인 속에서 요툰의 힘을 각성한 자들이 생겨났다.

제국에서 용인들이 나타난 것과 비슷한 시기였다.

야만인들은 새로이 획득한 강대한 힘에 열광했다.

‘요툰의 왕 이미르가 먼 옛날의 약속을 지켰다!’

‘우리가 요툰의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오, 이미르시여!”

요툰의 힘에 매료된 자들이 이미르를 섬기기 시작했다.

새로운 신앙은 빠르게 번져 나갔고, 요툰의 힘을 각성한 자들은 엄청난 전투력을 바탕으로 제국군을 몰아쳤다.

‘이 힘만 있다면 우린 제국을 몰아낼 수 있다!’

‘쳐라! 간악한 제국의 인간들을 한 놈도 빠짐없이 처단하라!’

전쟁이 길어지는 동안 그들 중 일부는 강경파로 변했다.

강경파는 이대로 방어만 고집할 것이 아니라, 먼저 제국을 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국에서 용기사들이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소.’

‘그들은 제국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가 될 자들.’

‘지금은 용기사들이 위험 용족 섬멸에 집중하고 있지만, 다음은 우리 차례일 거요.’

‘그렇다면 우리가 먼저 제국으로 잠입해 용기사들을 처리하는 수밖에.’

강경파들은 용병을 가장해 제국에 침투하자는 의견을 내놨다.

지금도 제국 곳곳엔 용병 일을 하는 동족들이 많았기에 크게 의심받을 행동도 아니었다.

그것에 반대를 표명한 것이 검은늑대 부족이었다.

검은늑대 부족은 이미르를 섬기는 강경파들에게서 강한 불안을 느꼈다.

‘저들은 자신의 뿌리를 잊었다. 우리는 위대한 테라루스 일족의 후예들. 결코 요툰 이미르를 섬기는 자들이 아니다.’

“흐응. 그래서 그 비욘과 시거드라는 북부인들이 그렇게 살기등등한 기세로 널 죽이려 했던 게로구나.”

“원래는 놈들에게 혼란을 줄 생각으로 던진 말이었는데, 덕분에 좋은 정보를 얻었지.”

“혹 그들의 배후를 알아냈느냐.”

아틸라는 고개를 저었다.

비욘의 머릿속엔 아틸라와 검은늑대 부족에 대한 증오로만 가득했다.

배후는 고사하고, 함께 일행을 습격한 살수들의 정체마저 알 수 없었다.

아직까지는 플루토가 배후일 가능성이 가장 높을 것이다.

“북부인들뿐만 아니라 살수들의 실력도 보통은 아니었다.”

바토리의 말대로다.

카스피는 우두머리 살수에게 죽을 뻔했다.

아틸라조차 우두머리 살수의 실력을 과소평가했다.

그 정도의 강자인 줄 알았다면 무리해서라도 카스피를 도왔을 것이다.

“카스피가 다친 건 네 탓이 아니다. 우린 모두 열심히 싸웠고, 그에 따른 부상은 불가피한 일이다.”

“알고 있다.”

아틸라는 아무렇지 않게 답했지만, 내심 바토리의 말에 위안을 느꼈다.

아틸라를 무적의 초인으로 생각하는 오토나 카스피와 달리, 바토리는 아틸라의 인간적인 면을 꿰뚫어봤다.

그녀가 보았을 때 아틸라는 초인이 아니었다.

물론 육체적인 능력은 초인에 가까웠지만, 정신적인 측면은 다르다.

‘아틸라의 정신은 불안정하다.’

바토리는 아틸라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수많은 갈등과 고뇌를 이해하는 유일한 존재였다.

‘마치 혼돈을 마주하는 것처럼.’

“너야말로 짐작 가는 것은 없나. 플루토가 이번 사건들의 배후라면, 왜 이런 짓을 벌이는 것인가에 대해.”

“글쎄다. 레비아와 달리 플루토는 나와 그리 접점이 있는 관조자가 아니다. 다만 레비아에게 듣기로 플루토는 여기저기 분쟁을 일으킨 뒤, 그것을 구경하는 걸 즐긴다 하더구나.”

“우리가 놈의 장단에 놀아나고 있다는 건가.”

“처음부터 우리가 목적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 역시도 그간 플루토의 목적에 대해 고민해 봤다.”

“그래서 결론은?”

“내 생각에 플루토는 용계와 요툰헤임이 중간계에 겹치는 현상에 개입하려는 게 아닌가 싶구나. 우린 그 과정에 휩쓸린 것이고 말이다.”

“남부의 대격변엔 카르타고가, 북부의 대격변엔 플루토가 있다는 건가.”

“그렇게 말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 그 둘은 대격변에 관여할 수 없다. 다만 대격변을 통해 무언가의 이득을 취할 셈이겠지.”

바토리의 말은 옳았다.

대격변은 명계에서 되살아난 데스나이트나, 관조자 같은 존재들이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신의 영역마저 벗어난 일이다.

“대륙의 지성 종족들이 우러러보는 그 위대한 신들조차 대격변을 막을 수는 없다는 건가.”

아틸라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가 보기에 대격변은 신들에게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중간계라는 한정적인 공간에 수많은 세계가 겹쳐지고 있다.

게다가 카르타고의 말에 의하면, 다가올 대격변은 신계마저 뒤흔들 가능성이 있다.

- 다가올 승천의 전장은 신계(神界)가 아닐 것이다.

물론 카르타고의 말을 곧이곧대로 신뢰할 수는 없다.

하지만 대격변이 위험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도 신들이 예정된 대격변을 막지 않고 있다는 것은, 그럴 능력이 없다고 보는 편이 자연스럽다.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단다.”

“뭐?”

“어쩌면 신들은 대격변을 기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틸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 그럴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

“나도 명확한 이유는 모르겠구나. 허나 난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 그러면서 언젠가부터 조금씩 느껴지는 것이 있더구나.”

“그게 뭐지?”

“이 세계를 움직이는 거대한 의지.”

그 말대로 바토리는 느꼈다.

이 세계가 예정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 같은 감각을.

또한 자신이 그것을 느낄 정도라면, 신들 역시 알고 있으리라 여겼다.

바토리는 먼 옛날 자신이 오르피나의 왼팔을 갈취했을 때 들었던 말을 기억했다.

‘넌 돌이킬 수 없는 금기를 저질렀다.’

‘그러나 나 또한 이리 될 줄 알고 있었으니.’

그때는 그 말을 그리 깊게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바토리는 사르데니야 왕국을 멸망시킨 드라콘 이스메니오스가 누군가에게 정신 지배를 당한 상태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 난, 내가 사르데니야 왕국을 멸망시킨 상황이 딱히 기억나지 않아.’

또한 복수를 위해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를 찾았을 때, 누군가 그 일을 예견하고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를 속박해두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시무시한 놈이었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 같지만, 온몸에서 엄청난 마기를 뿜어대는 통에 제대로 쳐다볼 수조차 없었지.’

‘놈이 날 속박하고 약화시켰다. 그리고 머지않아 바토리 에르제베트를 포함한 관조자들이 날 찾아올 거라 말했지.’

그러고 보니 사르데니야 왕국이 멸망했던 날, 오르피나가 등장한 시기도 묘했다.

그것만이 아니다.

사르데니야 왕국을 찾은 엘과 아자젤.

카르타고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부활.

그리고 아틸라의 등장.

바토리는 이것들 모두가 이 세계를 움직이는 어떤 거대한 의지의 산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물론 허황된 짐작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토리는 이 모든 일들에서 우연을 넘은 필연(必然)을 느꼈다.

그리고 이것을 감지한 건 놀랍게도 바토리만이 아니었다.

바토리와 아틸라는 몰랐지만.

얼마 전 카르타고는 라일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 사도 아자젤이, 무가치의 악마 벨리알이 내게 보여 주었다.

- 이 세계는 예정대로 움직이고 있다.

이후 카르타고는 샤를에게도 같은 말을 했다.

- 샤를 아인하르트. 넌 예정된 존재다.

- 이 세계를 움직이는 거대한 의지.

- 넌 그 중심에 서 있는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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