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 숲속의 전투 (4)
우두머리 살수는 카스피에게 맹공을 가하면서도 침착을 잃지 않았다.
그가 본 카스피는 대단한 실력자였다.
상대가 완전한 힘을 보존한 상태였다면, 결코 지금과 같은 우위를 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전투법이다.’
눈앞의 살수뿐만이 아니다.
이번 타깃은 모두 독특했다.
허술해 보이는 외형과 달리 상당한 실력을 지닌 강철갑주의 전사.
그 전사를 뛰어넘는 실력자이자 이번 임무의 주요 타깃이기도 한, 정체불명의 기술을 발휘하는 야만전사.
언제 주문을 읊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순식간에 마법을 난사하는 괴물 마법사.
그중에서 가장 위협이 되는 존재는 단연 마법사였다.
‘무시무시한 공격력이다.’
우두머리는 마법사를 기습해 먼저 제거하려 했다.
그러나 그런 기회는 쉬이 찾아오지 않았다.
우두머리는 저토록 빈틈이 없는 마법사를 처음 보았다.
‘어설프게 들어가면 오히려 내가 당할 것 같군.’
우두머리는 소모전으로 방향을 바꿨다.
수많은 부하들이 그렇게 목숨을 잃었고, 덕분에 마법사는 마력 대부분을 소진했다.
‘이제 더 이상 마법사는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다.’
우두머리는 타깃을 바꿨다.
사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마법사보다는 여자 살수에게 더욱 흥미를 느꼈다.
‘신기한 힘을 사용하는 살수다. 마치 마법 같군.’
우두머리는 기회를 엿보았다.
‘마법과 비슷한 구동 원리를 가진다면, 저 힘엔 지속 시간이 존재할 테지.’
그의 생각대로 여자 살수의 오른손에서 무기가 사라졌다.
우두머리는 기습을 시도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상대를 몰아붙이는 것에 성공했다.
“크흑……! 크흐윽……!”
카스피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녀는 귀기의 도움 없이 우두머리의 공격을 제대로 방어할 수 없었다.
우두머리의 눈이 빛났다.
‘무너지고 있군.’
그럼에도 우두머리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상대가 언제 붉은 기운을 재차 사용할지 알 수 없었다.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숨통을 끊어 주마.’
그러나 우두머리는 그 계획을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
야만전사를 상대하던 시거드가 죽었다.
게다가 결정타를 먹인 것은 야만전사가 아닌, 시거드의 동료 비욘이었다.
‘무슨 마법을 부린 거지?’
우두머리는 초조해졌다.
조금 전까지 비욘과 시거드는 야만전사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게다가 마법사는 마력이 고갈됐고, 강철갑주의 전사는 검과 방패를 드는 것도 고작으로 보였다.
즉, 자신이 눈앞의 살수를 쓰러뜨리기만 하면 차례로 타깃을 제거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 균형이 시거드의 죽음으로 깨졌다.
‘서둘러야 한다.’
우두머리는 야만전사의 힘에 미지의 두려움을 느꼈다.
이제 보니 마법사 못지않게 위험한 자였다.
‘설마, 주술(呪術)의 힘을 함께 지니고 있는 건가.’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일단은 눈앞의 살수를 쓰러뜨리는 것이 먼저다.
다행히 살수는 피범벅이 되어 있었고, 이렇게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더 이상 특별한 힘을 사용하지 않았다.
우두머리는 마무리 일격을 가하기로 했다.
날카로운 파공음을 내며 그의 무기가 타깃을 습격했다.
그 순간 타깃이 입꼬리를 올렸다.
‘웃는다고?’
불길함이 치밀었지만 무시했다.
상대는 자신의 공격을 방어할 수단이 없다.
그렇게 단정했다.
그것이 그의 실수였다.
퍼엉.
타깃의 모습이 연기처럼 자취를 감췄다.
우두머리의 눈이 부릅떠졌다.
‘사라졌다고?’
우두머리는 남부 대륙 최강의 살수 집단 하싸씬을 모른다.
따라서 하싸씬 최고의 절기 중 하나인 ‘소멸’ 또한 몰랐다.
게다가 카스피조차 알지 못했지만, 본래 이 기술의 창시자는 셰이카였다.
다시 말해 소멸은 귀살의 일족이 가장 완벽하게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다.
푸욱!
카스피의 단검이 우두머리의 등 뒤를 기습했다.
그 와중에도 우두머리는 민첩성을 발휘해 급소를 피했다.
“……뭐야. 그걸 피했어?”
카스피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말과 달리 카스피는 우두머리가 이번의 공격을 피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얼마 남지 않은 귀기를 끌어모아 귀안을 발현했기 때문이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카스피의 오른손엔 귀수가 돋아나 있었다.
우두머리가 씹어 뱉었다.
“역시 네놈은……!”
파캉! 쇄도하는 귀수를 우두머리가 막았다.
그야말로 엄청난 반사 신경.
그와 동시에 카스피의 몸에서 귀기가 완전히 바닥났다.
귀안도, 귀수도 신기루처럼 모습을 감췄다.
카스피의 얼굴에 당혹감이 피어났다.
그제서야 우두머리는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잔재주는 거기서 끝인가!”
우두머리가 양손의 무기를 뻗었다.
하나의 무기는 단검에 막혔지만, 다른 하나의 무기는 그대로 카스피의 심장을 관통했다.
그런 줄 알았다.
파앙!
우두머리의 시야가 빙글 회전했다.
우두머리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두 손에서 힘이 풀어졌다.
그의 몸이 풀썩 바닥으로 떨어졌고, 몸과 분리된 머리가 허공을 회전했다.
‘이게…… 무슨……?’
이내 우두머리는 알 수 있었다.
타깃이 자신의 마지막 공격을 한 손으로 막아야 했던 이유를.
‘저건……?’
타깃의 오른손엔 단검이 쥐여 있었다.
그리고 왼손엔 기다란 사슬과, 그 끝에 연결된 날카로운 낫이 쥐여 있었다.
우두머리는 저 낫이 자신의 목을 절단했다는 것을 알았다.
즉 카스피는 소멸을 시전하자마자 사슬낫을 우두머리의 사각으로 던졌고, 처음의 단검 공격과 두 번째 귀수 공격은 사슬낫으로 결정타를 날리기 위한 사전 공작이었다.
그렇게 우두머리는 의문을 해소했다.
‘도대체…… 몇 수 앞을 내다본 것인…….’
그리고 마음속 생각을 마무리 짓지 못한 채 숨이 끊어졌다.
털썩, 카스피의 무릎이 지면에 떨어졌다.
“하악……! 하악……!”
이번의 상대는 정말로 위험했다.
물론 이보다 강한 괴물도 상대한 적이 있지만, 그때는 아틸라를 비롯한 동료들이 함께였다.
단독으로 이 정도의 강자를 쓰러뜨린 일은 처음이다.
숨을 고른 카스피는 주위를 둘러봤다.
전투는 거의 마무리에 접어들고 있었다.
콰아아앙!
아틸라가 상대하던 북부 야만인이 땅에 처박혔다.
다른 야만인은 머리가 잘려 저만치 널브러져 있었다.
오토와 펀치도 나머지 잔당들을 처리했다.
“끄, 끝난 건가……!”
일행의 전투는 거의 동시에 끝났다.
카스피는 가장 먼저 오토에게 달려가 그의 목을 확인했다.
“뭐, 뭐야 영주 나리! 고작 이런 스친 상처 갖고 엄살을 부렸던 거야?”
“스, 스친 상처라니! 이 철철 흐르는 피가 안 보인단 말이…… 흐에에엑……!”
긴장이 풀린 건지 오토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카스피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오토 이상으로 피를 흘렸다.
“둘 다 출혈이 심하구나.”
바토리가 오토와 카스피에게 무언가 잡기술을 시전했다.
둘의 출혈이 다소 가라앉았다.
“근본적인 치유법이 아니다. 어서 쉴 공간을 마련해야겠구나.”
그 말이 옳다고 여긴 일행은 아틸라에게 갔다.
아틸라는 한쪽 팔이 잘린 북부 야만인과 무어라 대화하고 있었다.
일행이 다가온 것을 확인한 아틸라가 야만인의 목에 흑철검을 꽂았다.
피거품을 흘리며 발악하던 야만인이 시체가 되어 늘어졌다.
* * *
일행은 말에 올라타 숲을 벗어났다.
등장한 적은 모두 제거했지만, 혹시 생존자가 있을지도 몰랐다.
게다가 아벨과 에단이 무언가 낌새를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일행은 쉬지 않고 말을 달렸다.
오토와 카스피의 부상이 생각보다 심했기에 아틸라가 카스피를, 바토리가 오토를 함께 말에 태우고 달렸다.
“지난번 아벨의 드레이크를 치유했던 것처럼 오토와 카스피를 치유할 순 없는 거냐.”
수해에서 아벨을 처음 만났던 날, 바토리가 부상당한 드레이크를 회복시켰다는 것을 아틸라는 알고 있었다.
“그건 어렵겠구나. 그때의 회복술은 도롱뇽의 마력을 이용한 것이었다. 인간에게는 사용할 수 없는 힘이지.”
아틸라는 체력을 상승시키는 아이템인 ‘키클롭스의 팔찌’를 카스피에게 채워 보았다.
그러나 최대 체력이 늘어날 뿐, 소모된 체력을 회복시키는 기능은 없었다.
아틸라는 카스피의 손목에서 키클롭스의 팔찌를 제거하고, 이번엔 ‘나이아드의 눈물’을 카스피의 손에 쥐여 줬다.
이렇게 상승된 정신력은 조금이나마 카스피를 도울 것이다.
“헤헤 아틸라……. 내가 걱정되는 거야……?”
핏기 없는 얼굴로 카스피가 웃었다.
아틸라는 카스피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자신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그녀가 목숨을 걸고 도왔던 것을 아틸라는 알고 있었다.
“한숨 자 둬라.”
“그러고 싶은데…… 말이 너무 흔들려서 그럴 수가 없어…….”
결국 아틸라는 말을 멈춰 세웠다.
숲에서 그리 먼 거리를 이동한 건 아니지만, 이대로 계속 달리면 카스피와 오토가 위험해 보였다.
“여기서 쉬고 간다.”
아틸라는 찬 바람을 피할 수 있는 바위 근처에 모닥불을 피웠다.
숲 정도는 아니지만, 근처엔 듬성듬성 나무들이 있었기에 장작을 모으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바토리는 오토와 카스피의 상처를 다시 확인하고, 붕대를 갈아 주었다.
“심각한 상처는 아니니라. 다만 둘 다 출혈이 심해 체력이 상당히 떨어졌구나.”
“체력 회복엔 역시 고기를 먹어야겠지.”
아틸라는 근처를 지나던 토끼를 몇 마리 잡아 모닥불에 구웠다.
다 죽어 가는 얼굴을 하던 오토와 카스피는 놀라운 식성을 발휘해 토끼를 뜯어먹었다.
“역시 전투 후에 먹는 고기가 최고야. 그렇지 않아? 영주 나리.”
“아이고 그 무슨 당연한 소릴 하는 거요.”
심지어 오토와 카스피는 다친 몸에 술까지 잔뜩 퍼마신 뒤 잠이 들었다.
아틸라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저렇게 먹어 대는 걸 보니 뒈지진 않을 모양이군.”
어느새 달이 떠올라 있었다.
잠든 오토와 카스피를 보며 아틸라는 키릴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다른 여자 생각을 하는 것이더냐.”
흠칫 놀란 아틸라가 바토리를 돌아봤다.
바토리가 실눈을 뜨며 아틸라를 흘겨보고 있었다.
“뭔 헛소리냐. 너도 다 먹었으면 잠이나 자라.”
바토리는 특별히 다친 곳은 없었지만 마력이 바닥난 상태였다.
직전까지 바토리는 없는 마력을 긁어 오토와 카스피에게 잡기술을 시전했다.
“피곤하긴 하구나.”
그렇게 말한 바토리가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아틸라의 옆으로 왔다.
그러고는 아틸라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벌써 4년이구나.”
“그래.”
“그동안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다. 그렇지 않느냐.”
“뭐 그렇지.”
“즐거웠느냐.”
아틸라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처음 패영전 세계로 떨어졌을 땐 전혀 즐거운 상황이 아니었다.
그저 어서 빨리 지구로 돌아가고 싶었다.
물론 그 생각이 사라진 건 아니다.
여전히 아틸라는 지구로 돌아가는 것을 꿈꿨다.
그러나 한편으로 아틸라는 이 세계에서 많은 일을 겪었고, 여러 사람을 만났다.
그러던 중엔 즐거운 일도 상당수 있었다.
바토리와 몸을 기댄 채 멍하니 모닥불을 바라보는, 지금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