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 세계의 비밀 (2)
카스피가 물었다.
“엘이 바토리를 만나고 싶었다고? 왜? 애초부터 엘은 사르데니야 왕성을 찾았을 때 바토리를 처음 만난 거 아니야?”
대답은 바토리의 입에서 나왔다.
“그건 맞다 카스피. 엘과 아자젤은 사르데니야 왕성을 찾았을 때 나를 처음 보았지. 허나 엘은 그전부터 날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 말에 아틸라가 반응했다.
“엘이 널 알고 있었다고?”
아틸라는 자신의 아버지와 엘이 동일 인물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리고 바토리가 방금 내뱉은 말은, 아틸라의 가정을 더욱 확신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랬을 가능성은 충분하단다.”
“이유가 뭐지?”
“당시 사르데니야 왕국엔 강력한 마법사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난 어린 나이임에도 독보적인 잠재력을 지녔다 평가받았지.”
바토리가 턱을 치켜들며 도도한 표정을 지었다.
“다시 말해, 당시의 난 상당한 유명인이었다는 말이다. 왕국 너머까지 내 이름이 널리 알려졌을 정도로. 그러니 엘이 날 알고 있었다 해도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니란다.”
카스피가 얼빠진 얼굴로 말했다.
“……뭐야 바토리. 그냥 자랑이었던 거야?”
아틸라는 한숨을 뱉었다.
카스피의 말대로 저건 그냥 자기 자랑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바토리의 말은 사실이기도 했다.
사르데니야 왕국이 멸망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바토리가 관조자가 되지 않았다면, 그녀는 분명 사르데니야 역사상 가장 강력한 마법사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 어쩌면 바토리가 말했던 이유로 엘이 바토리를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틸라는 추론했다.
아직 엘과 아버지가 동일 인물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아틸라는 그 가능성을 높게 내다봤다.
바토리가 말하는 엘과 아틸라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외모부터 일치했다.
심지어 바토리는 언젠가 아틸라에게 이런 물음을 던진 적이 있었다.
‘넌 이전에도 날 만난 적이 있지 않았더냐.’
거기에 더해 아버지는 바토리를 알고 있었다.
아틸라는 꿈속에 등장했던 아버지의 목소리를 기억했다.
‘바토리를 지켜 줘.’
만약 아버지가 엘이 아니라면, 아버지는 바토리를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어쩌면 엘과 달리 아버지는 바토리를 직접적으로 만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시공을 초월해 어느 특별한 장소를 내다보는 힘을 지녔을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아틸라가 알기로 그런 막강한 힘을 지닌 인간은 없다.
고대인 중에서도 마찬가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래서 아틸라는 일단, 아버지와 엘이 동일 인물이라는 가설에 무게를 두기로 했다.
또한 아자젤이 칭했던 ‘그분’ 또한 아버지라 단정했다.
‘아버지는 머지않아 도현이의 곁을 떠나야 해.’
‘아버지는 다른 세계에서 왔으니까.’
그 말대로 아버지는 어느 날 행방을 감췄다.
‘그리고 너 역시도, 머지않아 너의 세계로 돌아가야 하지.’
그 말대로 아버지는 아자젤을 통해 김도현을 패영전 세계로 불러들였다.
아버지가 자신을 이곳으로 불러온 이유는.
‘바토리를 지켜 줘.’
바토리를 지키기 위해.
아틸라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무엇으로부터?’
일단 떠오르는 건 하나였다.
‘드라콘 이스메니오스.’
사르데니야 왕국을 멸망시킨 광룡 드라콘 이스메니오스.
당시의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는 의지가 침식된 상태였다.
아니, 애초부터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는 정신이 불안정한 존재.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는 여타 드래곤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태어났다.’
먼 옛날 요툰 전쟁에서 어느 쪽의 편도 들지 않고 전장을 휩쓸고 다닌 것 또한 그 이유 때문이다.
“어이. 도롱뇽.”
아틸라는 도롱뇽에게 사르데니야 왕국을 멸망시킨 이유에 대해 물었다.
물론 아틸라는 모든 정황을 알고 있다.
다만 최근의 분위기로 미루어, 자신이 모르는 상황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엥? 그건 지난번에 다 얘기했는데.”
“뭐? 언제.”
아틸라는 알지 못했지만, 도롱뇽은 샹크리스 왕국의 바라키엘 신전에서 바토리와 오토에게 과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 당시 도롱뇽은 바토리, 오토와 팀을 이뤄 나가라자 탁샤카의 둥지 파괴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난 못 들었으니까 다시 말해라. 하나도 빠짐없이.”
아틸라는 도롱뇽이 자신을 빼놓고 이야기했다는 것을 은근히 기분 나빠했다.
카스피가 번쩍 손을 들며 말했다.
“나, 나도! 나도 못 들었다고 도롱뇽!”
“아 진짜. 귀찮은데.”
도롱뇽이 한숨을 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 난, 내가 사르데니야 왕국을 멸망시킨 상황이 딱히 기억나지 않아.”
사르데니야 왕국을 침공했을 당시 도롱뇽은 강력한 정신 지배를 당하고 있었다.
그래서 도롱뇽은 그날의 일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도롱뇽이 기억하는 건 바토리가 몇몇 관조자를 이끌고 복수를 위해 자신을 찾았고.
그전에 도롱뇽을 찾아온 ‘어떤 존재’에 의해 강력한 속박을 당했다는 것.
“무시무시한 놈이었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 같지만, 온몸에서 엄청난 마기를 뿜어대는 통에 제대로 쳐다볼 수조차 없었지.”
아틸라의 얼굴 표정이 변했다.
그는 크게 놀랐다.
광룡 드라콘 이스메니오스가 바토리를 만나기 전 속박을 당했고, 그 상대를 감히 쳐다보지도 못했다니.
‘내가 알지 못하는 이야기다.’
아틸라가 아는 이야기는 도롱뇽이 말한 것과 달랐다.
바토리는 리베르를 포함한 몇몇 관조자와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를 찾았다.
그리고 힘을 합쳐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를 마계로 추락시켰다.
도롱뇽을 속박한 존재 같은 건 아틸라의 머릿속에 없었다.
“네가 제대로 쳐다볼 수도 없을 정도의 마기를 뿜는 존재였다고?”
“전에 바토리 할망구에게도 말했지만 그게 마기였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아무튼 놈이 날 속박하고 약화시켰다. 그리고 머지않아 바토리 에르제베트를 포함한 관조자들이 날 찾아올 거라 말했지.”
아틸라의 눈빛이 변했다.
“그자는 알고 있었다는 거로군. 바토리가 널 마계로 추락시킬 미래에 대해.”
그자는 미래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전 아틸라는, 아버지가 엘과는 다른 방법을 통해 바토리를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는 가정을 했었다.
‘시공을 초월해 어느 특별한 장소를 내다보는 힘을 지녔을 수도 있으니까.’
도롱뇽이 분한 얼굴로 답했다.
“그래. 놈은 알고 있었다. 아무튼 난 약화된 상태로 관조자들을 상대하는 게 위험하다고 판단해 자리를 뜨려 했다. 하지만 놈은 날 속박했고, 그건 내 힘으론 도저히 뿌리칠 수 없는 것이었다. 그 뒤 예정된 결과인 관조자들을 만나 마계로 추락한 거다.”
그때를 떠올린 도롱뇽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리고 난 깨달았다. 그날 내 몸을 속박시킨 자와, 날 정신 지배해 사르데니야 왕국을 멸망으로 인도한 자가 같은 존재라는 것을.”
그렇게 말하며 도롱뇽은 바토리의 눈치를 봤다.
비록 자신의 의지가 아니긴 했지만, 지금은 동료가 된 바토리의 왕국을 멸망시켰다는 사실이 도롱뇽의 마음을 심란하게 했다.
도롱뇽이 이 이야기를 다시 꺼내기 싫어했던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
한편 아틸라는 도롱뇽의 말을 들으며 경악했다.
‘뭐라고?’
아틸라는 도롱뇽의 정신을 지배해 사르데니야를 멸망시킨 존재에 대해 알고 있었다.
게다가 아틸라는 아버지와, 엘과, 아자젤이 말한 ‘그분’과, 도롱뇽을 속박한 미지의 존재가 동일 인물이라는 가정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도롱뇽을 속박한 자와 사르데니야 왕국을 멸망으로 이끈 자가 같은 존재라니.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이것에 대해선 좀 더 시간을 들여 분석해야 할 것 같다.
아틸라는 남은 술을 한 번에 들이켠 뒤 방으로 들어갔다.
* * *
이튿날 일행은 여관을 떠났다.
에단과 아벨이 아쉬운 표정을 했지만 아틸라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애초부터 일행이 이곳, 카잔 군주령에 들어선 건 레비아의 짝인 플루토를 찾기 위해서였다.
“지난밤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더냐.”
아틸라와 함께 말을 탄 바토리가 고개를 돌리며 물어왔다.
아틸라는 에단에게서 상당한 금화를 받았지만 추가로 말을 구입하지는 않았다.
이유는 아틸라도 모른다.
“별로.”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질 않는구나.”
바토리는 정말로 걱정스럽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자 아틸라는 조금이나마 기분이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아틸라에겐 익숙한 감정이었다.
물끄러미 바토리를 내려보던 아틸라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래. 지구의 고양이 녀석을 보는 것 같군.’
고양이는 아틸라의 기분이 언짢을 때마다 무릎 위에 올라오곤 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갸웃하며 빤히 아틸라를 바라봤다.
그때마다 아틸라는 의외로 고양이에겐 다양한 표정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바토리도 싱긋 웃었다.
“그렇게 웃으니 한결 좋구나.”
그러더니 한 마디를 덧붙였다.
“이젠 내 얼굴만 봐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더냐.”
“아닌데.”
“흐응. 부끄러워하기는. 이럴 땐 꼭 아이 같구나. 이제 스무 살이 되었으면 조금 더 어른스럽게 굴어도 될 것을.”
바토리의 말대로, 아틸라는 스무 살이 되었다.
패영전 세계로 들어온 지도 벌써 4년이 지났다.
“물론 난 지금의 모습도 좋지만 말이다.”
그렇게 말하며 바토리는 아틸라의 입술을 봤다.
욕구가 스멀스멀 피어올랐지만 주위엔 사람이 많았다.
물론 바토리는 그런 것쯤 무시하고 자신의 욕구에 충실할 수 있다.
부끄러움을 피하기 위해 행복을 제한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바토리는 자신의 생각을 아틸라에게 강요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차분히 기다리기로 했다.
상대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아까부터 왜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는 거냐.”
아틸라는 강한 부담을 느꼈다.
바토리가 자신의 입술을 탐한다는 느낌이 아주아주 강하게 일었다.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 같았다.
바토리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해맑게 웃으며 대꾸했다.
“좋아서 보느니라.”
“방해되니 앞을 봐라.”
“싫구나.”
“왜.”
“난 이러고 있는 게 좋단다.”
“계속 그런 자세로 있다간 조만간 목과 허리가 비명을 지를 거다. 무슨 꽈배기도 아니고.”
“흐응. 그걸 걱정한 것이었더냐.”
바토리가 영차영차 자세를 바꿨다.
아틸라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했다.
“이러면 되었느냐.”
바토리는 아예 말머리를 등지고 앉았다.
그러고는 엉덩이를 당겨 아틸라에게 밀착한 뒤 빤히 아틸라의 얼굴을 올려봤다.
“확실히 이게 더 편하구나.”
아틸라는 당황했다.
주위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옆을 돌아보니 오토와 카스피가 쩌억 입을 벌리며 이쪽을 보고 있었다.
“……제대로 앉아라 할망구. 언젠 정면의 풍경이 가장 좋다고 하더니.”
“지금도 그렇단다.”
그렇게 말하며 바토리가 싱긋 웃었다.
아틸라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바토리를 마주 봤다.
불현듯 아틸라가 바토리를 번쩍 들어 처음처럼 돌려 놨다.
무어라 항변하는 바토리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말을 달렸다.
“으힉! 가, 같이 갑시다 아틸라 님!”
갑자기 말을 달리기 시작한 아틸라를 보며 오토가 소리쳤다.
그러고는 서둘러 말을 몰아 아틸라를 쫓았다.
일행은 빠르게 도시를 벗어났다.
그런 그들을 노려보는 사나운 눈동자들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