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 세계의 비밀 (1)
검은늑대 부족엔 오랜 전설이 있다.
그것은 바로 동방 대륙의 위대했던 군주 ‘대무신왕(大武神王)’이.
먼 훗날 죽은 이의 몸을 통해 환생해 온 대륙에 동방의 깃발을 나부끼게 한다는 이야기.
물론 이 설정은 아틸라가 만든 것이다.
수습이 어려워 검은늑대 부족을 멸망시키며 흐지부지된 설정이기도 하다.
그리고.
검은늑대 부족은 대무신왕의 후예들이다.
‘그들은 원래 동방의 민족이었다.’
그들이 동방을 떠난 이유는 알 수 없다.
무슨 이유에선가 자신들의 땅을 떠난 그들은 오랜 항해 끝에, 크리엘도라 남부 대륙에서도 극서부 지역의 땅을 밟았다.
그러고는 이제는 혈통이 희미해진 그곳의 원주민들을 힘으로 굴복시킨 뒤 정착해, 뿌리를 내렸다.
‘하지만 혈통이 흐려진 건 침략자인 동방 민족 또한 마찬가지였다.’
동방 민족은 원주민과 피를 섞었다.
그렇게 수많은 세월이 흘렀고, 지금은 완전한 순혈이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던 중 문주크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아틸라가 순혈에 가까운 외모를 지니고 있었고.
‘오오. 이런 기적이……!’
‘선조의 뿌리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도다……!’
그런 아틸라를 부족의 원로들이 애지중지하며 보살핀 건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그것이 너무 과했던 탓에, 검은늑대의 전사와는 어울리지 않는 유약한 성정을 갖게 됐지만.
‘그래서 숙부 블레다의 계략에 빠져 죽었던 거고.’
그렇게 죽어 땅속에 묻힌 아틸라의 몸에 지금의 아틸라, 김도현이 빙의했다.
그리고.
[ 원작자 권능이 개방됩니다. ]
[ 첫 번째 권능 ]
[ 용력(勇力) ]
아틸라는 ‘권능, 용력’을 발휘해 무덤을 부수며 일어났다.
부활한 아틸라의 가슴엔 자신을 죽인 곰이 만들어 낸 세 갈래 흉터가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 환생한 영웅은 가슴 위로 위대한 징표를 드러내리라.
문주크가 아틸라를 대무신왕의 환생이라 확신한 근거였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겠지. 죽었던 아들이 대무신왕의 전설처럼 다시 살아났으니까.’
부활한 아틸라는 전과 달랐다.
유약한 성정이 사라진 건 물론이고, 부족 최강의 전사인 문주크를 뛰어넘는 강자가 됐다.
그러나 문주크의 생각과 달리 아틸라는 자신이 대무신왕의 환생이라 여기지 않았다.
당연하지 않은가.
대무신왕의 전설은 아틸라 자신이 만든 것이고, 편의를 위해 흐지부지 파기했다.
그래서 문주크와 함께 대무신왕의 성물 ‘무휼’을 찾으러 갔던 날, 아틸라는 문주크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제가 대무신왕의 환생이 아닐 가능성은 염두에 두지 않으신 겁니까.’
이후 아틸라는 검은늑대 부족을 삼키려는 숙부, 블레다의 야망을 무너뜨린 뒤 부족을 떠났다.
그렇게 지구로 돌아가기 위한 여정을 시작했고, 지금의 동료들을 만났다.
아틸라는 생각했다.
‘혹시.’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 여겼던 대무신왕의 이야기가 실재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만약 동방 민족이 고대인의 피를 지닌 자들이라면.
“무슨 생각을 그리하는 것이더냐.”
바토리의 목소리가 아틸라의 상념을 깨웠다.
아틸라의 눈이 바토리를 바라봤다.
“엘에게서 동방 민족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이 있나.”
“동방 민족이라 하였느냐.”
바토리는 무언갈 생각하는 얼굴이 되었다.
“그래. 들은 적이 있다. 사르데니야 왕국의 동쪽 수해를 건너면 신비로운 동방의 나라가 있다고 했었지.”
“엘은 그들을 만난 적이 있다는 건가.”
바토리는 먼 옛날 엘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엘은 그녀에게 종종 왕성 바깥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었다.
‘정말? 사르데니야 왕국 너머엔 그런 세상이 있는 거야?’
‘응. 난 크리엘도라 대륙의 모든 곳을 가봤어. 몬스터들의 땅 수해. 얼어붙은 심장을 가진 괴수들의 땅 칼날 산맥. 먼 북쪽의 거인들과 설인들. 그리고 죽음의 땅까지도.’
‘와아.’
‘그것만이 아니야. 사르데니야 왕국 동쪽엔 다른 지역보다 더욱 짙은 수해가 펼쳐져 있어. 그 너머엔 신비로운 동방의 나라가 있지.’
‘동방의 나라?’
‘응. 그곳에서 살아가는 인간을 동방 민족이라고 불러. 그들은 우리와 비슷하지만, 한편으론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지.’
‘어떤 면에서 다른데? 엘은 그곳에도 가 본 적이 있는 거야?’
그 말에 엘은 조금은 슬픈 듯한 미소를 지었다.
‘오래전엔 어렵사리 왕래가 가능했지. 하지만 지금은 불가능해졌어.’
‘왜 불가능해졌는데?’
‘이곳과 동방을 가로막은 수해가 위험해지고 있거든.’
‘위험해져? 이유가 뭔데?’
‘수해는 분노했어. 그래서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고 있지.’
어린 바토리의 얼굴이 공포로 물들었다.
‘수, 수해가 확장한다고? 그럼 머지않아 사르데니야 왕국도 수해에 덮이는 거야?’
바토리는 오들오들 몸을 떨었다.
엘이 바토리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괜찮아 바토리.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테니까.’
‘저, 정말로?’
‘응. 우린 수해가 더 이상 외부로 확장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에 성공했어. 그래서 수해는 외부가 아닌 내부로 확장하고 있지. 그 인과로 수해는 외곽부, 심층부, 최심부의 세 구역으로 나뉘게 된 거야.’
거기까지 들은 아틸라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설정한 수해의 세 구역이 그런 식으로 탄생한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네 말대로라면 엘이 수해의 확장을 막았다는 건가? 아자젤과 함께?”
“엘은 ‘우리’라는 표현을 썼다. 그것이 엘과 아자젤을 뜻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것을 의미하는지 난 모르겠구나. 다만.”
“다만?”
“난 엘이 말한 ‘우리’가, 모든 사도를 뜻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사도(使徒).
혹은 아포스톨로스(Apostolos).
“엘은 자신과 같은 사도가 다섯이 존재한다고 했다. 그중 사르데니야 왕성을 찾아온 건 엘과 아자젤 뿐. 그렇다면 내가 알지 못하는 사도가 세 명 더 있다는 말이겠지.”
아틸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토리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난 엘에게 수해에 대해 물었다.”
‘수해는 왜 있는 거야?’
‘수해는 원래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았어. 그랬던 것이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났고, 확장을 시작했지. 그것도 아주 무서운 속도로.’
‘왜 그랬던 거야?’
‘이 세계는, 인간을 반드시 박멸해야만 하는 ‘독소(毒素)’로 여겼거든. 그래서 수해라는 이름의 ‘항체(抗體)’를 만들어낸 거야.’
‘독소? 항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엘.’
어른을 흉내 내듯 미간을 찌푸리는 바토리를 보며 엘은 소리 내 웃었다.
‘바토리는 걱정할 거 없어. 아까도 말했듯 수해는 외부로의 확장을 멈췄으니까. 물론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내부는 더욱 무시무시하게 변하고 있지만.’
‘그러니까 수해에 들어가지 않으면 상관없다는 말이지?’
엘이 바토리를 바라봤다.
그의 눈엔 여러 감정이 교차하고 있었다.
‘바토리는 수해에 들어가게 될 거야.’
‘내가? 왜? 난 들어가고 싶지 않은데…….’
‘지금 당장은 아니야. 먼 훗날. 아주아주 먼 훗날의 일이야. 그리고 바토리는 세계의 비밀을 마주하게 될 거야.’
‘세계의 비밀’이라는 말이 바토리의 흥미를 끌었다.
바토리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먼 훗날이면 얼마나 먼 훗날인데?’
그 물음에 엘은 언젠가 했던 말을 반복했다.
‘사르데니야 왕국 위에 또 다른 왕국이 생겨나고, 그것이 제국이 되고, 또 그것이 완전히 다른 것으로 바뀔 때쯤.’
‘피이. 또 그 이야기야? 그러려면 수백, 아니 수천 년은 지나야 하잖아. 나는 그때까지 살 수 없다고.’
그 말에도 엘은 했던 말을 반복했다.
‘앞날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거야. 바토리.’
그것을 마지막으로 바토리가 이야기를 끝냈다.
먼저 입을 뗀 건 오토였다.
“엘이란 사도에 대해 들을 때마다 느끼는 건데, 그 엘이란 자는 어떻게 그 모든 걸 알고 있는 거요?”
카스피도 거들었다.
“맞아. 대충 아무렇게나 말한 거라 치부하기엔 너무 잘 들어맞잖아. 그때의 바토리는 몰랐겠지만, 그 엘이란 남자는 바토리가 불사의 존재인 관조자가 될 거라는 걸 예지한 게 분명해.”
“마, 맞소! 그러지 않고서야 그런 요상한 말을 할리 없지.”
“헤헤. 영주 나리 생각도 그렇지?”
“그러고 보니 그 엘이란 작자, 아틸라 님과 비슷하지 않소?”
“응? 그러고 보니…….”
카스피와 오토가 아틸라를 돌아봤다.
아틸라는 팔짱을 낀 채 무언갈 골몰히 생각하고 있었다.
오토가 아틸라의 눈앞으로 손바닥을 휘휘 저었다.
“눈 뜨고 자슈?”
그러다 아틸라에게 손목을 붙잡히고는 아프다며 죽는소리를 했다.
아틸라가 말했다.
“엘과 아자젤은 사도다. 사도란 ‘보냄을 받은 자’. 그리고 난 그들을 칭하는 다른 말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 말에 바토리가 대답했다.
“신과 악마의 관찰자.”
바토리가 라일의 몸을 장악한 메피스토펠레스와 환술 대결을 펼쳤던 날.
메피스토펠레스는 이렇게 말했었다.
‘나는 원래 중간계의 힘을 손에 넣어 대악마의 간섭에서 벗어나길 원했지. 그러던 어느 순간 깨달은 거다. 설령 내가 대악마와 버금가는, 아니 그 이상의 힘을 얻는다 해도 염원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그게 무슨 소리지?’
‘대악마 역시도 완전한 자유를 손에 넣은 존재는 아니라는 뜻이다.’
‘흐응. 아포스톨로스의 존재를 말하고 싶은 것이더냐.’
‘스스로를 ‘신과 악마의 관찰자’라 칭하는 그들이 있는 이상, 내 염원은 처음부터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지.’
아틸라가 바토리를 보며 말했다.
“네 말대로다. 그리고 난 ‘신과 악마의 관찰자’라는 말에서 무언갈 유추할 수 있었다.”
아틸라가 생각하기로 신과 악마를 관찰할 수 있는 존재란 뻔했다.
바토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신(主神).”
“그래. 엘과 아자젤은 주신의 보냄을 받아 사르데니야 왕국을 찾았을 가능성이 크다.”
아틸라는 엘과 아자젤을 제외한 나머지 세 사도가 누구인지, 또 당시 무엇을 했는지 모른다.
애초부터 사도가 다섯 명 존재한다는 것도 오늘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카스피가 물었다.
“그럼 주신은 왜 엘과 아자젤을 사르데니야 왕국에 보냈던 거야? 왜 엘은 바토리에게 미래의 일을 말해 준 거야?”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두 가지겠지.”
“두 가지?”
“엘과 아자젤을 비롯한 다섯 사도는 주신의 보냄을 받아 수해의 확장을 막았다. 그 탓에 수해는 내부로 확장을 시작해 외곽부, 심층부, 최심부가 생겨났지. 그러나 사도들은 수해가 외부로의 확장을 완전히 멈춘 건지 확신할 수 없었을 거다. 그래서 동쪽 수해와 근접한 왕국이었던 사르데니야에 머물며 경과를 지켜보려 했을 테지.”
그럴듯한 추론에 일행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토가 물었다.
“첫 번째 이유는 수해를 지켜보려 했던 거고, 그럼 두 번째 이유는 뭐요?”
“그건 카스피의 질문 속에 답이 있다.”
“응? 내 질문 속에?”
동그랗게 눈을 뜬 카스피를 보며 아틸라가 말했다.
“엘은 바토리를 만나고 싶었던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