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 테라루스 일족 (2)
일행은 깊은 새벽녘에야 이스마라에 돌아왔다.
에단은 오늘 하루는 쉬고, 이튿날 다시 자이언트 리자드 사냥을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당연한 결정이었다.
에단과 아벨은 도롱뇽이 자이언트 리자드를 포식했다는 것을 모른다.
당연히 숲에 아직 많은 자이언트 리자드가 남아 있을 거라 여겼다.
“이번에도 도움을 주었으면 좋겠군. 아틸라.”
“글쎄. 생각해 보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틸라는 에단의 청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더 이상 그 숲엔 자이언트 리자드가 없다.
‘있어도 아주 극소수만이 남았을 테지.’
도롱뇽의 후각으로 확인한 일이니 틀림없을 것이다.
에단에게 보수를 받은 아틸라 일행은 식사를 마친 뒤 방으로 올라왔다.
술병과 안줏거리를 들고 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오늘 받은 동전이 넉넉했기에 방 안엔 제법 호화스러운 술상이 차려졌다.
카스피가 실실 웃으며 말했다.
“헤헤 아틸라. 아까 봤어? 나의 연기?”
자이언트 리자드와 대치 중인 아틸라를 발견하자마자 큰 소리로 외치며 단검을 뽑아든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오토도 지지 않고 나섰다.
“내 연기도 대단했소! 바람처럼 말에서 뛰어내리며 그 거대한 도마뱀을 공격하는 모습! 그야말로 위기에 빠진 동료를 구하는 멋진 광경이었지 않소!”
이번엔 바토리가 나섰다.
“카스피와 철혈귀검의 연기도 그리 나쁘진 않았지만, 이번에 가장 돋보이는 역할을 한 건 단연코 나인 것 같구나. 내가 전투 능력이 없는 ‘아름다운 여인’을 완벽하게 연기했다. 에단도 더 이상 우릴 드라콘 이스메니오스의 일행이라 여기진 않을 것이다.”
“바토리 아가씨. 그건 아닌 것 같소.”
“뭬야?”
“바토리 아가씨는 원래 아름답지 않소. 그러니 아름다운 여인을 연기한 건 아니란 말이요.”
“그건 영주 나리 말이 맞아. 바토리는 그저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을 뿐이지.”
바토리는 알쏭달쏭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연기가 아니었다는 말과,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말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대립했다.
그러나 결국엔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말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건 그렇구나. 그래. 내가 심히 아름답기는 하지.”
그렇게 말하며 바토리가 아틸라를 돌아봤다.
그 순간 바토리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졌다.
아틸라에게 기습적으로 입을 맞췄던 것과, 아틸라가 자신에게 입술을 가져왔던 일이 떠오른 것이다.
그때 만약 도롱뇽이 끼어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것을 상상하던 바토리가 원망 가득한 얼굴로 도롱뇽을 봤다.
따가운 시선을 느낀 도롱뇽이 펀치의 아가리를 벌리고 안에 들어갔다.
아틸라가 말했다.
“모두 틀렸다.”
오토, 카스피, 바토리가 동시에 물었다.
“뭐가 말이우?”
“응? 뭐가?”
“무엇이 말이더냐.”
아틸라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이번 연기의 승리자는 나다.”
생각지도 못한 아틸라의 말에 동료들은 잠시 멍한 얼굴을 했다.
가장 먼저 입을 뗀 건 오토였다.
“아니, 아틸라 님이 무슨 연기를 했다 그러슈? 그냥 평소처럼 무지막지하게 검을 휘둘러 자이언트 리자드를 썰어 버린 것 밖에 없지 않수.”
“그래. 그게 바로 연기였다.”
“에엥?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아틸라!”
“맞소! 이런 것에서조차 이기고 싶어 생떼를 부리는 거요!”
카스피와 오토가 말도 안 된다며 반박했다.
하지만 아틸라의 말은 사실이었다.
아틸라는 자이언트 리자드를 너무 쉽게 죽이지 않기 위해 상당한 애를 써야 했다.
이유는 분명했다.
도롱뇽이 포식할 때마다 자동으로 따라오는 효과, 포식의 주인 때문이다.
[ 포식의 주인 ]
[ 근력이 4% 상승합니다. ]
[ 근력이 7% 상승합니다. ]
[ 근력이 6% 상승……. ]
도롱뇽은 엄청난 양의 자이언트 리자드를 포식했다.
그 말은 아틸라 또한 포식의 주인의 영향으로 엄청난 근력 상승을 맛봤다는 것이다.
게다가 자이언트 리자드는 물리력으로 싸우는 용족.
그 힘 싸움에서 아틸라가 압도했다.
즉 근력이 강화된 아틸라에게 자이언트 리자드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하찮은 존재였다.
“구구절절 설명하고 싶진 않군. 하지만 나의 승리다.”
그렇게 말한 아틸라가 승리의 보상인 것처럼 술을 들이켰다.
포식의 주인에 대해 알지 못하는 오토와 카스피는 아틸라가 또 우기기 시작한다고 투덜댔다.
그러나 바토리만은 아틸라가 한 말의 의미를 알았다.
그녀는 아틸라가 지닌 힘에 대해 상당히 많은 것을 유추했고, 또 알고 있었다.
술병을 내려놓은 아틸라는 오늘 에단의 머릿속에서 새로이 알게 된 내용을 일행에게 알렸다.
바토리가 말했다.
“테라루스 일족이라 하였느냐.”
테라루스 일족.
아틸라로서도 처음 들어본 이름이다.
그가 구상한 패영전 세계관에서 테라루스 일족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테라루스 일족에 대해 알게 되며, 아틸라는 북부 야만인 중 일부가 요툰의 힘을 얻게 된 인과를 깨달았다.
‘고대인의 한 갈래였던 테라루스 일족은 요툰의 편에서 고대인과 싸웠다. 그것을 잊지 않은 요툰의 왕 이미르가 자신의 강력한 권능의 씨앗을 테라루스 일족의 몸에 심어 놓았다.’
“엘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네가 지금 이야기한 내용보다 자세한 것은 나도 모르겠구나.”
그때 펀치의 입안에서 도롱뇽이 말했다.
“테라루스 일족? 오호. 그러고 보니 그렇군. 북부 야만인 새끼들한테서 어쩐지 익숙한 냄새가 난다 했더니, 그놈들이었어.”
도롱뇽 역시 요툰 전쟁에서 싸웠다.
그러나 도롱뇽은, 아니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는 신과 고대인의 편에서 싸우지 않았다.
그렇다고 요툰의 편에서 싸운 것도 아니었다.
당시의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닥치는 대로 파괴했다.
고대인과도 싸우고.
요툰과도 싸우고.
요툰의 왕인 이미르와도 대결했다.
심지어 동족인 드래곤과도 싸웠다.
그런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를 막기 위해 가장 적극적으로 움직인 건 성격이 불같은 레드 드래곤들이었다.
- 더 이상 드라콘 이스메니오스의 만행을 두고 볼 수 없다.
- 녀석을 막아야 한다.
- 요툰과 싸우는 것은 그 뒤다.
수많은 레드 드래곤이 드라콘 이스메니오스에게 덤볐다.
그러나 누구도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를 쓰러뜨리지 못했고, 차례로 포식당했다.
- 동족을 먹는 드래곤이라니!
- 그야말로 광룡의 모습이 아닌가!
결국 레드 드래곤은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를 막는 것을 포기했다.
세베스티아가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를 강렬하게 증오하는 이유였다.
레드 드래곤이 포기하자 다른 드래곤들도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를 물리친다는 희망을 접었다.
계속 드라콘 이스메니오스와 싸우다간 요툰에게 밀릴 지경이었다.
드래곤들은 다시 합심해 요툰을 몰아쳤다.
드래곤들의 방해가 사라지자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는 다시금 전장을 돌아다니며 학살을 시작했다.
“뭐, 뭐야! 도롱뇽 완전 민폐꾼이었잖아!”
“저, 저것 좀 보시오! 역시 저 요망한 도마뱀은 세계를 위험에 빠뜨리는 악독한 괴물이었소!”
“저 빌어먹을 종복 미물 새끼가 또!”
도롱뇽은 당장에라도 오토의 얼굴을 할퀴고 싶은 욕구를 억눌렀다.
아직 화를 누그러뜨리지 않은 바토리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당시의 드라콘 이스메니오스가 그런 기행을 저지른 것엔 이유가 있었다.
“쓸데없는 소린 됐고, 테라루스 일족에 대해서나 얘기해 봐라 도롱뇽.”
아틸라의 말에 도롱뇽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테라루스 일족은 고대인 중에서도 제법 강력한 힘을 지닌 놈들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이 전사였지. 다른 고대인 일족과 달리 놈들에겐 마법사가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주술사’라 불리는 희한한 놈들이 섞여 있었지.”
도롱뇽이 테라루스 일족을 기억하는 이유가 그것이었다.
다른 일족에는 존재하지 않는 ‘주술사’라는 존재.
게다가 테라루스의 전사 역시도 다른 고대인 일족의 전사와는 차별점이 있었다.
“놈들의 전투 방식은 독특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지. 물론 죽음을 겁내지 않는 인간은 지금도 있다. 하지만 테라루스 녀석들은 뭔가 달랐어. 죽음의 공포를 이겨 내고 싸우는 것이 아닌…….”
도롱뇽은 잠시 말을 골랐다.
“그래. 마치 놈들은 죽음을 기대하며 싸우는 것 같았다.”
“죽음을 기대한다고?”
아틸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죽음을 기대한다는 것은 뻔한 이유다.
현재의 세계에 불만이 있다거나, 혹은.
‘사후 세계를 믿는다는 거지.’
그러나 아틸라가 알기로 패영전 세계관에 사후 세계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신은 없다.
그렇다면 테라루스 일족은 당시의 세계에 불만이 가득해 서둘러 죽고자 했다는 말인가.
‘아니. 그럴 리가.’
그럴 가능성은 적어 보였다.
잘은 몰라도, 에단의 머릿속을 통해 본 것과 도롱뇽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테라루스 일족이 그런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존재였다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그럼 역시 결론은.
“사후 세계를 믿는다는 거겠지.”
아틸라의 말에 도롱뇽은 잠시 무언갈 생각하는 표정을 했다.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군. 테라루스의 주술사 놈들은 때때로 하늘을 보며 제사를 올리곤 했는데, 놈들이 신앙을 바치는 대상은 신들이 아니었다.”
“흐에엣! 신들이 아니라고? 그럼 누군데 도롱뇽?”
“그야 나도 모르지. 난 다만 신이 아니었다는 것만 알뿐이다. 아무튼 놈들은 상당히 괴상한 족속이었다. 전투에 나서기 앞서 얼굴에 피를 덕지덕지 바르고, 때로는 동료들까지 산 제물로 바쳐 다음 전투의 향방을 예상하는 등의 야만적인 일도 당연하다는 듯 일삼았지. 아, 그러니 야만족인 건가. 미개한 새끼들. 킬킬.”
바토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도롱뇽이 말하는 테라루스 일족은, 바토리가 기억하는 고대인의 모습과는 상당히 달랐다.
“그것이 사실이냐 도롱뇽아. 혹 네가 잘못 기억하는 것은 아니더냐.”
“잘못 기억하다니! 이몸의 기억력을 뭘로 보는 거야!”
“이상하구나. 같은 고대인의 핏줄인데 그렇게까지 다를 수가 있다는 말이더냐.”
바토리의 의문은 타당했다.
고대의 인간은, 아니 현시대의 모든 지성 종족은 신을 섬기며 살아간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것은 예부터 지금까지 변치 않은 사실이다.
그런데 도롱뇽의 말이 사실이라면, 테라루스 일족은 이상해도 보통 이상한 것이 아니다.
“그건 바토리의 말이 맞군. 신앙이라는 측면에서만큼은 고대인이나 현시대의 인간이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테라루스 일족이 정말로 신을 섬기지 않았다면, 그건 정말로 특이한 경우라 할 수 있겠지.”
그렇게 말하며 아틸라는 생각했다.
사실 아틸라는 테라루스 일족 말고도, 신을 섬기지 않는 지성 종족에 대해 알고 있었다.
‘검은늑대 부족.’
그랬다.
아틸라의 고향이기도 한 검은늑대 부족.
물론 지금의 검은늑대 부족은 야만전사의 신 ‘티르’를 섬긴다.
그러나 그건 그들이 지금의 지역에 자리를 잡고 난 뒤부터 시작된 일이다.
아틸라가 알기로 검은늑대 부족의 시조는 항해자였다.
그들은 머나먼 동방의 전사들.
‘대무신왕(大武神王)의 후예들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