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 이젠 기억이 났느냐
“야만 미물. 저쪽에서 냄새가 난다.”
도롱뇽이 앞발로 방향을 가리켰다.
도롱뇽 역시 아틸라의 계획을 알고 있었기에 포식의 기대감으로 혀를 날름댔다.
“지금 당장은 움직일 수 없으니 잘 기억하고 있어라.”
아틸라는 현재 에단에게 고용된 용병이다.
먹잇감을 찾았다고 하여 대놓고 자리를 이탈할 수는 없다.
‘기회는 용기사와 지원대가 전투에 돌입했을 때.’
그것도 용기사와 지원대가 전력을 다 해야 잡을 수 있는 정도가 적당하다.
적이 너무 약하면 아틸라가 전장을 이탈한 걸 금세 알아챌 테고.
반대로 너무 강하면 아틸라에게도 지원을 요청할 테니까.
‘대략 스무 마리 정도.’
아벨이 먼저 이곳에 왔을 때, 그는 스무 마리 전후의 자이언트 리자드가 뭉쳐 있는 걸 봤다고 했다.
또한 다른 곳에서도 그와 비슷한 무리를 발견했다.
그 두 무리가 전부인지, 아니면 또 다른 무리가 추가로 존재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틸라는 최대한 많은 자이언트 리자드를 도롱뇽의 뱃속에 집어넣을 생각이었다.
‘도롱뇽의 스킬을 하루라도 빨리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아틸라는 에단의 드레이크가 얼마큼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 정확히는 모른다.
그러나 심안으로 들여다본 아벨은 약 80퍼센트의 동조율을 지닌 빼어난 용기사였고.
그 정도의 동조율을 지닌 용기사는 상당히 드물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하지만 에단은 무려 레드 드래곤 세베스티아의 용기사.
그렇다면 에단의 동조율 또한 아벨보다 약하진 않을 것이다.
‘80퍼센트 이상. 아마도 90퍼센트 전후겠지.’
중위종인 자이언트 리자드와 달리, 드레이크는 상위종의 용족.
자이언트 리자드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강한 힘을 지녔다.
아벨이 이번 토벌작전에서 강한 자신감을 드러낸 이유다.
그러나 자이언트 리자드는 무리 생활을 한다.
또한 드레이크를 상회하는 높은 회복력을 지니고 있다.
‘일대일 전투에서야 상대도 안 되겠지만, 자이언트 리자드는 협공 공격의 이점을 잘 알고 있는 놈들이지.’
자이언트 리자드는 호전적인 용족이지만, 불리한 싸움인 줄 알면서도 부나방처럼 달려드는 과격파는 아니다.
놈들은 분명 승리의 가능성을 엿보며 달려들 터다.
그것을 에단 일행은 어렵사리 쓰러뜨릴 테고, 그 틈을 타 아틸라는 도롱뇽을 양껏 포식시키면 된다.
“킁킁. 저쪽에서도 냄새가 난다.”
이후에도 도롱뇽은 몇 번인가 자이언트 리자드의 냄새를 맡았다.
그러나 놈들은 섣불리 이쪽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개체 수가 부족한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아틸라는 웃었다.
이 모든 상황을 아는 것은 오직 도롱뇽과 아틸라뿐.
불현듯 선두가 움직임을 멈췄다.
“나타났군.”
에단의 말대로였다.
저만치 숲의 어둠 속에서 커다란 그림자들이 나타났다.
퀴리릭. 퀴릭…….
리자드는 인간처럼 직립보행을 하는 종이다.
신장은 성인 남성과 비슷하거나 약간 더 큰 정도.
그러나 눈앞의 리자드는 평범한 리자드가 아니다.
‘자이언트 리자드’다.
“다시 봐도 커다랗군…….”
기사 하나가 중얼대며 꿀꺽 침을 삼켰다.
그도 그럴 것이 자이언트 리자드는 승마한 인간의 눈높이보다도 훨씬 더 컸다.
그런 거대한 녀석들이 사방에서 우르르 모습을 드러냈다.
‘열아홉 마리인가.’
아틸라는 놈들의 수를 빠르게 세었다.
개체 수를 보아하니 아벨이 말했던 놈들인 듯했다.
‘뭐, 아니어도 상관은 없지.’
아틸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가 희망했던 개체 수가 등장했다.
예상대로 에단은 아틸라 일행을 만약의 추가 습격에 대비한 예비대로 남겨 뒀다.
“두 팀으로 나뉘어 2번 대형을 펼친다! 사전 고지한대로 절반의 팀은 내 쪽으로! 나머지 절반은 아벨 용기사를 지원한다!”
에단의 우렁찬 외침에 아벨을 포함한 군인들이 화답했다.
그렇게 전투가 시작됐다.
* * *
그리고 아틸라는 전장을 이탈했다.
잠시 그는 제국군과 자이언트 리자드의 싸움을 지켜봤었다.
제국군은 용족들을 상대로 상당히 체계적인 전술을 펼쳤다.
‘평범한 기사나 병사는 자이언트 리자드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그래서 제국군은 여럿이 팀을 이뤄 효과적으로 상대를 제압했다.
물론 결정타는 에단과 아벨, 두 용기사의 드레이크가 맡았다.
두어 마리의 자이언트 리자드가 드레이크의 이빨에 동강이 날 무렵 아틸라는 자리를 벗어났다.
오토와 카스피는 그곳에 두었다.
만약을 위한 지원 병력으로 남긴 의도도 있었고, 혹시라도 전투가 금세 끝나 에단이 아틸라를 찾을 경우를 대비해서이기도 했다.
“흐응. 그렇게 나와 단둘이 움직이고 싶었더냐.”
아틸라는 기가 막혔다.
원래 아틸라는 바토리도 그곳에 두고 오려 했다.
에단이 현재 가장 의심하고 있는 사람은 아틸라가 아닌 바토리다.
바토리를 그곳에 남겨 두는 편이 에단의 의심을 피하기 좋다.
또한 홀로 말을 타고 움직이는 것이 기동성 측면에서도 더욱 뛰어나다.
“거기 있으라니까 부득부득 우기며 따라온 게 누군데.”
“내가 함께 움직이지 않으면 에단 트라쿠스가 의심을 할 것이다.”
“무슨 헛소리냐. 네가 그곳에 있는 게 오히려 의심을 피하는 길이다.”
“벌써 잊은 것이더냐. 두 명이서 하나의 말을 함께 타는 이유에 대해 제국군이 물었을 때, 이렇게 하는 편이 손발을 맞추기 쉽다고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더냐. 그렇게 말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혼자 움직이면 그들이 어찌 의심하지 않을 수 있겠느냔 말이다. 다 내가 이리 생각이 깊어 따라온 것이니라.”
“말이나 못하면. 그럼 너 대신 카스피를 데려올 걸 그랬군.”
“그것도 문제가 있느니라.”
“뭐가 또.”
“제국의 군인들이 보기엔 너와 내가 한 팀이고, 철혈귀검과 카스피가 한 팀이니라. 그럼 당연히 그간 너와 내가 손발을 맞춰 왔다고 생각할 터인데, 갑자기 팀이 바뀌면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겠느냐.”
“…….”
아틸라는 할 말이 없었다.
제국군의 물음에 대충 답하고 치운 것이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은 몰랐다.
“……그리고 말이다.”
바토리가 어깨를 옴지락거렸다.
그러고는 고개 돌려 아틸라를 바라봤다.
아틸라는 말고삐를 잡고 있었고 바토리는 그의 앞쪽에 앉아 있었기에, 아틸라는 자연스레 바토리를 안고 마주 보는 듯한 자세가 됐다.
약간 당혹스러운 얼굴로 아틸라가 말했다.
“뭐, 뭐야. 왜.”
“우리가 맞춘 건 손발만이 아니지 않느냐.”
“뭐?”
바토리가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렸다.
“……지난번 수오미 왕국의 대호수에서 있었던 일 말이다.”
아틸라는 바토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았다.
수오미 왕국의 대호수.
그 아래 깊은 곳에 있던 물의 정령왕 나이아드.
그 나이아드를 제압하고 대호수를 탈출하라는 ‘정령왕 시나리오’의 두 번째 임무에서, 바토리는 생명을 잃을 뻔했다.
그때의 바토리는 아틸라와 동료들을 지키기 위해 물속으로 뛰어들었고, 실제로도 동료들을 구했다.
그러나 바토리 자신은 몸 안의 산소가 고갈돼 죽을 위기에 처했다.
그래서 아틸라가 그녀의 몸에 산소를 불어넣었다.
입술과 입술을 포개는 방법으로.
‘그동안 아무런 이야기가 없길래 기억하지 못하는 줄 알았더니.’
아틸라는 당황했다.
그 상황에 처한 게 바토리였기 때문에 그런 방식으로 산소를 불어넣은 건 아니었다.
카스피나 오토였어도, 아틸라는 그들을 살리기 위해 같은 방식을 취했을 것이다.
‘아니. 오토랑은 그럴 자신 없다.’
그러나.
입맞춤의 대상이 바토리였기에 주저 없이 움직일 수 있었던 건 분명한 사실이다.
바토리가 아닌 다른 동료(카스피)였어도 그렇게 했을 테지만, 바토리였기 때문에 더욱 적극적으로 구조에 임했다는 말이다.
아무튼 바토리가 갑자기 그때의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
아틸라는 짧은 시간 동안 매우 빠르게 고민했다.
그러나 전에 없이 당황한 그의 입에서 나온 대답이란 고작 이런 것이었다.
“무, 무슨 일을 말하는 거지? 난 기억이 나지 않는…….”
그 순간 아틸라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바토리의 입술이 자신의 입술을 덮었기 때문이다.
부드럽고 달콤한 향기가 콧속을 채웠다.
아틸라는 일순 시간이 멈춘 것 같다는 착각을 했다.
아니, 멈췄다기보다는 매우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곁눈으로 포착되는 말의 갈기가 마치 물속을 달리는 것처럼 느릿느릿 흔들렸다.
바토리의 긴 속눈썹이 그와 같은 리듬으로 흔들렸다.
그렇게 짧지도, 그렇다고 길지도 않은 시간이 지났다.
아틸라의 눈앞엔 두 뺨을 붉게 물들인 바토리가 어색하게 미소하고 있었다.
“……이젠 기억이 났느냐.”
아틸라는 얼빠진 얼굴로 바토리를 봤다.
그녀 옆에서 펀치가 자그만 앞발로 눈을 가린 모습이 보였다.
아틸라는 자신의 심장이 매우 빠르게 뛴다는 것을 알았다.
저도 모르게 바토리에게 얼굴을 가져갔다.
바토리가 당황한 얼굴을 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고, 이어 내려앉은 눈꺼풀에 가려졌다.
바토리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온몸을 떨고 있었다.
아틸라의 입술이 바토리의 입술을 향해 다가갔다.
“빌어먹을 아주 지랄들을 하고 있네. 아 저쪽이라니까 왜 엉뚱한 곳으로 달리며 발정 난 똥개 새끼들마냥 헉헉대는…… 케헤엑!”
주절대던 도롱뇽을 바토리가 움켜잡았다.
도롱뇽은 자신을 노려보는 바토리를 보자마자 실금을 할 뻔했다.
그녀의 얼굴 표정은 사르데니야 왕국을 잃어버렸을 때보다 더한 분노로 타오르고 있었다.
‘시, 시벌! 진짜 날 죽이려 한다!’
기겁한 도롱뇽이 사지를 파닥대며 반항했다.
다행히도 아틸라가 도롱뇽을 풀어 주었다.
바토리는 하던 것을 마저 하려는 듯 아틸라를 돌아봤다.
그러나 아틸라는 평소의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안내해라. 도롱뇽.”
죽다 살아난 도롱뇽이 아틸라의 등 뒤로 기어 올라갔다.
그러고는 두 눈만을 빼꼼 내밀며 아틸라에게 방향을 일렀다.
“저, 저쪽이다 야만 미물.”
아틸라는 도롱뇽이 가리키는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과연 머지않아 세 마리의 자이언트 리자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놈들이 보기에 인간 두 명과 말 한 마리, 그리고 자그만 새끼곰은 위험을 무릅쓰지 않아도 취할 수 있는 훌륭한 먹잇감이었다.
자이언트 리자드가 쿵쿵대며 달려왔다.
아틸라는 등 뒤의 도롱뇽을 집어 앞으로 뻗었다.
원망으로 가득 찬 바토리의 눈을 보며 도롱뇽은 쫘악 아가리를 벌렸다.
[ 포식(捕食) ]
세 마리의 자이언트 리자드가 도롱뇽의 입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 * *
에단은 열아홉 마리의 자이언트 리자드를 잡아내는 것에 성공했다.
원래 그는 더욱 빠른 시간에 놈들을 처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익종 드레이크의 용기사인 ‘에다드’를 연기할 때 그는 자신의 힘을 온전히 드러낼 수 없었고, 그래서 전투는 생각보다 길어졌다.
‘세베스티아가 있었다면 한순간에 끝났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며 에단은 아벨을 봤다.
듣던 대로 아벨은 대단한 용기사였다.
그의 드레이크 동조율은 에단보다도 뛰어났다.
그러던 중 에단은 아틸라와 바토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