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 두 마리만 내놓거라
레비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디까지 알고 있었느냐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시치미를 뗄 셈이더냐.”
바토리의 얼굴이 더욱 싸늘하게 변했다.
레비아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자, 잠깐 바토리.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오해라 하였느냐. ‘통찰(洞察)의 관조자’라 불리는 레비아, 네가 요툰의 정체를 깨닫지 못하였다고?”
“정말 난 몰랐어. 대체 그 요툰이 어땠길……!”
파캉!
바토리의 머리 위에 생성된 마멸의 칼날이 레비아를 덮쳤다.
레비아의 마법 장막이 그것을 막았다.
콰드드드듯……!
마멸의 칼날이 장막을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붉은 마력의 파편이 불티처럼 허공에 흩어졌다.
“바, 바토리……! 난…… 정말로……!”
“아직도 거짓을 고할 생각이더냐.”
마멸의 칼날 두 자루가 추가로 생성됐다.
레비아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저, 정말이야 바토리! 난 요툰에 대해 조금도……!”
그 순간 레비아의 혀가 딱딱하게 굳었다.
말없이 상황을 지켜보던 아틸라가 레비아의 목에 흑철검을 들이댔기 때문이다.
‘뭐, 뭐지? 이 야만전사는……!’
아무리 바토리의 공격을 막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해도 레비아는 관조자다.
또한 뛰어난 감각을 지닌 마법사다.
그러나 레비아는 아틸라가 검을 뽑아 자신을 겨누는 과정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게다가 저자의 몸에서 뿜어지는 가공할 살기는.
“어이. 케렌시아의 영주.”
야만전사가 레비아를 불렀다.
목소리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을 정도의 사나운 기운이 흘렀다.
레비아는 마멸의 칼날을 막는 다급한 와중에도 눈동자를 굴려 전사를 봤다.
잠시 후 전사가 말했다.
“마법을 거둬. 바토리.”
그 말과 동시에 레비아를 짓누르던 마멸의 칼날이 소거됐다.
바토리의 머리 위에서 으르렁대던 두 자루 칼날도 모습을 감췄다.
“영주는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
아틸라는 돌발적인 행동과 강한 살기를 이용해 레비아의 의식을 일순 자신에게 끌었고, 심안을 발동하는 것에 성공했다.
그리고 아틸라가 들여다본 레비아의 머릿속은 거짓을 말하고 있지 않았다.
바토리가 엷게 입가를 올렸다.
“흐응. 그랬단 말이더냐.”
“하악……! 하악……! 학……!”
레비아는 가쁜 숨을 내쉬며 식은땀을 흘렸다.
바토리 하나를 상대하는 것도 오금이 저릴 만큼 두려운 일인데.
그녀 못지않은 괴물을 추가로 상대했다.
‘대, 대체 뭐야 저 정체불명의 야만전사는!’
물론 레비아는 마음을 먹는다면 언제든 틈새로 진입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아틸라를 관조해 정체를 유추할 수 있다는 말이다.
‘아니야. 바토리가 그렇게 내버려 둘 리 없지.’
레비아는 바토리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바토리가 인간이 되어 힘을 잃었다고는 해도, 다른 관조자가 자신의 일행을 엿보는 행위는 충분히 막을 수 있다.
아울러 자신 정도의 관조자는 충분히 제거할 힘이 있다는 것 역시도.
‘아니 근데 정말로 힘을 잃긴 한 거야?’
레비아는 조금 전 바토리가 마멸의 칼날 세 자루를 동시에 운용하는 것을 봤다.
관조자 중에서도 제법 커다란 파벌을 가지고 있던 파우스트를 몰살 직전까지 끌고 갔던 가공할 마력.
‘빌어먹을. 역시 예나 지금이나 두려운 여자야.’
사실 레비아는 틈새에 진입하지 않는 삶을 산 지 오래되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인간의 삶을 원했다.
그래서 틈새로 진입해 세계를 관조하는, 인간이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무슨 말이지? 요툰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었느냐는 말은.’
“남서쪽의 숲 그 자체가 요툰이자, 요툰헤임과 통하는 균열이라는 걸 알고 있었냐는 말이다.”
마음을 읽은 듯한 아틸라의 목소리에 레비아는 움찔했다.
그러나 바토리의 서늘한 얼굴 표정을 보고는 서둘러 답했다.
“모, 몰랐어. 정말이야. 맹세할 수 있어 바토리.”
아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관조자 레비아. 넌 틈새에 진입하지 않은 삶을 살아온 지 오래됐군. 그렇다면 넌 어떻게 남서쪽 숲에 요툰이 등장한 걸 알게 된 거지?”
“그, 그건…….”
“그렇군. 네 짝 ‘플루토’가 알려 준 건가.”
레비아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지, 진짜 뭐야? 이 야만전사는?’
아까부터 무엇을 생각할 때마다 전사는, 마치 그것을 읽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하긴 바토리가 저 야만전사의 말을 따르고 있다. 보통내기가 아닌 건 당연하겠지.’
레비아는 아틸라, 오토, 카스피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러고는 저들 모두 얕보아선 안 될 인물이라는 것을 새삼 자각했다.
바토리가 말했다.
“아틸라의 말대로라면, 최근 넌 틈새에 진입하지 않은 것 같구나.”
관조자의 ‘최근’이란, 평범한 인간의 ‘최근’과는 다른 개념이다.
“맞아 바토리.”
“그래서 넌 남서쪽 숲의 진실을 알지 못했고, 네 짝인 플루토가 네게 그것을 알려 왔다 이 말이더냐.”
레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플루토는 최근 네 행동을 달가워하지 않고 있겠구나. 아마도 그래서 네게 남서쪽의 요툰에 대해 알린 것이겠지. 네가 다시 과거의 강력한 관조자로 돌아오길 바라며.”
“그래. 그럴 거야. 하지만 난 그러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때마침 날 찾은 네게 이번 일의 처리를 부탁한 거야. 너도 알다시피 먼저 이 일을 맡기로 했던 용기사는 죽어 버렸으니까.”
“용기사를 죽인 북부인이라면 우리가 처리했다.”
아틸라가 말했다.
레비아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쉽지 않았을 텐데.”
“네 말대로 쉽지 않았다. 특히 놈들의 우두머리인 울딘이란 녀석은 영웅 등급 이상의 전사더군.”
“영웅 등급?”
패영전에서 영웅(英雄)급 등장인물은 다른 인물들과는 차원이 다른 전투 능력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오토와 슈시아는 원작과 달리 영웅 등급으로 성장하며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강자가 됐다.
또한 소설에선 스토리가 진행되며 영웅 등급을 뛰어넘는 등장인물도 발생한다.
‘대표적 인물이 샤를이지.’
샤를은 남부 대륙을 통일하는 시점에 영웅 등급을 넘어 ‘전설(傳說) 등급’에 도달한다.
또한 소설 상에선 아직 등장하지 않았지만, 아틸라는 전설 등급을 넘어선 또 하나의 등급을 머릿속에 계획하고 있었다.
“엄청나게 강한 전사였다는 말이다. 그리고 울딘은 확실히 요툰의 피를 이어받은 자가 맞더군.”
아틸라는 울딘이 사용했던 전격의 힘을 기억했다.
그 힘은 샤를의 신력 못지않았다.
때마침 끼어든 울딘의 동료 발더와 ‘위치 교환’하지 않았다면, 아틸라는 그 정도로 빠르게 그들을 제압하지 못했을 것이다.
‘뭐, 바토리가 전투에 나서지 않긴 했지만.’
바토리는 레비아에게 남서쪽 숲에 등장했던 요툰의 정체와, 그곳에서 있었던 전투에 대해 설명을 시작했다.
오해가 풀린 바토리는 레비아와 이야기를 나누며 종종 맑은 웃음을 흘렸다.
그 모습을 보며 아틸라는 바토리가 레비아와 제법 가까운 사이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던 중 바토리가 세베스티아와, 세베스티아를 탄 용기사 이야기를 꺼냈다.
“뭐야 바토리. 드래곤 마스터까지 만난 거야?”
“흐응. 그런 이름이 있었더냐.”
“제국에서는 드래곤과 페어링한 용기사 네 명을 드래곤 마스터라 부르거든. 네가 만난 건 분명 불의 용기사 ‘에단 트라쿠스’일 거야.”
“그런 녀석이 세 명이 더 있다고?”
아틸라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레비아가 설명했다.
“제국에 모습을 드러낸 드래곤은 모두 네 마리야. 불의 세베스티아, 빛의 루미니우스, 얼음의 프릴루이나, 마지막으로 자연의 네트라비스.”
“레드 드래곤, 골드 드래곤, 화이트 드래곤, 그린 드래곤이란 말이로구나.”
“이유는 모르겠지만 물의 아에스투스는 출현하지 않았어. 뭐 바토리, 네가 마계로 떨어뜨린 ‘암흑의 드라코니안’은 당연히 나타날 수 없겠지만.”
“물의 아에스투스라면 남부 대륙에 있단다.”
“응? 남부 대륙?”
레비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렇단다. 현재 남부 대륙은 북부와는 다른 대격변의 전조를 겪고 있지.”
“대격변이라면.”
“버서커 카르타고가 데스나이트로 부활해 아에스투스를 굴복시켰다. 제국의 호칭대로라면 카르타고도 용기사가 되었다 할 수 있겠지.”
레비아의 눈빛이 변했다.
그녀는 다소 염려하는 표정으로 바토리를 봤다.
“……괜찮은 거야? 바토리.”
아틸라의 짐작대로 레비아는 바토리와 가까운 관계였다.
레비아는 바토리가 카르타고에게 얼마나 정성을 쏟았는지 알고 있었다.
“난 괜찮다 레비아.”
바토리가 아틸라를 돌아보며 미소했다.
“아틸라를 만났으니까.”
아틸라는 무심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바토리는 무표정해 보이는 그의 얼굴에서 엷은 동요를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암흑의 드라코니안은 더 이상 마계에 있지 않단다.”
“플루토는 어디에 있지?”
바토리의 말을 자르듯 아틸라가 물었다.
아틸라는 아직 레비아를 믿지 않았고, 그래서 도롱뇽의 정체는 숨기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레비아가 답했다.
“플루토가 어디 있는진 나도 몰라. 그는 오고 싶을 때 왔다가, 연기처럼 떠나 버리니까.”
본래 아틸라는 남서쪽 숲의 일이 마무리되면 레비아에게 틈새로의 진입을 요구할 생각이었다.
이유는 하나.
남부 대륙의 현 상황을 알고 싶기 때문이다.
‘틈새에 진입한 관조자는 대륙 곳곳을 엿볼 수 있다.’
아틸라는 최악의 상황엔 실력 행사를 해서라도 레비아를 틈새에 진입시킬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지금의 아틸라는 그것에 거부감을 느꼈다.
레비아가 바토리와 친근한 관계라는 것이 아틸라를 주저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아틸라는 차선책으로 플루토의 행방을 물었다.
하지만 답을 얻지 못했다.
바토리가 조금은 고민하는 얼굴로 아틸라와 레비아를 번갈아 바라봤다.
불현듯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레비아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플루토가 방문했을 때 ‘카잔 군주령’에 재밌는 일이 벌어졌다고 했어. 그쪽으로 간다는 말은 없었지만, 플루토를 찾는다면 들르는 것도 좋을 거야.”
레비아는 제국 지도 한 장을 일행에게 선물했다.
지도를 받아들며 바토리가 말했다.
“레비아. 넌 정녕 인간이 되고 싶더냐.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것이더냐.”
레비아는 물끄러미 바토리를 바라봤다.
대답은 없었으나, 바토리는 레비아의 눈빛에 담긴 것을 읽었다.
“장담할 수는 없지만, 기회가 온다면 네가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
잠시 침묵이 일었고, 레비아가 입을 떼었다.
“……남서쪽의 요툰을 섬멸해 줬으니, 감사의 표시로 말과 금화를 제공하겠어.”
“고맙구나. 허나 지난번에도 말 두 필을 받았는데, 아까 보니 영주성에 군마가 그리 여유 있어 보이진 않았다. 그러니 말은 두 필만 주어도 될 것 같구나.”
“응? 무슨 소리야 바토리. 케렌시아의 영주성엔 남는 게 군마라고.”
“아니다. 무리할 것 없단다 레비아. 두 마리만 주면 되느니라.”
“나 군마 많다니까? 대체 뭘 보고 군마가 없다는 말을 하는 거야? 우리 영주성에 놀고먹는 군마가 얼마나 많은데 그럴 소릴.”
“닥치고 두 마리만 내놓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