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 요툰과 드래곤 (2)
레드 드래곤(Red Dragon).
비늘의 빛깔에 따라 크게 여섯 종류로 구분되는 패영전의 드래곤 중 가장 포악한 성정을 지녔다.
붉은 비늘에서부터 알 수 있듯 레드 드래곤의 마법 속성은 ‘불’이며.
그런 이유로 다른 드래곤에 비해 무지막지할 정도의 화력(火力)을 지닌 브레스를 방출할 수 있다.
바로 지금처럼.
키랴랴랴랴랴랴!
레드 드래곤의 브레스가 요툰의 숲을 화마로 덮었다.
그러나 요툰도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숲 곳곳에 박혀 있던 바위가 대포알처럼 하늘로 발사됐다.
요툰은 레드 드래곤을 상대로 나무 공격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듯했다.
그리고 그 판단은 나쁘지 않았다.
크기가 작은 바위는 레드 드래곤의 브레스에 녹아 용암처럼 변해 흩어졌지만.
커다란 바위는 브레스의 화력을 뚫고 레드 드래곤을 위협했다.
붕. 부웅. 부우우웅.
레드 드래곤이 날개를 움직이며 바위를 피했다.
몸 안의 숨이 다한 것인지 레드 드래곤은 브레스를 멈췄다.
기회를 놓치지 않은 요툰이 재차 나무들을 쏘아 올렸다.
뿌드득……! 펏퍼퍼펑!
이번의 공격은 레드 드래곤을 상당히 위태롭게 만들었다.
레드 드래곤은 직전보다 더욱 빠르게 날개를 움직여 나무를 회피했다.
그러나 완벽하지 않았다.
몇 개인가의 나무가 드래곤의 사각을 노리며 달려들었다.
그때였다.
파캉!
드래곤을 가격할 것처럼 보였던 나무가 허공에 분해됐다.
아틸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뭐지?’
드래곤이 무언가의 힘을 발휘한 것은 아니다.
아틸라는 안력에 신경을 집중했다.
더 이상 브레스는 없었고, 활활 타오르던 요툰의 숲도 무서운 속도로 회복하고 있었기에 시야는 깨끗했다.
그래서 아틸라는 볼 수 있었다.
‘인간이 타고 있다.’
레드 드래곤의 등 위엔 인간 한 명이 앉아 있었다.
차림새로 보아 기사인 듯했고.
용족의 등 위에 올라탄 기사라면 정체는 뻔했다.
‘용기사.’
평범한 용기사가 아니다.
드래곤은 드레이크나 암피테르와는 급이 다른 용족.
용중용(龍中龍)이라 불리는 ‘드라코니안’을 제외한다면, 사실상 모든 용족 사이에서 정점에 선 존재다.
아틸라는 아벨의 머릿속에서 읽었던 생각의 파편 하나를 떠올렸다.
‘마스터(Master).’
파캉! 파캉! 파카카캉!
레드 드래곤을 덮치려던 나무들이 연이어 분쇄됐다.
아틸라는 그 원인이 용기사가 휘두르는 검에서 방출되는 검기(劍氣)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키릴의 신력이나 카르타고의 오러, 그리고 울딘의 전격 마법과 비슷하면서도 완전히 달라 보이는 기술.
가장 큰 차이는 용기사의 검이 붉은 광선처럼 빛나고, 검에서 내뿜어지는 기운이 실제로 불타고 있다는 것이었다.
‘마법검인가. 아니면.’
무엇이 됐든 용기사의 힘은 대단했다.
레드 드래곤을 궁지에 몰아넣을 정도로 강력한 면모를 보이는 요툰의 공격을, 용기사는 조금의 피해도 없이 완벽하게 막았다.
잠시 후엔 굳이 검을 휘두를 필요도 없게 되었다.
레드 드래곤의 입에서 재차 브레스가 뿜어졌기 때문이다.
파드드드드드드……!
불길을 만난 나무들이 순식간에 타 버렸다.
나무의 천적은 역시 불이었다.
그러나 요툰은 이렇게 될 것을 예감한 듯했다.
바위와 나무의 공격을 쏘아 내는 동안 요툰은 다음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지면에서 솟은 거대한 파도였다.
콰콰콰콰콰콰!
절벽처럼 솟아난 땅의 파도가 형상을 갖췄다.
그것은 거대한 팔이었다.
팔 끝에서 생성된 거인의 손아귀가 드래곤을 습격했다.
드래곤이 브레스의 방향을 틀어 그것을 공격했다.
그러나 거인의 손은 손가락 몇 개를 날려 버리면서도 드래곤의 지척으로 근접하는 것에 성공했다.
아틸라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근접전에선 거인이 유리하다.’
굳이 따지자면 이 요툰은 거인이 아니다.
아직까지도 요툰은 숲의 형상을 하고 있었고, 다만 그 안에서 거인의 일부로 보이는 커다란 손이 튀어나왔을 뿐이다.
아틸라는 이 요툰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내 머릿속에 이런 요툰은 존재하지 않는다.’
요툰은 크게 인간을 닮은 개체와, 짐승을 닮은 개체로 나뉜다.
‘이렇게 괴상한 형태의 요툰이라니.’
가능성은 두 가지다.
원래 이런 요툰이 존재했지만 아틸라가 몰랐거나.
아니면 다른 차원으로 이전한 요툰헤임 속에서 새로운 개체가 태어났거나.
퍼거걱!
거인의 손가락이 절단됐다.
이번에도 레드 드래곤을 위기에서 구한 건 용기사였다.
손가락을 잃은 거인의 손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갈랐다.
그 틈을 이용해 드래곤은 더욱 높은 곳으로 비상하려 했다.
하지만 더욱 길어진 거인의 팔이 드래곤을 방해했고, 나무와 바위를 탄환처럼 쏟아 냈다.
드래곤은 브레스와 날갯짓을 이용해 그것들을 무력화시켰다.
이제 전투는 지면이 아니라 공중에서 이뤄졌다.
카스피가 외쳤다.
“아, 아틸라! 이틈에 도망쳐야 하는 거 아냐?”
“마, 맞소! 저런 괴물들 사이에 끼어 있다간 뼈도 못 추리고 뒈질 거요!”
아틸라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눈에 봐도 레드 드래곤은 무지막지할 정도로 강하다.
아틸라는 안력에 더욱 신경을 집중해 드래곤을 노려봤다.
그러고는 직감했다.
‘세베스티아.’
덩치는 그리 크지 않지만, 사납기로 유명한 레드 드래곤 사이에서도 가장 흉포한 성정을 지닌 녀석이다.
덩치가 크지 않다는 것도 다른 레드 드래곤에 비해 그렇다는 것이지, 3레벨의 해방 스킬을 시전한 도롱뇽보다 훨씬 커다랬다.
‘저런 강력한 드래곤마저 페어링할 수 있다는 건가. 제국의 용기사는.’
아틸라는 순수하게 놀랐다.
설마 제국의 용기사가 드레이크를 넘어, 드래곤마저 페어링에 성공했으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심지어 세베스티아와 페어링한 용기사는 엄청난 실력자였다.
눈으로 확인된 건 그의 검에서 발하는 검기 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아틸라는 상대의 힘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
‘제국은 강하다.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욱.’
그뿐만이 아니다.
저 강력한 용기사와 세베스티아를 몰아붙이는 요툰 또한 상상을 초월하는 존재다.
아틸라는 인정했다.
지금 이 자리의 동료들이 전력을 다해 놈들과 싸운다 해도, 승리할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으리라는 것을.
‘드래곤은 신의 피조물 중 가장 신에 가까운 존재.’
관조자 시절의 바토리도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를 쓰러뜨리기 위해 리베르를 포함한 다른 관조자의 도움을 받았다.
물론 세베스티아가 당시의 드라콘 이스메니오스에 비견되는 존재는 아니다.
그러나 바토리는 약해졌고, 아틸라 자신을 포함한 동료들의 힘은 바토리의 공격력을 상회할 수 없다.
지금은 빠져야 한다.
그럼에도 아틸라가 바토리의 보호막을 혹사시키면서까지 이곳에서 버티고 있는 이유는 하나였다.
격렬하게 전투하는 저들의 힘을 최대한 파악해 두기 위해서다.
파캉! 파카캉!
키랴랴랴랴랴랴!
그어어아아아!
용기사의 검기, 드래곤의 브레스, 거인의 외침이 하늘을 물들였다.
절단된 거인의 살점과 불의 파편이 유성처럼 지면을 습격했다.
일행은 바토리의 보호막 덕에 안전했지만, 그것도 언제까지 유지될지는 몰랐다.
오토가 재차 소리쳤다.
“아, 아틸라 님! 벗어나지 않을 거요?”
“아틸라!”
끼아옹!
펀치까지도 위기감을 드러내며 울었다.
바토리가 말했다.
“아무래도 그만 자리를 떠야 할 것 같구나.”
그녀의 목소리는 흔들리는 촛불처럼 가늘었다.
바토리는 짧은 시간 동안 너무 많은 마력을 사용했다.
오토와 카스피는 알지 못했지만, 그녀는 세베스티아와 용기사가 이쪽을 감지하는 것을 막기 위해 상당한 수준의 배리어(Barrier) 마법을 추가로 발현했다.
아틸라는 그것을 알았다.
그리고 바토리가 상당히 지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상황에서 바토리의 힘이 없으면 일행은 무력하다.
“숲을 벗어난다.”
오토와 카스피가 반색했다.
일행은 뒤돌아 말을 달렸다.
그러나 위험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아틸라 님! 이, 이거 뭔가 이상하지 않소!”
오토의 말대로였다.
아틸라는 아무리 말을 달려도 제자리에 머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환술 같은 감각이었다.
바토리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이 숲 자체가 요툰이다. 그리고 녀석은 우릴 밖으로 내보낼 생각이 없는 것 같구나.”
“그, 그럼……!”
그것만이 아니었다.
숲의 지면은 수면처럼 흔들려 말의 움직임을 방해했고, 때로는 거센 파도가 되어 일행을 덮쳤다.
그때마다 가장 큰 활약을 한 건 바토리였다.
그녀가 살기 어린 표정으로 입가를 올렸다.
“여길 벗어나면 레비아를 만나야겠다.”
바토리는 레비아가 요툰의 정체를 짐작하고 있었으리라 생각했다.
레비아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터.
‘그런데도 우릴 이곳으로 보내다니.’
저 무시무시한 레드 드래곤을 몰아붙일 정도로 강력한 요툰이다.
용기사의 힘이 더해지지 않았다면, 이미 드래곤은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레드 드래곤은 완전한 상태가 아니다.’
바토리가 보기에 레드 드래곤은 본연의 힘을 완전히 내지 못하고 있었다.
1차로 용계에서 인간계로 넘어오며 어느 정도 힘을 제한받았고.
2차로는 용기사와 페어링하며, 용기사와의 동조율 때문에 힘의 일부가 봉인됐을 것이다.
‘발현되는 힘은 70퍼센트, 혹은 80퍼센트 정도.’
그러나 그런 상태의 레드 드래곤이라 해도 무지막지하게 강하다는 것만은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바토리는 자신이 모든 힘을 발휘한다면 저 드래곤을 쓰러뜨릴 수 있을지 생각해 봤다.
대답은 ‘가능하다’였다.
하지만 그건 실현할 수 없는 일이다.
‘레드 드래곤을 쓰러뜨리려면, 현자의 돌이 지닌 억제의 힘에서 벗어나 폭주의 마력을 쏟아 내야 할 터.’
그것의 후유증은 극심할 거다.
최악의 경우 바토리는 자신이 지닌 ‘신의 마력’을 견디지 못한 채 산산조각으로 분해될 것이다.
물론 바토리는 아틸라를 위해 죽는 것쯤은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 정도의 위기 상황이 아니다.
어떻게든 이곳을 벗어날 방법을 모색하는 편이 낫다.
게다가 레드 드래곤을 쓰러뜨린다 해도, 이곳엔 요툰이 남아 있었다.
“바, 바토리 아가씨! 그럼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 거요!”
“이, 이대로 우린 죽는 거야? 바토리! 아틸라아아아!”
카스피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했다.
바토리가 말했다.
“난 상당한 마력을 소실했다.”
바토리의 눈이 아틸라를 돌아봤다.
그러고는 미소했다.
“아무래도 이 자리에 없는 동료의 힘이 필요할 것 같구나.”
아틸라도 같은 생각을 했다.
물론 위험한 일이다.
그러나 이 상태가 지속되고, 점점 더 큰 위험으로 빠져드는 것보다는 나은 선택이다.
아틸라가 피식 웃었다.
“그런 것 같군.”
아틸라는 펀치에게 의지를 발현했다.
펀치가 꿀렁꿀렁 목울대를 움직였고, 이어 펀치의 입에서 도롱뇽이 튀어나왔다.
“케헥! 이렇게 갑자기 날 곰탱이의 입안에 가두다니! 이런 빌어처먹을 야만 미…….”
도롱뇽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도롱뇽의 몸이 순식간에 부풀었다.
[ 해방(解放)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