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 요툰과 드래곤 (1)
케렌시아의 영주 레비아는 남서쪽의 깊은 숲에 요툰이 등장했다고 했다.
‘여기서 남서쪽의 깊은 숲에 요툰 하나가 등장했어.’
‘놈을 쓰러뜨려 줘. 내가 원하는 보답은 그거야.’
일행은 그곳을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아틸라는 제국의 땅이 넓다는 것을 다시금 자각했다.
네 마리 말은 오랜 시간을 달렸지만, 마치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처럼 풍경이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아틸라는 자신이 알게 된 여러 사실들을 동료들에게 알리며 무료함을 달랬다.
“아니 그러니까, 지금 그 요툰인지 뭔지를 막기 위해 용계의 용족들이 중간계를 침범했다는 말이요?”
“확실하진 않다. 다만 그럴 가능성은 충분하다.”
아틸라는 울딘과 싸우는 내내 울딘의 머릿속을 읽었었다.
그렇게 울딘의 머릿속에서 찾아낸 파편들을 통해, 아틸라는 현 북부 대륙의 상황을 보다 세밀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울딘은 케렌시아의 용기사를 살해했다.’
애초부터 울딘은 순수하게 용병 일을 하기 위해 대륙을 떠도는 자가 아니었다.
‘그의 목적은 용기사와, 페어링 된 용족들을 살해하는 것.’
울딘뿐 아니라 동료 야만인들 역시도 용기사와 용족 살해의 전문가였다.
물론 용기사와 용족은 강하다.
그러나 울딘은 ‘요툰의 힘’을 지닌 특별한 인간이었다.
‘요툰은 드래곤의 천적이다.’
먼 옛날, 요툰 전쟁에서 드래곤은 엄청난 활약을 했다.
하늘을 자유롭게 비행하며 브레스를 퍼부을 수 있는 드래곤들은 지상의 요툰들에겐 가히 공포의 대상이었다.
물론 요툰들 중엔 ‘흐레스벨그’로 대표되는 비행 요툰도 존재했지만.
신의 가장 강력하고 위대한 피조물이라 불리는 드래곤의 상대는 될 수 없었다.
키랴랴랴랴랴!
드래곤이 브레스를 뿜을 때마다 요툰들이 불에 타올랐다.
요툰의 왕 이미르는 고심했다.
주신의 울타리에 갇힌 신들이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없다는 점은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그 신들이 자신들을 대체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피조물 ‘드래곤’을 만들어, 이렇게까지 요툰들을 위협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이미르는 드래곤을 쓰러뜨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결론은 낙뢰(落雷)였다.
파지짓……! 파짓……! 파지지지짓……!
이미르는 요툰들의 세계에서는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존재.
이미르의 의지에 의해 요툰들은 전격의 힘을 손에 넣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낙뢰를 떨어뜨릴 수 있는 요툰은 거인(巨人)이었고.
거인들은 낙뢰를 이용해, 손을 뻗어도 닿지 못했던 하늘 위의 드래곤을 공격했다.
그 방법은 효과가 있었다.
드래곤은 낙뢰를 피해 지상 가까운 곳까지 내려올 수밖에 없었고, 그런 드래곤의 목을 거인들이 잡아챘다.
부드득. 부득……!
거인의 괴력은 대단했다.
근접 전투에서 거인은 드래곤을 압도했다.
수많은 드래곤이 거인의 손에 찢겨 죽었다.
그리고 헤아릴 수도 없는 영겁의 세월이 흘러 아틸라가 마주한 울딘의 모습은, 낙뢰를 발현하는 거인과 같았다.
동료들 또한 울딘에게서 키클롭스의 모습을 봤다.
아틸라는 줄곧 의문을 갖고 있었다.
‘왜 북부 대륙과 남부 대륙은 대격변의 전조가 이렇게까지 다르게 나타나는 것인가.’
남부 대륙은 ‘마계’와 ‘명계’가 중간계를 침범하고 있다.
‘마계의 악마들. 그리고 명계에서 건너온 카르타고와 데스나이트들.’
반면 이곳, 북부 대륙에선 마계와 명계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나로 이어진 대륙이지만 상황은 판이하게 달랐다.
아틸라는 레비아를 만났을 때 그것에 대해 물었고, 레비아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제국에서 마계와 명계의 세계선이 겹쳐지는 기운을 감지한 적이 없다.’
또한 그녀의 말에 의하면, 용계와 요툰헤임의 그림자가 제국에 드리운 건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용계가 먼저이고 요툰헤임이 나중인지.
아니면 요툰헤임이 먼저이고 용계가 나중인지는 모른다.
다만 아틸라는 직감했다.
‘드래곤과 요툰은 빛과 어둠과도 같은 존재.’
요툰 전쟁 이후 중간계에서 모습을 감춘 건 요툰만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드래곤 또한 용계 너머로 사라졌다.
그랬던 요툰헤임과 용계의 존재들이.
‘비슷한 시기에 다시 중간계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수많은 제국인들에게 목격되고, 현재는 용기사들과 함께 북부 하늘을 누비게 된 용족과 달리.
요툰의 존재는 아직도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그 두 가지 구별되는 상황엔 분명한 인과 관계가 있다.
‘요툰은 요툰헤임 속에서 진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
지금의 중간계는 요툰이 힘을 발휘하기에 적합한 장소가 아니다.
그래서 요툰들은 중간계에 모습을 드러낸 뒤에도 철저하게 제 모습을 감추며, 때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물론 드래곤도 가장 강력한 힘을 발현할 수 있는 장소는 용계다.’
그러나 신의 피조물인 드래곤은, 마찬가지로 신의 숨결이 닿은 중간계에서도 본신의 힘 대부분을 발현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용족들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용인들이 태어났다.
아틸라는 용기사의 존재가 마치, 요툰 전쟁 때 드래곤을 조종했던 신의 역할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모든 일에는 인과가 있다.’
아틸라는 용족과 요툰의 등장이 서로의 존재 때문에 벌어진 필연적인 결과라고 여겼다.
용족은 요툰을 멸하기 위해.
요툰은 용족을 멸하기 위해.
게다가 아틸라는 울딘이 자신과 조우하게 된 이유를 알고 있었다.
‘울딘은 요툰의 둥지로 이동하고 있었다.’
즉 아틸라와 울딘의 목적지는 같았다.
“도착한 것 같구나.”
바토리가 말했다.
어느새 일행은 울창한 숲길로 접어들었다.
“킁킁. 바토리 할망구 말이 맞다. 이 안에서 요툰의 냄새가 난다.”
펀치의 입안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며 도롱뇽이 말했다.
일행은 주저 없이 숲으로 들어갔다.
“어이, 야만 미물.”
아틸라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도롱뇽은 알아서 이어 말했다.
“이 안에 있는 녀석, 꼭 잡아야 하는 거냐.”
“그건 왜 묻는데.”
“예감이 좋지 않아.”
아틸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물론 요툰은 강하다.
상대가 요툰헤임 속의 요툰이었다면, 아틸라도 굳이 위험을 무릅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숲속에 등장한 요툰은 본연의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상태.
게다가 이곳은 수해도, 칼날 산맥도 아니다.
아무리 강력한 마법을 사용해도 문제가 없다는 것.
‘여기서는 바토리가 실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도롱뇽의 해방 스킬까지도 활용할 수 있다.
바토리와 도롱뇽의 힘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다는 시점에서 아틸라는 이미 자신이 있었다.
신(神)급의 초월자라도 등장하지 않는 이상, 결코 패배할 수 없는 조합.
그래서 아틸라는 일축했다.
“시끄럽다. 도롱뇽 새끼.”
어차피 이 세계는 앞으로 더욱 거대한 위협이 닥칠 것이다.
요툰 또한 어차피 만나게 될 상대다.
지금 경험해 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
“닥치고 요툰이 어디에 있는지나 안내해.”
“아니 걱정돼서 일부러 말해 줘도 난리네 빌어처먹을 야만 미물 새끼.”
“뭐라고?”
“아, 아무 말도 안 했다!”
도롱뇽은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지우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도롱뇽의 표정에 의아함이 담겼다.
그러고는 다시금 콧구멍을 발름대며 후각에 집중했다.
“……이상하네.”
“뭐가.”
“요툰 녀석과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아.”
“그럼 멀어진다고?”
“그것도 아니야.”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일행은 분명 숲의 안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그렇다면 요툰과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져야 한다.
그런데 도롱뇽은 숲에 들어선 직후부터 지금까지 요툰과의 거리가 좁혀진다는 느낌을 조금도 받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멀어지는 것도 아니다.
바토리도 숲에서 미심쩍은 기운을 감지했다.
도롱뇽의 후각만큼은 아니지만, 바토리 역시 도롱뇽이 느끼는 것과 비슷한 감각을 경험하고 있었다.
그리고 도롱뇽과 달리, 바토리는 지금의 상황이 벌어질 수 있는 환경을 가정해 냈다.
그녀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당장 이곳에서 나가야 한다!”
바토리가 저렇게 당황하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만큼 지금의 상황이 위험하다는 이야기.
그래서 일행은 이유를 묻는 것보다 탈출이 먼저라는 생각을 했다.
네 마리 말이 동시에 뒤로 돌았다.
왔던 길을 빠르게 되달리기 시작했다.
“바, 바토리! 뭐가 어떻게 된 건데!”
카스피가 물었지만 대답할 필요는 없었다.
그녀의 두 눈으로 똑바로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
“흐에에엣! 저, 저게 뭐야!”
지면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이어 저만치 앞의 지면이 절벽처럼 솟아올랐다.
그제서야 일행 모두는 깨달았다.
요툰은 숲속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이 숲, 자체가 바로 요툰이었다.
‘빌어먹을. 이런 요툰이 있다고?’
그오어어어어!
숲의 모습을 하고 있던 요툰이 비명을 질렀다.
놈은 자신을 찾아온 이방인을 반기지 않았다.
수많은 거대한 나무들이 몸을 비틀었다.
일행을 습격했다.
콰드득! 콰득! 차아앙!
아틸라는 흑철검을 들어 쇄도하는 나무들을 베었다.
오토와 카스피도 마찬가지였다.
이번만은 바토리도 힘을 아끼지 않았다.
그녀의 손에서 펼쳐진 고대 마법은 대단했다.
아틸라, 오토, 카스피가 베어 낸 것의 몇 배에 달하는 나무를 혼자 힘으로 제거했다.
투트트트트틋……!
나무들이 파쇄당하자 이번엔 절벽처럼 솟은 지면이 일행에게 쏟아졌다.
마치 흙과 나무로 이뤄진 거대한 해일을 보는 듯했다.
바토리의 입에서 다시금 고대의 마법이 흘러나왔다.
그때였다.
“멈춰! 바토리 할망구!”
도롱뇽이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바토리가 주문 영창을 멈췄다.
도롱뇽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 역시도 도롱뇽이 감지한 것과 같은 기운을 감각했다.
바토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펄럭.
하늘을 가르는 거대한 날갯짓 소리.
도롱뇽과 바토리에 이어 그것을 포착한 건 아틸라였다.
아틸라는 펀치에게 의지를 전달해 도롱뇽을 삼키게 했다.
“꾸에엑……!”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도롱뇽이 펀치의 인벤토리로 들어갔다.
아틸라는 직감했다.
지금 하늘 위로 접근하고 있는 존재는 도롱뇽의 기척을 알아챌 수 있다.
그래서 도롱뇽을 펀치의 인벤토리로 숨겼다.
그오어어어어!
거대한 숲의 모습을 한 요툰 역시 또 다른 위협을 감지했다.
일행을 공격하던 것을 멈추고, 저 멀리 푸른 하늘을 향해 가시처럼 나무들을 곤두세웠다.
퍼엉! 퍼엉! 퍼퍼퍼퍼펑!
나무들이 하늘로 발사됐다.
그것은 실로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오토와 카스피가 비명을 지르며 귀를 막았다.
그리고 하늘 위에서 들려왔다.
키랴랴랴랴랴랴!
거대한 불의 숨결이 공중을 뒤덮었다.
그것이 미사일처럼 솟아오르던 나무들을 잿개비로 만들었다.
이어 지상마저 잠식했다.
콰콰콰콰콰콰!
요툰의 숲이 불탔다.
바토리의 보호막이 일행을 보호했다.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아틸라는 저 무시무시한 브레스를 쏘아 낸 존재를 확인했다.
눈앞의 화마(火魔)만큼이나 붉은 날개를 펼친 거대한 용족.
레드 드래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