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 야만전사 (5)
차앙! 병사들이 저마다의 무기를 뽑았다.
그러고는 소리쳤다.
“무기를 버려라! 너희들을 체포하겠다!”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이었다.
아틸라는 물끄러미 병사들을 바라봤다.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죄목으로 우릴 체포하겠다는 거지?”
“다, 닥쳐라! 네놈들은 제국의 용기사를 살해했다!”
엥? 뭐라고?
“용기사를 살해하고도 다시 이곳에 돌아오다니!”
“도, 도망칠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거다! 지금 영주님의 기사단이 달려오고 있다!”
아틸라는 병사들을 살폈다.
살기 어린 목소리와 달리 그들은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겁을 먹은 건가.’
자세한 상황은 모르지만, 아무래도 제국의 용기사가 북부 야만전사의 손에 죽은 사건이 일어난 모양이었다.
어쩌면 누명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지금 눈앞에 펼쳐진 상황이 아틸라 일행에겐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라는 것.
“오해가 있는 것 같군. 우린 오늘 이 도시에 처음 들어왔다.”
“시, 시끄럽다! 야만인이 그렇게 유창한 제국어를 사용한다는 것부터가 수상한 일이다!”
빌어먹을. 바토리의 말이 바로 현실이 되다니.
아틸라는 바토리의 환술로 이 자리를 벗어나 볼까 생각했다.
그러나 이미 수많은 사람이 아틸라의 얼굴을 봤다.
게다가 병사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영주의 기사단마저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다.
“일단 기다려 보자꾸나.”
바토리가 말했다.
아틸라는 한숨을 뱉으며 주인장이 가져왔던 술병을 꿀꺽꿀꺽 들이켰다.
“우, 움직이지 마라!”
병사들이 외쳤지만 아틸라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토가 못생긴 강아지 같은 눈을 뜨며 아틸라를 봤다.
그러고는 입모양으로 말했다.
‘저, 저도 한 모금만……!’
아틸라는 오토를 무시한 채 혼자 술병을 비웠다.
오토의 눈이 절망으로 변했다.
무어라 소리치려는 오토의 입을 카스피가 틀어막았다.
‘다, 닥치라고 영주 나리!’
아틸라는 바토리를 바라봤다.
그녀는 지금의 상황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오래지 않아 출입문이 열리며 기사들이 들어왔다.
아틸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린 너희가 찾고 있는 자들이 아니다.”
기사들 사이에서 한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한눈에 봐도 기사들의 대장으로 보이는 자였다.
“그건 우리가 판단한다. 무기를 버리고 투항해라.”
“싫다면 어쩔 셈인가.”
“실력 행사를 하는 수밖에.”
아틸라는 슬슬 짜증이 났다.
마음 같아서는 모두 베어 버린 뒤 자리를 뜨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조용히 도시를 떠나겠다. 다시 말하지만 우린 너희가 찾는 자들이 아니다.”
“나 또한 다시 말하지. 그건 우리가 판단한다.”
기사대장이 검을 뽑았다.
“마지막 기회다. 무기를 버려라.”
아틸라는 결정을 내렸다.
무엇을 선택하든 위험은 따른다.
그렇다면 자신과 동료들의 실력을 믿는 편이 낫다.
아틸라도 흑철검을 뽑았다.
“먼저 건드리지 않는다면, 누구도 해치지 않겠다.”
통할 리 없는 협박이었다.
아틸라는 이미 자리의 기사들을 처리하고 도시를 벗어나는 과정을 머리에 그리고 있었다.
물론 추격이 뒤따를 거다.
그뿐 아니라 앞으로 제국을 벗어날 때까지 귀찮은 일이 끊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것도 해 보지 않고 놈들의 손에 잡히는 것보단 나은 선택이다.
“움직이지 마라. 야만전사.”
기사대장의 말에 아틸라는 피식 웃었다.
“싫은데.”
기사대장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그것이 신호라도 된 것처럼 기사들이 검을 뽑았다.
오토와 카스피도 얼굴을 굳히며 전투 준비를 했다.
그때였다.
“아무래도 기사님이 오해를 하신 듯하군요.”
바토리의 목소리였다.
그녀의 청량한 음성과 예스러운 말투가 기사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이어 기사들은 바토리의 아름다운 외모를 보며 더욱 시선을 고정했다.
“무슨 오해를 했다는 거지?”
“우리들은 이곳, 에레트리아 군주령의 4대 도시 중 하나인 케렌시아의 영주를 만나러 왔습니다. 영주께 전해 주시지요. 그분의 오랜 친구인 바토리 에르제베트가 왔다고.”
영주의 손님이라는 말에 기사대장의 눈썹이 꿈틀했다.
기사와 병사들도 놀란 얼굴로 바토리를 봤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가장 놀란 건 다름 아닌 아틸라, 오토, 카스피였다.
‘여, 영주 나리. 바토리가 지금 뭐라는 거야? 무슨 영주의 친구가 어쩌고 한 거 같은데.’
‘나, 나도 분명 들었소. 이야기하는 걸로 봐선 이곳의 영주와 아는 사이인 것 같은데.’
아틸라는 눈썹을 찌푸리며 바토리를 돌아봤다.
‘저 빌어먹을 할망구가.’
분위기를 보아하니, 바토리는 분명 이곳의 영주를 알고 있는 눈치였다.
아틸라는 얼마 전 바토리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나 역시 제국에 대해서는 그다지 아는 바가 없단다.’
‘난 남부 대륙 위주로 세상을 들여다보았느니라. 북쪽은 내 관심사가 아니었지.’
아틸라와 눈을 맞추며 바토리는 우아한 미소를 머금었다.
기사대장은 바토리의 말을 반신반의했지만 무시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병사 하나를 영주성으로 보냈다.
아틸라 일행과 기사단 간에 팽팽한 대치가 이어졌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벌컥 여관 문이 열렸다.
병사가 소리쳤다.
“소, 손님들을 어서 모시고 오라는 영주님의 분부입니다!”
* * *
잠시 후 일행은 영주성 안에 들어와 있었다.
“영주님의 귀한 손님인 줄도 모르고, 실례가 많았습니다.”
기사대장이 고개를 숙였다.
바토리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일행은 널찍한 방으로 안내됐다.
회의실로 쓰는 방 같았는데, 영주의 취향이 반영된 것인지 상당히 화려했다.
일행이 자리에 앉자 하녀가 간단한 음식과 마실 것을 가져다주었다.
일행만 남게 되자마자 카스피가 물었다.
“바토리. 정말로 여기 영주와 아는 사이인 거야?”
“그렇단다.”
“그, 그치만 바토리는 제국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고 말했었잖아.”
“흐응. 그런 줄 알았는데 이 도시에 들어오니 불현듯 생각이 나더구나.”
“말장난 치기는. 음흉한 할망구 같으니.”
아틸라가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바토리가 배시시 웃으며 무어라 말하려 하는데 문이 열렸다.
바토리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히 젊고, 또 아름다운 여인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하녀라기엔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 그 여자는 매끄러운 발놀림으로 걸어와 상석에 앉았다.
“네가 날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바토리.”
그제서야 아틸라, 오토, 카스피는 눈앞의 여자가 케렌시아의 영주라는 것을 깨달았다.
바토리가 답했다.
“나도 널 찾게 될 줄은 몰랐다. 레비아.”
“옆의 인간들은 뭐지? 새로운 여흥거리라도 찾아낸 건가?”
“글쎄. 너야말로 이 새로운 여흥거리에 제법 깊이 빠져든 것 같구나.”
“뭐, 부정하진 않겠어. 그런데 저 사내 말인데.”
영주, 레비아의 눈이 아틸라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북부 야만인이 아닌 것 같은데?”
아틸라가 피식 입가를 올렸다.
그리 길진 않았지만 두 여인의 대화를 들으며, 아틸라는 바토리와 레비아가 어떻게 알게 된 사이인지 직감했다.
“그렇단다 레비아.”
“억울하겠군. 북부 야만인도 아닌데 용기사 살해의 누명을 쓰다니.”
“그 문제는 네가 잘 해결해 주리라 믿겠다.”
“응? 내가 왜?”
“그러지 않겠다면, 내가 널 지금 죽일 테니까.”
레비아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진심이야? 바토리.”
“그렇단다.”
“내가 보기에 넌 이전의 힘을 지니고 있지 않은 것 같은데도?”
“시험해 보겠다면 말리진 않겠다.”
바토리는 미소하고 있었지만 눈빛만은 얼음처럼 싸늘했다.
오토와 카스피는 두 여인의 대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둘은 두 여인에게서 가공할 살기가 발산되는 것을 느꼈다.
끊어질 듯 팽팽한 살기가 공기를 당겼다.
먼저 살기를 거둔 건 레비아였다.
“후……. 알았어. 알았다고. 그러니까 그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지 좀 마.”
바토리도 살기를 거뒀다.
그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살기라니. 설마 내가 오랜 친구에게 그런 무례한 짓을 할 리가 있겠느냐.”
레비아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바토리를 봤다.
그러고는 말했다.
“뭐, 용기사 살해 건에 대해선 내가 손을 써 주겠어. 케렌시아 가문의 증표를 하나 내주도록 하지. 이게 있으면 에레트리아 군주령 안에서만큼은 불필요한 일을 겪지 않아도 될 거야.”
“고맙구나. 보답으론 무얼 원하느냐.”
“……정말 보답을 할 생각은 있고?”
“일단 말해 보려무나.”
“근데 바토리.”
레비아가 눈짓했다.
그 의미를 알아챈 바토리가 미소했다.
“괜찮단다 레비아. 이들은 모두 내 동료들이니까.”
레비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용계의 용족들이 제국을 침범한 건 당연히 알고 있겠지?”
“물론. 그래서 제국에 용기사가 생겨났고, 그 인과로 우리 일행이 용기사 살해의 누명을 쓴 것이 아니겠느냐.”
“그런데 말이야. 제국의 영역을 침범한 건 용계의 용족만이 아니야.”
“계속 말해 보려무나.”
“요툰헤임.”
“요툰헤임?”
“응. 요툰헤임의 괴이들이 제국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어.”
바토리는 인상을 찌푸렸다.
레비아의 말대로 요툰헤임이 중간계의 침범을 시작했다면, 이건 엄청난 재앙이었다.
“확신할 수 있는 것이더냐.”
“물론이지. 제국의 용기사가 이곳을 찾았던 것도 그 ‘요툰’을 제거하기 위해서였으니까.”
“그러니까 네 말은 요툰이 중간계를 침범했고,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 파견된 용기사가 북부 야만인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말이더냐.”
“정확해.”
“북부 야만인의 실력이 그렇게 뛰어나다는 건가? 제국의 용기사를 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아틸라의 물음이었다.
레비아는 바토리를 볼 때와는 완전히 달라진 눈빛으로 아틸라를 봤다.
“요툰의 힘이 부활을 시작했으니까.”
아틸라는 요툰헤임과 요툰에 대해 알고 있었다.
아주아주 먼 옛날.
주신의 울타리를 벗어나길 원했던 일부 신들은 주신과의 투쟁을 시작했고.
‘주신 전쟁’이라 불리는 이 거대한 전쟁의 여파로 천계엔 균열이 일었다.
균열은 새로운 세계로 이어지는 통로를 생성시키며 죽은 신과 천사의 시체를 마구잡이로 빨아들였다.
그렇게 신과 천사의 숨결은 신세계의 대기와 구름이 되었고.
뼈와 살은 산과 대지가 되었으며.
눈물과 피는 강과 바다를 만들었다.
이렇게 탄생한 세계가 인간을 포함한 여러 지성 종족의 터전 중간계다.
그리고 이 신화 속엔 비밀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중간계가 생성되기 전의 이 세계에 이미 강력한 생명체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들의 이름이 바로 ‘요툰(Jotunn)’이고.
아울러 이 세계가 중간계가 되기 전, 요툰들이 살았던 세상을 ‘요툰헤임(Jotunheim)’이라 말한다.
그러나 아틸라는 레비아의 말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요툰의 힘이 부활을 시작한 것과, 북부 야만인의 무력이 뛰어난 것이 대체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이어진 레비아의 말이 의문을 해소시켜 주었다.
“그러니까 당연히 요툰의 피를 이어받은 북부 야만인들의 힘도 강해진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