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 야만전사 (1)
아벨의 눈이 커졌다.
그는 몹시 놀랐다.
수해 외곽부 최강의 포식자 오우거를 단칼에 쓰러뜨리는 인간이라니.
‘설마 황궁 기사단이!’
아니다.
그럴 리 없었다.
황궁 기사단은 오직 황제만을 수호하는 제국 최강의 무력 집단.
황제의 특명이라도 있지 않는 한 수해에 나타날 리 없다.
그것을 증거하듯 거구의 사내는 찬란한 황금빛 갑주가 아닌, 흑빛의 갑주를 착용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저자는……!’
그가 끝이 아니었다.
강철갑주를 입은 또 다른 사내와 단검을 든 여자가 전투에 합류했다.
그들은 놀라운 연계 공격을 펼치며 오우거들을 차례로 격파했다.
아벨은 눈도 깜빡이지 못한 채 그 광경을 봤다.
쿵. 쿠웅. 쿵.
네 마리 오우거가 바닥에 쓰러졌다.
흑빛 갑주의 사내가 한숨을 뱉었다.
검과 방패에 묻은 핏물을 털어내고, 몸에 갈무리했다.
사내가 투구를 벗었다.
길게 자란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
‘북부의 야만전사?’
들은 적이 있다.
제국에서 북쪽.
그리고 거인과 설인의 땅보다는 남쪽의 어느 혹한의 대지에 살고 있다는 야만인들.
그들은 눈앞의 사내처럼 커다란 체격에,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을 지녔다고 한다.
‘북부 야만인이 어떻게 여기에…….’
아벨은 경계했다.
북부 야만인들과 제국은 사이가 좋지 않다.
제국은 북쪽의 탐사를 오랜 세월 이어 가는 중이고, 때문에 북부 야만인들과는 크고 작은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아벨은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세로스는.’
세로스는 몸 이곳저곳이 파먹힌 채 널브러져 있었다.
규칙적으로 가슴이 움직이는 것으로 보아 죽은 건 아니었다.
긴장감 속에서 아벨은 조금 안심했다.
드레이크는 회복력이 뛰어나다.
어떻게든 숨통이 붙어 있다면 살아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아벨의 평안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야만전사가 다가왔기 때문이다.
‘무, 무슨 살기가……!’
야만전사의 위압감은 대단했다.
그는 천천히 발을 움직이며 다가왔지만 아벨의 눈엔 마치 태산이 쏟아지는 것처럼 보였다.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아벨은 부드득, 입술을 깨물었다.
입안에 진한 피맛이 느껴지고서야 조금 정신이 돌아왔다.
‘난 제국의 자랑스러운 용기사다. 야만인에게 굴복하지 않아.’
그럼에도 아벨은 가급적 저자과 전투를 벌이고 싶지 않았다.
그의 놀라운 무력을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만족과 말이 통할 리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야만족의 언어를 조금이라도 알아두는 건데……!’
“도움이 필요한가.”
놀라운 일이었다.
야만전사의 입에서 유창한 제국어가 흘러나왔다.
아벨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야만전사가 다시 말했다.
“도움이 필요하냐고 물었소.”
아벨은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아틸라는 눈앞의 제국 기사를 똑바로 응시했다.
강한 살기를 발산하며 다가간 건 효과가 있었다.
아틸라는 제국 기사에게 심안을 발현하는 것에 성공했다.
‘날 북부의 야만전사로 알고 있다.’
원래 아틸라는 제국 기사를 미행하려 했다.
녀석의 뒤를 밟으면 하콘 스틸숄더와, 더 나아가 하워드 스틸숄더의 행방까지 알아낼 수 있을 거라 짐작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다.
‘빌어먹을 오우거 새끼들.’
아틸라는 제국 기사의 드레이크가 오우거를 쓰러뜨리길 바랐다.
하지만 무리였다.
드레이크는 극도로 지쳐 있었다.
고작 한 마리의 오우거를 쓰러뜨렸을 뿐이다.
오우거의 먹잇감으로 전락해 가는 드레이크를 보며 아틸라는 아주 잠시 고민했다.
위기에 빠진 제국 기사를 도울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해.
선택은 전자였다.
아틸라는 오우거에게 달렸다.
오토와 카스피에게 입을 꾹 다물고 싸우란 말도 잊지 않았다.
‘제국어는 대륙 공용어와는 다르다.’
사실 제국어와 남부어의 뿌리는 하나다.
‘고대 왕국의 언어.’
그러나 제국과 남부 왕국은 상당히 오랜 세월 단절됐고, 자연스레 언어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아틸라는 오토와 카스피에게 정숙할 것을 요구했다.
둘의 대화를 들은 제국 기사가 일행의 정체를 간파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오토와 카스피는 전투 도중에 입을 열지 않았다.
오우거를 쓰러뜨리는 것보다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둘에겐 더욱 고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고대 왕국의 언어를 잘 알고 있는 바토리는 예외였다.
그리고 아틸라는.
[ 제국어 패치가 완료되었습니다. ]
예상대로였다.
제국의 기사와 눈이 마주친 순간, 아틸라는 제국어를 유창하게 사용할 수 있는 몸이 되었다.
그래서 말했다.
“도움이 필요한가.”
그러면서 아틸라는 제국어와 남부어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언어의 기본은 동일하다.
굳이 구분하자면 서울말과, 아주 심한 사투리의 차이 정도.
“도움이 필요하냐고 물었소.”
그제서야 제국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 당신들은 누구요.”
아틸라는 말을 아꼈다.
자칫 말을 잘못한다면 자신들이 남부에서 왔다는 것을 들킬지도 모른다.
그건 아틸라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누구인 것 같소. 우리가.”
아틸라는 반대로 질문했다.
다소 웃긴 상황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아틸라에겐 정보가 필요했다.
제국 기사는 조금 당황한 모습이었다.
무언갈 골몰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물론 무엇을 생각하는지, 아틸라의 눈엔 번히 들여다보였다.
- ……뭐지? 저 물음은.
- 자신이 야만인이라는 걸 숨기고 싶어 하는 건가.
- 그러고 보니 들은 적이 있다.
- 야만인 중에서 북부를 떠나 용병 생활을 하는 자들이 있다고.
아틸라의 눈이 빛났다.
아벨이 입을 열었다.
“상대의 이름을 묻기 전에 자신의 소개부터 해야 한다는 것을 잊었군. 난 클라우디우스 제국 제3군단 소속의 용기사, 아벨 카리누스요.”
“난 아틸라. 북부에서 왔소. 제국에서 만난 동료 몇과 용병 일을 하고 있지.”
아벨은 자신이 짐작이 맞았다는 것을 알고는 다소 안심했다.
그제서야 아틸라의 동료들을 하나씩 제대로 바라봤다.
‘강철갑주의 전사는 한때 어느 왕국의 기사였던 것 같군. 가죽옷을 입은 여자는 살수 출신인가.’
그때 지금껏 아벨의 눈에 띄지 않았던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벨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여인의 외모가 너무나도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저, 저 여인도 용병이라고?’
여인의 곁엔 곰인지 강아지인지 모를 자그만 동물이 헥헥 혀를 내밀고 있었다.
여인이 부드럽게 미소했다.
아벨은 그 순간 심장이 미친 듯이 박동하는 것을 느꼈다.
“우린 수해에서 길을 잃었소. 북쪽으로 돌아가는 길을 알고 있다면 동행했으면 좋겠군.”
아틸라의 목소리가 아벨의 정신을 깨웠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아틸라는 직전보다 상당히 퉁명스러워진 어투를 사용하고 있었다.
‘뭐지. 내가 무슨 심기라도 건드린 것인가.’
아틸라는 아벨에게 동료들의 이름을 알려 줬다.
오토라 불린 강철갑주의 사내와, 카스피라 불린 가죽옷의 여자는 말없이 고개만을 까딱했다.
상당히 과묵한 자들이라고, 아벨은 생각했다.
그러나 바토리라 불린 여인은 달랐다.
그녀는 상당히 고급스러운 어휘를 사용하며 아벨에게 호감을 표했다.
다시금 아벨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아틸라가 말했다.
“서두르는 게 좋을 거요. 몬스터들의 밥이 되고 싶지 않다면.”
조금 전보다 더욱 불쾌한 기색을 내뿜는 아틸라를 보며 아벨은 현 상황을 깨달았다.
그랬다.
자신은 여전히 수해 안에 있다.
서둘러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아벨은 세로스에게 달려갔다.
‘응?’
세로스의 몸을 살핀 아벨은 놀랐다.
놀라울 정도로 회복돼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이유야 어찌 됐든 다행이었다.
아벨은 세로스 위에 올라탔다.
문제는 아틸라 일행이었다.
용족은 자신과 페어링된 용기사 외에는 등에 태우는 것을 거부한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흐응. 이제 편히 갈 수 있겠구나.”
바토리라 불린 여인이 어느새 아벨의 등 뒤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세로스는 조금도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오토, 카스피, 그리고 아틸라까지.
그들 역시 차례로 세로스의 등에 오르는 것에 성공했다.
아벨은 이 믿기지 않는 광경을 보며 적잖은 충격을 느꼈다.
‘어떻게 된 거지? 오우거를 쓰러뜨려 준 것에 대한 세로스의 작은 답례인 건가?’
그것 말고 마땅한 이유는 떠오르지 않았다.
아벨은 지도와 나침반을 확인했다.
그의 의지를 받은 세로스가 북으로 달렸다.
* * *
무사히 수해를 빠져나온 아벨은 관문 도시를 향했다.
“제3군단 소속 용기사, 아벨 카리누스다.”
아벨 덕에 아틸라 일행은 어려움 없이 관문을 통과했다.
관문을 지나며 아벨은 아틸라 일행이 어떻게 관문을 넘어 수해로 들어간 걸까, 생각했다.
그러나 이내 다른 생각에 밀려났다.
아벨은 나머지 두 용기사가 걱정됐다.
죽었을 확률이 높겠지만, 직접 시체를 본 것은 아니다.
그래서 아벨은 관문 도시에 사흘간 머무를 예정이었다.
혹 작전 중 수해에서 떨어지게 되는 상황을 대비해, 임무 시작 전부터 군단장이 직접 명한 내용이었다.
어차피 스테로페스에 관한 보고는 암피테르 용기사들의 증언으로도 충분했으니까.
“목숨을 구해 준 것에 대한 답례를 해야겠지. 필요한 것이 있다면 말해주시오. 원한다면 3군단에 자리를 마련해 줄 수 있소.”
“그건 됐고, 맛 좋은 술과 고기를 좀 먹었으면 좋겠군.”
아벨은 아틸라 일행과 여관으로 들어갔다.
세로스가 쉬어 갈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창고를 여럿 가진 아주 거대한 건물이었다.
잠시 후, 목욕을 마치고 1층으로 내려온 일행의 앞에 술상이 차려졌다.
“……!”
오토와 카스피의 눈이 별처럼 빛났다.
그러나 아틸라의 명령을 잊지 않았기에, 말로 표현하지는 못했다.
잔뜩 입이 근질거린다는 듯한 둘의 얼굴을 보며 아틸라가 피식 웃었다.
식사가 시작됐다.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나고, 따뜻한 물로 목욕을 마친 뒤, 고기와 술이 입에 들어가자 아벨의 마음은 점차 풀어졌다.
아벨은 뛰어난 실력을 지닌 용기사지만 나이는 스물둘에 불과했다.
게다가 바토리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그녀가 눈웃음을 짓는 통에, 아벨은 꿈을 꾸고 있는 듯한 착각도 느꼈다.
“물어볼 게 있소. 아벨.”
그런 그에게 아틸라가 몇 번인가 말을 걸었다.
아벨은 자신이 대답할 수 있는 선에서 대답을 했다.
군의 극비 사항이거나, 북부 야만인에 관한 내용은 심사숙고를 한 뒤 신중히 입을 떼었다.
그때마다 아벨은 아틸라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것을 봤다.
‘……왜 웃는 거지?’
아벨은 그 웃음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다만 말투로 보아 상당히 오랜 시간 북부를 떠나 용병 생활을 했고, 그래서인지 야만인 답지 않게 제법 머리가 좋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오토와 카스피는 몇 번인가 서로 귀엣말을 나눴다.
그들의 모습을 보며 아벨은 정말로 과묵하고, 또 신중한 용병들이라는 것을 다시금 느꼈다.
그러면서 자신이 너무 많은 말을 한 것은 아닌지 내심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러나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아벨은 지금까지도, 그리고 이후에도 제국에 누가 될 만한 발언은 하지 않았다.
다만 마음으로 말했을 뿐이다.
그것도 아주 자세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