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 제국 (5)
‘아틸라라고?’
랄프는 기억했다.
얼마 전 하워드의 명으로, 몇 명의 전사들과 황금바위산을 찾았을 때.
황금바위의 왕인 크누트가 그 이름을 언급했었다.
‘저자가 바로 그 아틸라란 말인가.’
랄프는 아틸라의 갑주를 다시금 살펴봤다.
그리고 확신했다.
‘드워프의 손으로 만들어진 물건이다.’
랄프는 웃었다.
인간 전사 아틸라가 무슨 까닭으로 이곳을 찾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이야말로 스테로페스를 쓰러뜨릴 절호의 기회였다.
* * *
한편 아틸라는.
생각지도 못한 스테로페스의 등장에 크게 놀란 상태였다.
‘이 녀석이 어떻게 감옥 밖으로 나온 거지?’
황금바위산의 아르게스와 마찬가지로.
강철바위산의 스테로페스를 꺼내려면 스틸숄더의 특별한 힘이 필요하다.
‘하워드 스틸숄더가 녀석을 꺼냈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아틸라는 스테로페스의 몸을 살폈다.
녀석의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무언가에 심하게 얻어맞은 자국이 군데군데 드러나 보였다.
심지어 가슴엔 제법 커다란 구멍이 뚫려있기도 했다.
‘뭐에 맞은 거지?’
드워프의 도끼는 아니다.
거대한 바위, 혹은 스테로페스 못지않게 커다란 생명체에게 당한 것 같았다.
아틸라는 다른 거인의 존재를 떠올렸지만, 그럴 가능성은 낮았다.
‘빌어먹을. 뭐가 뭔지 모르겠군.’
아틸라는 일단 녀석을 쓰러뜨려야겠다고 생각했다.
키클롭스 삼형제는 중간계의 평화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
‘녀석은 무언가에 호되게 당하고 왔다. 쓰러뜨리려면 지금이 기회다.’
게다가 스테로페스를 쓰러뜨리면, 아틸라의 목적인 오르피나의 반지를 얻을 확률은 크게 증가할 거다.
아틸라는 도발의 외침을 시전했다.
[ 도발에 성공했습니다. ]
[ 일정 시간 동안 대상이 오직 시전자만을 공격합니다. ]
‘좋아.’
아틸라는 흑철검 대신 무휼을 들고 있었다.
키클롭스를 상대하는 데 흑철검은 그다지 좋은 무기가 아니다.
파캉! 캉! 카아아앙!
아틸라는 스테로페스의 상처를 집중 공격했다.
스테로페스의 피부는 돌처럼 단단했지만, 상처 부분만은 예외였다.
- 네 이놈! 하찮은 필멸자야!
스테로페스가 고함을 질렀다.
그러면서 아틸라에게 마구 주먹을 휘둘렀다.
아틸라는 흑철방패로 스테로페스의 공격을 막았다.
그러면서 의아함을 느꼈다.
‘키클롭스 삼형제는 전격 마법을 사용하는 반신이다.’
천둥의 브론테스.
번개의 스테로페스.
벼락의 아르게스.
실제로 황금바위산의 아르게스는 일행에게 무시무시한 벼락 공격을 선사했었다.
그런데 눈앞의 스테로페스는 전격 마법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있다.
왜일까.
아틸라는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인 건가.’
만약 그렇다면, 그 이유는 스테로페스의 상처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
이유야 어찌 됐든 아틸라에겐 달가운 일이었다.
아틸라는 무휼의 성력을 차곡차곡 쌓았다.
카스피도 귀수를 발현해 스테로페스를 공격했다.
그녀의 귀수는 스테로페스의 몸에 착실히 데미지를 입혔다.
“호우호우호우우우!”
저 괴상한 소리를 내는 건 드워프가 아닌 오토였다.
오토는 오랜만에 만난 드워프가 반가웠는지, 자꾸만 저렇게 외치며 흘끗흘끗 드워프들의 반응을 살폈다.
다행히 몇 명인가의 드워프가 같은 소리를 내며 호응했다.
오토가 킬킬대며 검과 방패를 뻗었다.
“역시 이 외침은 신이 난다니까! 안 그렇소 아틸라 님! 호우우우!”
“호우호우!”
오토와 드워프들이 스테로페스를 공격했다.
바토리는 후방에서 잡기술로 일행을 지원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바토리와 도롱뇽의 마법은 수해 근처에서는 사용할 수 없다.
끼아옹!
펀치가 울었다.
아틸라는 펀치를 바토리와 도롱뇽의 호위로 남겼었다.
‘돕고 싶다는 건가. 펀치.’
아틸라도 펀치가 이쪽에 합류하는 편이 나을 거라 생각했다.
아무리 상처 입었어도 스테로페스는 반신이다.
시간이 걸릴 뿐, 저 정도의 상처는 충분히 회복할 수 있다.
아틸라는 펀치를 불렀다.
혀를 헥헥대며 펀치가 달려왔다.
[ 거대화(巨大化) ]
우어어어어!
거대화한 펀치가 스테로페스의 무릎을 후려쳤다.
그간 착실히 레벨을 올린 펀치의 일격은 상당히 강력했다.
[ 야수의 발톱 ]
[ 발톱에 가격 당한 타깃의 회복력이 10% 저하됩니다. ]
아틸라가 펀치를 공격에 합류시킨 가장 큰 이유였다.
스테로페스의 회복력이 저하됐다.
아틸라는 자신에게 집중되는 스테로페스의 공격을 막으며, 틈틈이 무휼로 반격했다.
이윽고 상태창이 떠올랐다.
[ 축성의 인장 발동 효과가 한계치에 도달했습니다. ]
아틸라는 나이아드의 눈물로 상승한 정신력을 이용해, 무휼의 형상을 바꿨다.
파지지지짓……!
무휼은 이제껏 본 적 없을 정도의 거대한 검이 되었다.
불길함을 느낀 스테로페스가 소리쳤다.
- 네놈들! 어리석고 비열한 피조물들아!
아틸라는 펀치의 공격으로 너덜너덜해진 스테로페스의 두 무릎을 차례로 베었다.
절단까진 아니었지만,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스테로페스가 무릎을 꿇었다.
스테로페스의 키가 낮아졌다.
아틸라의 팔다리 근육이 꿈틀거렸다.
풍차처럼 몸을 회전시키며 스테로페스의 몸을 베었다.
콰드드드득!
스테로페스의 상체가 절반 정도 잘렸다.
과연 거인족답게 뛰어난 맷집이었다.
그러나 그 정도로도 충분했다.
아틸라는 벌어진 놈의 가슴에 손을 넣고, 심장을 잡아 뽑았다.
- 하찮은…… 필멸자 주제에……!
스테로페스의 입에서 시커먼 핏물이 쏟아졌다.
아틸라는 운이 좋았다는 것을 인정했다.
스테로페스가 무언가에 크게 당한 채로 등장하지 않았다면, 놈을 쓰러뜨리는 것이 몇 배는 힘들었을 것이다.
‘전격 마법이 없었던 것이 컸다.’
아틸라는 두근두근 박동하는 스테로페스의 심장을 바라봤다.
그것에서 묘한 기운을 느꼈다.
‘이건……?’
아틸라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그러나 잠시였다.
아틸라는 스테로페스의 심장에 무휼을 꽂았다.
스테로페스의 외눈이 희번덕 뒤로 돌아갔다.
쿠웅!
거인의 몸이 바닥에 쓰러졌다.
* * *
살아남은 드워프는 많지 않았다.
아틸라가 전투에 끼어든 이후에도 상당한 드워프가 죽었다.
그러나 그런 암담한 상황 속에서도 드워프들은 승리를 자축했다.
드워프들의 낙천적이면서도 단순한 성정 때문이었다.
“당신이 크누트 스톤핸드가 말했던, 검은늑대의 아틸라인가.”
아틸라는 자신에게 다가온 드워프 전사를 한눈에 알아봤다.
‘강철바위의 무쇠도끼, 랄프 아이언액스.’
강철바위 드워프족 최강의 전사다.
아틸라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나의 이름은 랄프 아이언액스. 도움을 준 것에 대해 먼저 감사를 표하지.”
그렇게 말한 랄프가 오토, 카스피, 바토리를 차례로 돌아봤다.
랄프의 시선은 바토리 앞에서 가장 오랫동안 머물렀다.
그녀가 마법사라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다.
바토리는 그 눈빛이 부담스러웠는지, 아니면 그걸 핑계 삼고 싶었던 것인지 아틸라에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러고는 속삭였다.
‘저 난쟁이가 날 음흉하게 쳐다보는구나.’
바토리의 말을 무시하며, 아틸라가 랄프에게 말했다.
“스테로페스가 감옥을 벗어난 이유에 대해 알고 싶군.”
“우리도 모른다. 제국의 인간들을 상대하는 중에 갑자기 나타났으니까.”
아틸라의 눈빛이 변했다.
“제국의 인간들이라고?”
바토리, 오토, 카스피도 표정을 바꾸며 랄프를 봤다.
“그렇다. 제국의 인간들이 강철바위성을 침공했다.”
“그들이 제국에서 왔다는 증거는?”
“놈들은 북쪽에서 날아왔다. 날개 달린 커다란 파충류를 타고.”
아틸라는 휘파람을 불어 자신의 흑마를 불렀다.
말 위엔 암피테르의 머리가 매달려 있었다.
“이렇게 생겼던가. 그 날개 달린 파충류는.”
아틸라가 암피테르의 머리를 랄프에게 내밀었다.
랄프의 눈이 커졌다.
“어떻게 이것을……! 너 역시 제국의 인간들과 전투를 치른 것인가.”
“그건 아니다. 그저 탈리 왕국의 윅시프 백작령에서 시체 한 마리를 발견했다. 쓰일 일이 있을까 싶어 머리만 잘라 왔지.”
머리는 부패하지 않도록 바토리의 마법적인 처리가 되어 있었다.
나머지 드워프들도 황급히 달려와 암피테르의 머리를 살폈다.
그러고는 서로 맞는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틸라는 랄프에게 그동안 벌어졌던 일에 대해 설명을 요구했다.
그리고 잠시 후.
아틸라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하워드 스틸숄더가 납치당했다고?”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아틸라는 오르피나의 반지를 획득하기 위해 어떻게 하워드를 설득할 것인가만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설마 하워드가, 제국의 기사들에게 납치당했을 줄이야.
“후…….”
아틸라는 고개를 흔들었다.
오르피나의 마지막 성물이 남부 대륙을 떠났다.
아틸라도 자세히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 제국으로.
‘일이 꼬여도 아주 단단히 꼬여 버렸군.’
랄프에게 물었다.
“놈들이 드워프들을 납치한 이유에 대해 짐작 가는 것이 있나?”
기대감 없이 던진 물음이었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이들 역시 제국의 인간은 처음으로 마주한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랄프는 생각지도 못한 대답을 했다.
“짐작 가는 것이라면 있다.”
“있다고?”
랄프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그는 기억했다.
강철바위의 대장장이 몇이 실종됐던 사건을.
그리고 오늘, 강철바위성을 침공한 제국의 기사들은 드워프의 기술력으로 만들어진 무구를 갖고 있었다.
백 퍼센트 확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랄프는 자신의 눈과 감을 믿었다.
게다가 하워드를 포함해, 놈들에게 납치당한 드워프들의 공통점은.
‘대장장이.’
강철바위의 대장장이들은 눈에 띄는 강철 목걸이를 착용하고 있다.
그래서 랄프는 분명하게 기억했다.
납치당한 드워프들은 모두 대장장이였다.
랄프는 그 사실들을 아틸라에게 전했다.
아틸라의 얼굴이 심각하게 변했다.
“대장장이들의 실종이 있었고, 그 뒤 드워프의 기술로 만들어진 무구를 착용한 제국 기사들이 나타나, 대장장이들만 골라서 납치했다는 건가.”
그러고 보니 스테로페스가 출현한 시기도 묘했다.
제국 기사들이 성에 착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스테로페스가 나타났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거인의 등장에 드워프들이 당황한 사이, 놈들은 대장장이들을 포박해 달아났다.
‘그렇다면 스테로페스를 감옥에서 해방시킨 것 역시 제국이란 말인가.’
하지만 그것만은 믿기 어려웠다.
키클롭스의 감옥은 오직 스틸숄더의 핏줄만이 열 수 있으니까.
그러나 아틸라는 이내 하나의 가능성을 깨달았다.
“하워드의 아들, 하콘은 어떻게 됐지?”
랄프의 대답은 아틸라의 예상과 같았다.
“실종됐던 대장장이들 중 하나가 바로 하콘이었다.”
“그래. 그랬던 거군.”
아틸라는 모든 상황을 파악했다.
제국은 하콘의 피를 이용해 키클롭스의 감옥을 연 거다.
그리고 무언가의 방법을 사용해 스테로페스를 공격했고, 강철바위성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의문은 남았다.
스테로페스의 감옥은 수해 안에 있다.
아무리 제국의 힘이라 해도, 수해를 함부로 건드리기는 힘들다.
아틸라는 스스로도 믿기 어려운 가정을 해봤다.
‘설마 제국은.’
수해를 정복할 방법을 알아냈다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