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 제국 (4)
랄프는 강철바위 드워프의 위대한 전사였다.
그는 강철바위산이 지닌 지리적 위험에 대해 잘 알았다.
남으로는 인간들의 왕국.
동, 서, 북으로는 몬스터들의 땅 수해.
그리고 북쪽의 수해를 넘어 더욱 북으로는, 인간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자들이 세운 대제국.
그 사이에 위태롭게 낀 것이 강철바위산이었고, 그래서 랄프는 어릴 적부터 전투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드워프는 육체 능력을 극한까지 갈고닦아야 한다.’
엘프, 그리고 몇몇 인간은 마법이란 힘을 사용한다.
그러나 드워프에겐 마력이 없다.
따라서 드워프는 육체를 강화해야 했고, 또 강화된 육체를 바탕으로 휘두를 강력한 무기가 필요했다.
‘강철바위산이 살아남으려면 강한 전사와, 뛰어난 무기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랄프는 자신이 대장장이보다는 전사의 자질이 강하다는 것을 알았다.
한편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왕의 후계자인 하워드는 전사의 자질보다 대장장이로서의 능력이 뛰어났다.
역대 강철바위산의 모든 대장장이들과 비교해도 최고일 정도로.
‘하워드의 대장 실력은 정말 대단하군!’
‘맞아! 녀석이 만든 도끼를 써 보니 아주 손에 착착 감기더라니까?’
‘자네도 써봤나? 나도! 누음앗핫핫핫하!’
지금까지 강철바위 왕의 자리는 스틸숄더 가문의 것이었다.
하지만 하워드는 왕의 자리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는 대장일을 할 때 행복감을 느꼈다.
게다가 그의 친구 랄프는 뛰어난 전사였고, 그래서 강철바위 드워프들은 하워드 다음으로 랄프를 가장 강력한 차기 왕의 후보로 보았다.
‘그래도 차기 왕은 역시 하워드지! 스틸숄더 가문의 특별한 힘을 무시할 수는 없다고!’
‘하지만 이제 이야기가 달라졌어! 하워드는 왕의 자리에 관심이 없어 보이더군!’
‘게다가 랄프는 위대한 전사지. 이쯤에서 왕가가 한 번쯤 바뀌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그러나 결국 왕은 하워드가 되었다.
그것엔 여러 요인이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라면 역시, 랄프가 하워드 이상으로 왕의 자리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난 왕의 자리에 걸맞은 드워프가 아니다.’
랄프는 자신이 왕의 자질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순수한 전사였다.
오직 도끼를 들고 싸울 때만이 살아 있음을 느꼈다.
또한 랄프는 알았다.
하워드가 누구보다 뛰어난 왕의 자질을 갖고 있다는 것을.
‘하워드는 강철바위 드워프를 아낀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녀석이지.’
랄프는 그것이야말로 왕이 가져야 할 최고의 덕목이라 보았다.
랄프의 눈은 정확했다.
하워드는 위대한 군주가 되었다.
그 뒤로 많은 세월이 흘렀다.
강철바위산엔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고위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대륙에 거대한 공간 환술을 드리웠다는군!’
‘다행히 메피스토펠레스는 소멸했지만, 환술의 여파로 중간계에 여러 혼란이 닥치고 있다던데!’
‘그것 때문인가? 얼마 전부터 수해의 몬스터들이 심상치 않은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나!’
그것은 사실이었다.
웬만해선 결코 수해를 벗어나는 일이 없는 몬스터들.
그런데 수해 바깥에서 몬스터를 목격했다는 말이 최근 자주 들려오고 있었다.
게다가 그와 비슷한 시기에 북쪽으로 철을 구하러 나갔던 대장장이 몇이 실종됐다.
‘그런데 메피스토펠레스가 소멸됐다고?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지?’
‘듣고 놀라지나 말게! 아틸라라는 이름의 인간 전사와, 그의 동료들이 쓰러뜨렸다는군!’
‘이 친구 또 헛소리를 하는군! 고작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고위악마를 소멸시킬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이 사실이란 말일세! 얼마 전 하워드의 명으로 황금바위산을 찾았을 때, 그곳의 군주인 크누트 스톤핸드가 랄프에게 직접 했던 말이니까!’
‘뭐? 크누트 스톤핸드가? 랄프에게?’
‘그렇다니까? 심지어 크누트는 메피스토펠레스를 쓰러뜨릴 당시 인간 전사 아틸라의 동료였다는군!’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버서커 카르타고가 데스나이트가 되어 부활했다는 소문이네.’
‘나도 들었어! 얼마 전엔 카스티야 왕국을 점령해 거점으로 삼았다고 하던데.’
‘요즘 몬스터들도 더욱 자주 수해를 벗어나고 있다 하더군.’
‘그래서 오늘도 랄프가 전사들을 이끌고 다녀오지 않았나!’
‘하워드도 성의 방어벽을 더욱 높일 생각을 하고 있네.’
‘그러고 보니 황금바위산은 이미 오크들과 한차례 대전쟁을 벌인 적이 있다고 하던데!’
황금바위산에서 벌어진 일이라면, 강철바위산에서 벌어진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
강철바위산, 황금바위산, 청동바위산은 모두 수해를 근처에 두고 솟아오른 산.
몬스터에 대한 위험성은 비슷하다.
‘성벽을 더욱 높여라!’
강철바위산은 몬스터와의 전쟁에 대비했다.
그런데 전쟁의 서막은 지상에서가 아닌, 하늘 위에서 시작됐다.
그것도 북쪽 하늘에서.
퀴리릭!
퀴리리리릭!
‘저, 저게 뭐지!’
드워프들의 눈이 커졌다.
북쪽 하늘을 날아온 인간들.
그들은 날개 달린 파충류를 탄 채로, 강철바위성을 공격했다.
콰앙! 쾅! 콰아아앙!
하늘에서 돌덩이가 떨어졌다.
파충류들은 각자 아가리에 커다란 돌덩이를 물고 있었고, 일제히 성으로 떨어뜨렸다.
‘저, 저게 무슨……!’
‘피해! 모두 피하라고!’
강철바위 드워프들은 그날, 제국의 기사를 처음 보았다.
그들은 날개 달린 파충류, 암피테르를 능숙하게 몰며 드워프들을 괴롭혔다.
물론 드워프들은 그것이 암피테르라는 것을 알지 못했지만 말이다.
‘석궁을 쏴! 놈들을 떨어뜨려!’
‘아무리 쏴도 맞지를 않는다고!’
‘뭐가 저렇게 빠른 거야!’
드워프들은 근접 전투의 강자다.
그들은 살을 맞대는 육탄전에서만큼은 압도적인 전투력을 보이지만.
원거리 전투에서는 약점을 드러낸다.
‘빌어먹을! 또 온다!’
제국의 2차, 3차 부대가 연이어 날아와 돌덩이를 떨어뜨렸다.
드워프들은 석궁을 쏘며 항전했지만, 제국의 기사들에겐 조금의 피해도 줄 수 없었다.
‘하워드!’
‘랄프!’
하워드와 랄프도 전면에 서서 싸웠다.
물론 하워드가 전사보다는 대장장이의 자질이 빼어난 드워프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한 명의 위대한 전사였다.
본래 스틸숄더는 뛰어난 무력을 바탕으로 지도자의 위치에 오른 가문이다.
‘놈들이 내려온다!’
제국 기사들이 일제히 하강을 시작했다.
준비한 돌덩이가 바닥난 것인지, 아니면 지금부터는 육탄전으로 돌입해도 승산이 있다고 판단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워드와 랄프를 중심으로 뭉쳐!’
‘북쪽의 인간들을 모조리 도륙하자!’
‘호우호우!’
드워프들은 용감하게 싸웠다.
하워드와 랄프가 선두에 섰다.
그러나 그들은 적을 섬멸하는 것에 실패했다.
그것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제국의 기사들은 남부 왕국의 기사 못지않은 검술을 갖고 있었고.
둘째, 그들은 개인전보다 단체전에서 더욱 뛰어난 기량을 발휘했으며.
셋째, 거기에 더해 그들 모두는 남부의 기사들이 지니지 못한 어떤 특별한 힘을 사용했다.
‘저, 저게 무슨……!’
카아앙!
제국의 기사들은 마치 마법 같은 기술을 썼다.
게다가 그들이 끌고 온 파충류는 홀로 여러 명의 드워프를 상대했다.
놈들은 단순히 하늘을 날뿐인 존재가 아니었다.
무시무시한 포식자였다.
‘크헉……!’
‘끄아아아아!’
소름 끼치는 비명이 성 안을 울렸다.
드워프들은 물러서지 않고 전진했다.
‘돌격하라! 북쪽의 침략자를 한 놈도 남김없이 도륙해라!’
‘호우호우!’
랄프는 생각했다.
제국의 기사들이 정체불명의 파충류와, 마법 같은 힘을 지니고 있긴 하지만.
‘강철바위 드워프에겐, 놈들에게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드워프 대장장이가 제작한 강력한 무기.
‘육탄전에선 어떤 무기를 사용하는지가 매우 중요하다. 제아무리 제국이라 해도, 드워프 대장장이의 무기를 압도할 순 없다.’
랄프는 확신했다.
애초부터 키클롭스 삼형제가 세 개의 바위산에 자리를 잡은 건, 그곳에서 가장 훌륭한 철이 나오기 때문이다.
게다가 드워프의 대장 기술은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
그렇다면.
‘제국의 무기는 결코 강철바위의 무기를 넘어설 수 없다.’
그러나 전투를 이어 가며 랄프는 점차 덜미에 소름이 돋아나는 것을 느꼈다.
제국 기사들의 무기는 뛰어났다.
강철바위의 무기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았다.
아니, 그 정도 차원이 아니었다.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랄프는 제국 기사들이 지닌 갑옷과 무기에서 낯익은 감각을 느꼈다.
랄프의 머릿속에, 어느 날 실종됐던 강철바위 대장장이들이 떠올랐다.
‘설마……!’
그때였다.
콰아아아앙!
엄청난 폭음이 성벽을 울렸다.
랄프는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의 눈이 부릅떠졌다.
‘저것은!’
외눈박이 거인이 성문을 부수며 성에 난입하고 있었다.
드워프들은 저것이 무엇인지 직감했다.
키클롭스 삼형제 중 둘째인 스테로페스!
‘어떻게 키클롭스가 이곳에!’
그러나 그런 것을 생각할 틈은 없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제국 기사들에 이어, 지상에선 거인이 침공했다.
게다가 저 거인은 자신을 배신한 강철바위 드워프에게 가공할 적개심을 드러내고 있다.
촤르륵! 촤르르르륵!
드워프들이 거인에게 정신을 판 잠깐의 틈을 이용해 제국 기사들이 강철 그물을 던졌다.
그것이 하워드를 포함한 몇몇 드워프의 몸을 포박했다.
‘하워드!’
제국 기사들이 다시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그물에 포박된 드워프들의 몸도 하늘로 솟았다.
‘빌어먹을! 하워드가 잡혔어!’
‘구출해! 어떻게든 구출하라고!’
그러나 이미 손 닿지 못하는 곳으로 떠오른 동료들을 구할 방법은 없었다.
석궁을 쏘는 것도 위험했다.
랄프가 이를 악물며 외쳤다.
‘살아남은 전사들은 집결하라! 성을 버리고 남하한다! 이후 전열을 재정비해 성을 탈환한 뒤, 하워드를 구하러 간다!’
‘호우호우!’
드워프들은 랄프의 말을 따랐다.
하워드가 사라진 지금, 자신들을 이끌 수 있는 존재는 랄프였다.
랄프는 전사들과 함께 성을 버리고 남하를 시작했다.
동쪽, 서쪽, 북쪽은 모두 수해가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거인이 뒤를 쫓아왔다.
- 네 이놈들! 신을 배신하고 이종족과 손을 잡다니이이이!
거인, 스테로페스의 분노는 대단했다.
게다가 놈의 발은 상상 이상으로 빨랐다.
‘커헉……!’
‘크허어억……!’
놈의 손에 많은 드워프들이 목숨을 잃었다.
랄프는 더 이상 도주가 상책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반격을 시작하라!’
드워프들은 스테로페스를 향해 결사 항전을 시작했다.
그러나 스테로페스는 강했다.
너무나도 강했다.
- 어리석은 피조물 같으니! 감히 신을 배신한 대가를 치러 보아라!
랄프는 절망이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그때였다.
파아아앙!
등 뒤에서 무언가가 엄청난 속도로 돌진해 왔다.
그것은 인간이었다.
그리고 한눈에 봐도 상당히 잘 만들어진 갑주를 입고 있었다.
파카아아앙!
인간 전사의 짤막한 검이 스테로페스의 몸에 꽂혔다.
그와 동시에 하늘에서 사슬낫이 쏘아졌고, 또 다른 인간 전사 한 명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히익! 아틸라 님! 그, 그렇게 갑자기 돌진하면 어쩌자는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