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 제국 (2)
바토리는 대답을 기다리는 눈으로 아틸라를 봤다.
그러나 아틸라의 입술은 침묵을 지켰다.
대답을 회피하는 건 아니다.
다만 아틸라는 무어라 답해야 좋을지 몰랐다.
바토리의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만 자야겠구나.”
바토리는 다시 자리에 누웠다.
그러고는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잠든 바토리의 옆얼굴을 보며, 이유는 몰랐지만 아틸라는 아버지의 꿈을 떠올렸다.
그날 꿈속에서 아버지는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줬었다.
‘아버지는 다른 세계에서 왔으니까. 그래서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야 해.’
‘그리고 너 역시도, 머지않아 너의 세계로 돌아가야 하지.’
‘우리가 보는 세상은 진짜가 아니니까.’
그것을 떠올릴 때마다 아틸라는 갑갑함을 느꼈다.
그저 꿈이라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아틸라는 그것에서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오늘 아버지와 나눈 대화는 기억하지 못하게 될 거야.’
그 말 때문에 더욱 아틸라는 그것이 꿈이라 생각하기 어려웠다.
실제로 아틸라는 아버지와의 추억 대부분을 기억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사라졌을 당시의 자신이, 그렇게까지 어린 나이가 아니었음에도.
‘하지만 머지않아 기억하게 될 거야. 네가 진짜 세상으로 오게 되면. 그래서 너 자신을 조금씩 되찾게 되면.’
아버지의 꿈은 거기서 끊겼다.
똥이라도 싸다 끊긴 것처럼, 아주 찝찝하게.
그리고 최근 들어 아틸라는.
아주 조금씩이지만 아버지에 대한 것을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길게 자란 흑발.
심연처럼 검은 눈동자.
길고 오뚝한 콧날.
그 아래로 시원스럽게 미소하던 입술과……
그때였다.
아틸라의 머릿속에 번쩍! 번개가 쳤다.
‘왜 기억하지 못했지?’
꿈에서 봤던 아버지의 모습은 그게 전부가 아니다.
아틸라는 불현듯 그 이후의 상황을 생생하게 떠올렸다.
‘바토리를 지켜 줘.’
아틸라는 아연해진 얼굴이었다.
‘……아버지가, 바토리를 알고 있었다고?’
그랬다.
아버지는 자신에게 바토리를 지켜 달라고 말했다.
게다가 그 직전에 했던 말은.
‘그렇게 되면, 그땐 반드시.’
분명한 의미가 담긴 말이다.
‘이전엔 지키지 못했다는 건가? 아버지가?’
아틸라의 사고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다.
바토리가 했던 이야기를 더듬었다.
‘내가 열 살도 되기 전의 어린 시절, 난 왕국을 찾아온 두 명의 남자를 만난 적이 있었다.’
두 남자는 엘과 아자젤.
그때의 아틸라는 잠시 이런 생각을 했었다.
아자젤이 말했던 ‘그분’이, ‘엘’일지도 모른다는.
그리고 지금 아틸라는, 아버지가 등장했던 꿈의 마지막 내용을 기억해 냈다.
그렇게 도출할 수 있는 가설은.
아버지와, 아자젤이 말한 그분과, 엘이라는 존재, 모두가.
‘하나의 인물일 수 있다는 것.’
아틸라는 욕지기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믿고 싶지 않은 가설이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정황이 들어맞는다.
아자젤이 지구의 인간 김도현을 알고 있었던 이유도.
‘역시 그분의 말씀대로 당신은 재밌는 인간이에요. 김도현 씨.’
아버지가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던 이유도.
‘아버지는 다른 세계에서 왔으니까.’
아울러 아버지가 바토리를 알고 있었던 이유까지도.
‘바토리를 지켜 줘.’
그러자 자연스레 떠올랐다.
‘바토리는 말했었다.’
엘과 아자젤은 사르데니야의 왕을 만났다.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바토리도 알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나 왕과의 면담 이후, 엘과 아자젤은 왕성에 머물렀다.
‘엘은 바토리에게 친근하게 대했다.’
엘과 아자젤은 자신들을 가리켜 ‘보냄을 받은 자’, 즉 ‘사도’라 소개했다.
누구의 보냄을 받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아틸라는 그 존재가 ‘주신’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생각했다.
이유는 있었다.
아틸라는 라일의 몸에 담긴 메피스토의 기억을 심안으로 관찰한 적이 있었고.
그 안에서 메피스토펠레스는.
사도의 존재에 대해 이렇게 말했었다.
‘신과 악마의 관찰자.’
그리고 아틸라가 생각하기로, 신과 악마를 관찰할 수 있는 존재란 뻔했다.
‘엘과 아자젤은 주신의 보냄을 받아 사르데니야 왕국에 왔다. 그리고 왕을 만난 뒤, 한동안 왕성에 머물렀다.’
엘은 바토리에게 대륙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러면서 엘은 이런 이야기도 했다.
‘사르데니야 왕국 위에 또 다른 왕국이 생겨나고, 그것이 제국이 되고, 또 그것이 완전히 다른 것으로 바뀔 때쯤?’
아틸라는 확신했다.
‘엘은 미래의 일을 알고 있었다.’
바토리가 인간이었을 시절.
그러니까 북부 대륙의 어딘가가 고대 왕국 사르데니야였던 시절.
당연하게도 그땐 제국이란 것이 없었다.
엘의 말대로 잿개비가 되어 사라진 사르데니야 왕국 위엔 인간의 왕국이 생겨났고.
그곳에서 태어난 어느 영웅이 북부를 통일해 제국을 건국했다.
‘엘은 사르데니야 왕국이 멸망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그때의 엘은 바토리를 구하지 않은 것일까.
‘그리고.’
엘은 어떻게 미래를 알고 있었던 걸까.
* * *
라일은 눈을 떴다.
얼마 만에 뜨는 눈인지, 앞이 선명하게 보이지 않았다.
라일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머지않아 알게 되었다.
자신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여긴.’
아무런 특징이 느껴지지 않는 작은 방.
멍하니 천장과 벽을 둘러보던 라일이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복부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일었다.
‘……그렇군. 난 분명 카르타고에게.’
카르타고의 검이 자신의 몸을 파고들던 순간을 라일은 또렷이 기억했다.
옆구리의 살갗이 분리되고, 근육이 찢기고, 마침내 장기를 헤집으며 파고들던.
그때를 떠올리자 소름이 돋아났다.
‘내가 어떻게 살아있는 거지.’
회복될 수 있는 상처가 아니다.
라일은 복부 깊숙한 곳까지 진입한 차가운 검신을 선명하게 느꼈었다.
라일은 상의를 들어 제 몸을 바라봤다.
무지막지한 상처였다.
그러나 눈으로만 봐도 섬뜩한 그 상처는 조금씩이지만 분명하게 아물고 있었다.
그제서야 라일은 무언갈 짐작했다.
끼익.
때마침 문이 열리며 여자 한 명이 들어왔다.
초면인 듯 구면 같은 얼굴.
단정한 경무장 차림의 여자는 허리춤에 독수리가 양각된 백금빛 아밍 소드를 착용하고 있었다.
여자가 환히 웃으며 말했다.
“깨어나셨군요. 라일 플라마 적마탑주.”
라일은 상대가 누구인지 짐작했지만, 그럼에도 물었다.
“당신은.”
“키릴 크레센시아. 성 크레센시아 기사단의 단장입니다.”
자신의 짐작이 맞았다는 걸 확인한 라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복부에서 재차 통증을 느끼며 얼굴을 찌푸렸다.
키릴이 다가와 말했다.
“적마탑주께서는 중상을 입으셨습니다. 게다가 카르타고의 마기는 적마탑주의 몸 깊숙이 파고들어 상처의 치유를 더디게 만들고 있지요.”
그제서야 라일은 이상한 점을 감지했다.
이쯤 되면 메피스토가 무언가 말을 걸었어도 한참 전에 걸었을 상황이었다.
라일은 정신을 집중하며 메피스토를 불렀다.
대답은 없었다.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
메피스토의 기척은 분명 느껴진다.
다만 멀리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것에 조금은 안도하며, 라일이 물었다.
“키릴 크레센시아. 그대가 날 구해 준 겁니까.”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그게 무슨.”
키릴이 미소하며 말했다.
“적마탑주를 서둘러 치유해 위험 상황을 막은 건 저이지만, 버서커 카르타고를 쫓아낸 건 다른 인물이거든요.”
“다른 인물이라면.”
라일은 고개를 갸웃했다.
키릴 크레센시아는 샹크리스 왕국 최강의 기사다.
만약 샹크리스에 카르타고를 물러나게 만들 만한 실력자가 있다면, 키릴 외에는 생각할 수 없다.
“아무것도 기억 못하시는 것 같군요.”
그렇게 키릴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 * *
키릴은 아틸라의 편지를 받자마자 성기사단을 움직였다.
왕가와 교회도 키릴을 막지 않았다.
아틸라의 부탁은 그 정도로 의미가 있는 일이다.
“성 크레센시아 기사단! 출발한다!”
라일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키릴은 아틸라가 일러 준 방향대로 말을 달렸고, 그 길의 끝에서 하늘을 나는 드래곤을 발견했으니까.
“저게 무슨……!”
“다, 단장! 드래곤입니다!”
드래곤을 보자마자 키릴은 카르타고의 등장을 직감했다.
‘역시 편지의 내용은 사실이었군.’
또한 적마탑주 라일이 무척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으리라는 것도 알았다.
머지않아 키릴은 라일과 카르타고로 추정되는 두 인물을 발견했다.
‘저자가 버서커 카르타고……!’
지금껏 말로만 들었을 뿐, 실제로 카르타고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대단한 위압감이다.’
그러나 감상이나 하고 있을 틈은 없었다.
누가 봐도 라일은 패색이 짙은 싸움을 하고 있었으니까.
키릴은 서둘러 말을 달렸다.
“단장! 드래곤에게서 별다른 징후는 보이지 않습니다!”
다행히도 드래곤은 성기사단에게 위협을 가하지 않았다.
그보다 놀라운 일은 따로 있었다.
버서커 카르타고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성기사단에게 눈곱만큼의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우릴 무시한다고?’
믿기 힘든 일이었다.
자신을 무시하는 것도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이 자리에 함께한 어느 ‘특별한 인물’까지 무시하는 상황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어떻게 된 거지?’
그러나 키릴은 의문을 무시하며 말을 달렸다.
이윽고 카르타고의 검이 라일의 옆구리를 파고들었고, 때마침 자리에 도착한 키릴은 라일에게 몸을 날리며 포이베의 신력을 발휘했다.
그리고.
카아앙!
이 자리에 함께한 ‘특별한 인물’이, 카르타고의 검을 밀어냈다.
카르타고가 외쳤다.
- 샤를 아인하르트!
“버서커 카르타고.”
카르타고는 샤를의 등장에 크게 놀란 듯했다.
실제로 카르타고는 샤를은 직전에서야 발견했다.
카르타고는 이내 그 이유를 깨달았다.
- 라일 플라마. 네가 환술로 주위 시야를 가려 둔 것인가.
그것은 사실이었다.
라일은 마지막까지 전투를 포기하지 않았고, 화마(火魔)의 창날과 카르타고의 검이 부닥치는 순간 마력 파편과 흙먼지를 가장한 환술을 시전했다.
그러나 라일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는 의식을 잃었다.
키릴이 1초만 늦게 도착했어도, 라일은 다른 세 마법사처럼 몸이 두 조각으로 쪼개졌을 것이다.
한편 샤를은 카르타고에게 무차별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성기사들은 샤를의 공세에 놀라, 끼어들 엄두도 내지 못했다.
“저, 저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샤를은 그간 샹크리스 왕국에 머물며 키릴과 대련을 했다.
회복된 오른팔에 보다 빠르게 적응하기 위해서였다.
샤를이 판단하기로, 자신의 가장 훌륭한 대련 상대는 아틸라를 제외한다면 키릴이었다.
그리고 키릴과의 대련은 상당한 효과가 있었다.
샤를은 오른팔의 적응을 완벽하게 마쳤다.
카르타고도 그것을 느꼈다.
- 샤를 아인하르트. 마침내 오른팔의 힘을 되찾은 것인가.
그의 투구 속에서 나직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샤를이 입꼬리를 올렸다.
“뭐가 그리 즐거운 건가. 카르타고.”
- 이 세계가 예정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