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 신세계의 흔적
아틸라 일행은 수오미 왕국 북쪽 관문을 넘어, 탈리 왕국에 도착했다.
아틸라는 이곳에서 오르피나의 세 번째 성물을 찾을 계획이었고.
순조롭게 확보했다.
“역시 여기 있었군.”
아틸라가 히죽 웃으며 세 번째 성물을 손에 쥐었다.
성물의 형태는 팔찌.
이로써 아틸라는 목걸이, 귀걸이, 팔찌의 세 가지 성물을 확보했다.
‘남은 건 반지뿐인가.’
오토가 소리쳤다.
“히익! 진짜 그게 성물이라고? 이, 이렇게 간단하게 손에 넣을 수 있단 말이요!”
오토가 놀라는 것엔 이유가 있었다.
오르피나의 첫 번째 성물인 ‘목걸이’는 키클롭스의 감옥 안에 있었고.
일행은 그것을 손에 넣으려다 메피스토펠레스의 공간 환술에 빠졌으며.
종래엔 버서커 카르타고, 그리고 라일의 몸을 장악한 메피스토펠레스와 격전을 벌였다.
아울러 아틸라는 카르타고를 상대하며, 처음으로 버서커의 힘을 각성했다.
두 번째 성물을 획득한 장소는 샹크리스 왕국의 바라키엘 신전.
그곳에서 일행은 둥지를 튼 상급 악마, ‘나가라자 탁샤카’와 싸웠고.
이때 역시 아틸라는 버서커의 힘을 드러냈다.
동료를 향해 공격성을 표출하던 아틸라를 떠올린 오토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아틸라가 말했다.
“넌 쉽게 찾아도 난리냐.”
“그, 그도 그렇잖수! 이번에 세 번째 성물을 찾는다 해서 내 얼마나 긴장했는지 알기나 하는 거요!”
“왜 긴장을 해.”
오토가 복장이 터진다는 듯 소리쳤다.
“성물을 찾을 때마다 아틸라 님이 버서커인지 정신병자인지 아무튼 그냥 보름은 못 잔 눈깔마냥 시뻘개져가지고 적이고 동료고 가릴 것 없이 미친놈처럼 검을 휘둘러 대지 않았소!”
“뭐? 미친놈?”
아틸라의 얼굴이 험악하게 변했다.
화들짝 놀란 오토가 카스피 뒤로 달아났다.
“히익! 아틸라 님이 또 때리려 한다!”
“뭐, 뭐야 영주 나리! 왜 이리 오는데!”
호리호리한 체격의 카스피 뒤에 숨을 수 있을 리 없건만, 어떻게든 몸을 감추려 애쓰며 오토가 외쳤다.
“이, 이참에 동료들 입장도 좀 생각해 보슈! 이번 성물을 찾으며 아틸라 님이 확 꼭지가 돌아 버릴까 봐 내 얼마나 긴장했는지 아쇼! 술은 아주 그냥 독째로 들이부어도 끄떡도 안 하는 인간이 어떻게 자기 능력 하나 조절을 못하냐고!”
“저 새끼가 진짜 뒤질라고. 너 오랜만에 좀 맞자.”
아틸라가 오토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이번엔 진짜로 호되게 맞을 거라 생각했는지 오토가 까마귀처럼 비명을 질렀다.
웬일로 카스피가 오토의 편을 들었다.
“자, 잠깐 아틸라! 여, 영주 나리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뭐?”
“아틸라가 버서커가 되면 정말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 아틸라는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나, 난 진짜로 전에 죽을 뻔했다고! 그때 난쟁이 왕 아저씨가 나서 주지 않았다면 정말……!”
버서커 카르타고와의 첫 전투 때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날, 이성을 잃은 아틸라는 카스피를 거의 죽일 뻔했었다.
“빌어먹을.”
아틸라는 오토를 붙잡는 것을 그만뒀다.
바토리가 말했다.
“그만들 하려무나. 손쉽게 세 번째 성물을 찾았으니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 아니더냐. 아틸라도 이전에 벌어졌던 일들 때문에 충분히 괴로워하고 있느니라.”
“괴로워하긴 누가.”
“또 그렇게 모난 소리를 하는 게냐. 언제쯤 네 감정에 솔직해질 셈이더냐.”
“됐고. 찾던 물건 찾았으니 바로 나간다.”
일행은 탈리 왕국 윅시프 백작령 북부의, 어느 별장 안에 들어와 있었다.
말이 별장이지 이곳은 아주 훌륭한 성이었다.
오르피나의 세 번째 성물은 이곳의 지하실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었는데.
재미있는 사실은 윅시프 백작 가문은 이 지하실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는 거였다.
‘이곳은 원래 다른 영주의 성이었으니까.’
수십 년 전, 이곳 영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윅시프 백작은 성을 갈취해 자신의 별장으로 삼았다.
그런데 지하실의 존재는 전 영주만이 아는 비밀이었고, 그는 마지막까지 저항하다 장렬히 전사했다.
그래서 이 지하실은 수십 년 동안 아무도 찾지 않는 곳이 되었다.
그리고 아틸라 일행이 별장을 찾았을 때, 놀랍게도 이곳엔 살아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근데 어쩌다 이렇게 성안의 사람들이 몰살된 거요?”
복도로 나오자마자 오토가 물었다.
아틸라가 중얼거렸다.
“난들 알겠냐.”
아무리 별장이라도, 이 성은 언제든 윅시프 백작이 다녀갈 수 있도록 평소 많은 인원이 머무르는 곳이다.
하인들은 물론이고, 상당한 숫자의 병력도 이곳에 주둔하고 있다.
그것엔 분명한 지리적 요인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북쪽으로 며칠 올라가면, 서에서 동으로 길게 이어지는 대국경이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대국경(大國境).
남부의 여러 왕국과, 북부의 대제국을 가르는 국경.
즉, 탈리 왕국은 남부 왕국 중 가장 북단에 위치한 왕국 중 하나다.
‘소설 속 샤를도 대국경을 넘어 보진 못했지.’
그러나 샤를은 탈리 왕국을 점령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북부 대제국 못지않은 신세계에 발을 들이게 된다.
그곳이 바로 아틸라가 지구로 돌아가기 위해 제1목표로 삼았던 장소.
요정섬이다.
‘지구라.’
아틸라는 여전히 지구로 돌아가겠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물론 아버지의 꿈 이후, 그 목적이 다소 퇴색된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보는 세상은 진짜가 아니니까.’
아버지가 했던 그 말은 아틸라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러나 아틸라는 포기하지 않았다.
직접 지구로 돌아가 두 눈으로 확인하고, 결론을 낼 것이다.
그는 어머니와 고양이의 존재가 허상이라 인정할 수 없었다.
“근데 정말 지독히도 당한 것 같소. 대체 무슨 괴물이 다녀간 건지.”
복도 곳곳엔 시체들이 늘비했다.
성 밖도 마찬가지였다.
많은 병사들이 참혹한 모습으로 널브러져 있었다.
반쯤 뜯어먹다 버린 시체도 한둘이 아니었다.
“바토리 아가씨. 이것도 다 대격변의 전조라는 거요?”
“글쎄다. 시체만 봐서는 명확한 판단이 어렵구나.”
그때였다.
“엥? 이거 암피테르 이빨 자국 같은데?”
펀치의 입에서 폴짝 뛰어내리며 도롱뇽이 말했다.
도롱뇽은 늘어져라 낮잠을 자고 있었기에, 이제서야 시체를 발견했다.
“암피테르라고?”
아틸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뜯긴 자국을 봤을 때 파충류일 거라 짐작은 했다.
그러나 암피테르일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암피테르는 송곳니가 길고 두껍다. 이런 모양으로 잘리지 않아.’
그러나 도롱뇽은 확신했다.
“이건 암피테르가 맞다. 송곳니 모양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나머지 이빨 자국이 똑같은걸. 그러고 보니 아가리도 좀 작군.”
암피테르는 중상위종의 용족이다.
아틸라는 도롱뇽의 말을 믿기로 했다.
용족의 특성은 같은 용족이 더욱 잘 알아보는 법이니까.
게다가 도롱뇽은 용중용, 드라코니안이 아니던가.
“마계와 명계에 이어, 용계마저 중간계와 겹쳐지기 시작한 것 같구나.”
바토리의 말에 아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암피테르는 오직 용계에서만 살아가는 순혈종.
모든 용족의 정점인 드래곤과 친척뻘이 되는 종이다.
“세계선의 붕괴가 시작된 지 일 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용계가 중간계와 겹쳐진 게 그리 놀랄 일은 아닐 것이야.”
바토리의 말이 맞다.
오히려 마계와 명계에 비해 느지막이 겹침이 발생한 것에 의문을 가져야 할지도 모른다.
‘아무튼 귀찮게 됐군.’
암피테르는 포악한 종이다.
몇 마리의 암피테르가 중간계로 넘어왔는지는 모르지만, 인간의 고기 맛을 본 녀석들은 머지않아 추가 사냥을 시작할 거다.
“어이 도롱뇽. 시체들을 빠짐없이 살펴봐라. 몇 마리의 암피테르가 왔다 간 건지 확인해.”
정신 교육이 두려웠는지 도롱뇽은 아틸라의 말을 따랐다.
펀치가 도롱뇽의 뒤를 쫓았다.
나머지 일행도 두 팀으로 나뉘어 성 곳곳을 살폈다.
바토리가 말했다.
“흐응. 너도 참 선수가 다 됐구나.”
“뭐?”
“그렇게나 나와 단둘이 있고 싶었더냐.”
아틸라는 한숨을 뱉었다.
할망구. 또 시작이군.
“그래. 이렇게 해 주길 원했던 것이냐.”
바토리가 아틸라의 팔에 팔짱을 끼었다.
아틸라는 굳이 바토리를 밀어내지 않았다.
“야만전사야.”
“왜.”
“좋으면 좋다고 말해 보려무나.”
“좋긴 뭐가 좋아.”
“그럼 싫다는 말이더냐.”
바토리가 아틸라의 팔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부드러운 감촉에 아틸라의 몸이 저도 모르게 경직됐다.
그것을 느낀 바토리가 배시시 눈을 흘겼다.
“흐응. 너도 사내는 사내로구나.”
그러고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자, 그러지 말고 한번 말해 보려무나. 혹시 아느냐. 내 기분이 좋아지는 말을 해 주면, 내가 너에게 더 많은 기쁨을 선사해 줄지 말이다.”
“필요 없다.”
“진심이더냐.”
“그래.”
“흐응. 무정한 사내 같으니.”
그러면서도 바토리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이렇게 아틸라와 단둘이 대화할 수 있는 것에서 소소한 행복을 느꼈다.
“야만전사야.”
“또 왜.”
“철혈귀검과 카스피 말이다. 요즘 수상한 낌새가 느껴지지 않더냐.”
“낌새?”
“아무래도 둘 사이에 무언가가 있는 것 같구나.”
“그건 지난번에 아니라고 판명되지 않았냐.”
“그날로부터 벌써 한참의 시간이 지났느니라. 아울러 인간의 마음이란 갈대처럼 쉽게 흔들리곤 하지.”
그때 카스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아틸라! 바토리이이이!”
카스피가 달려왔다.
“아틸라! 여, 영주 나리와 내가 찾았어!”
“뭘.”
“그 암피테르인가 뭔가 하는 거! 시체 한 마리를 발견했어!”
세 사람은 서둘러 달렸다.
저만치 오토, 펀치, 도롱뇽이 모여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엇. 야만 미물 왔다. 이거 봐봐. 이 녀석 좀 신기한…….”
도롱뇽의 말을 무시하며 아틸라는 파충류의 시체를 살폈다.
‘이게 암피테르라고?’
암피테르를 닮긴 했지만, 달랐다.
일단 체격이 터무니없이 작고, 송곳니도 발달되지 않았다.
그러나 나머지 생김새는 암피테르에 상당히 가까웠다.
무엇보다 날개의 모양이 닮았다.
‘암피테르가 맞긴 한 것 같은데.’
고개를 갸웃하던 아틸라는 문득 특이점을 발견했다.
아틸라의 눈에 부릅 힘이 들어갔다.
“이건……?”
암피테르의 목엔 조각난 가죽끈이 드리워져 있었다.
“이거 봐 야만 미물. 내가 곰탱이랑 저쪽 수풀 속에서 주워왔다.”
그제서야 아틸라는 도롱뇽을 돌아봤다.
도롱뇽의 앞엔 잘게 끊긴 가죽끈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아틸라는 가죽끈 조각을 들고 암피테르에게 다가갔다.
예상대로 암피테르의 몸 곳곳엔 가죽끈이 지나다닐 만한 자국이 남아 있었다.
마치 군마처럼.
아틸라는 확신했다.
‘이 암피테르는 사육되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용계에서만 살아가는 순혈종, 암피테르가 사육이라니.
‘암피테르는 사육될 수 있는 종이 아니다.’
순혈종의 용족은 자아가 비대하게 발달돼 있기 때문.
하지만 눈앞에 드러난 증거는, 이 암피테르가 군마처럼 사육된 존재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대체 누가.’
아틸라는 고민했다.
암피테르를 사육할 수 있을 지성 종족을 떠올려 봤다.
그러나 없었다.
남부 대륙의 그 어떤 지성 종족도, 암피테르를 사육할 수 없다.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제국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