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만든 세계 속 광전사가 되었다-247화 (247/425)

247. 다섯 개의 세력

검붉은 갑주를 입은 거구의 전사.

그의 투구 뒤로 피처럼 붉은 머리카락이 아무렇게나 흘러내렸다.

아니, 그건 정말로 피에 젖은 모습인지도 모른다.

- 알폰소 카스티야.

전사가 말했다.

인간의 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듯한 이질적인 음성.

알폰소가 억지로 입을 떼어 물었다.

“네놈들은…… 대체 무엇이냐……. 무엇이길래 카스티야 왕국을……!”

- 죽을 것인가.

전사의 검이 알폰소를 똑바로 겨눴다.

- 아니면 영원히 싸울 것인가.

가공할 중압감이 알폰소를 짓눌렀다.

검이 몸에 닿지도 않았건만, 알폰소는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저런…… 괴물이……!’

괴물.

그 단어를 떠올린 알폰소의 머릿속에 누군가의 얼굴이 스쳤다.

수개월 전 치러졌던 샹크리스 왕국의 토너먼트.

그곳에서 단신으로 크레센시아 성기사들의 3개 팀을 무너뜨리고, 우승을 차지했던 자.

핏기 없는 입술이 그 이름을 읊었다.

“검은늑대의 아틸라…….”

그 순간 거구의 전사가 검을 휘둘렀다.

알폰소의 머리가 몸에서 분리됐다.

* * *

“버서커 카르타고와 검은 기사들이 카스티야 왕국을 점령했다.”

라일이 말했다.

그의 맞은편에 앉아 술병을 들이키며 아틸라가 물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아틸라 일행은 수오미 왕국 북쪽 관문 도시의 어느 여관에 와 있었다.

숙박을 위한 방문은 아니다.

원래 일행은 북쪽 관문을 빠르게 통과하려 했다.

아틸라에겐 오르피나의 나머지 성물 두 개를 찾는다는 목적이 있었고, 지금부터 그것을 위한 본격적인 여정을 시작할 셈이었으니까.

추가로 버서커의 힘을 활용하고 통제하기 위한 물건, 즉 ‘체력을 상승시키는 아이템’과 휴대가 편한 ‘독극물’도 마련할 생각이다.

‘이무기의 독은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그런 생각으로 어서 수오미 왕국을 벗어나려 했는데.

놀랍게도 북쪽 관문 앞에서 라일을 만났던 것.

‘북쪽으로 이동할 것 같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틸라.’

라일은 아틸라에게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며 잠시 시간을 내줄 것을 부탁했다.

이야기를 듣는 것쯤 별문제가 아니었기에, 아틸라는 그 말을 따랐다.

물론 라일이 품 안에서 꺼낸 술이 무척 맛이 좋아서이기도 했지만.

“버서커 카르타고는 카스티야 왕국을 시작으로, 다른 왕국의 힘을 넘볼 거다.”

그렇게 말한 라일은 중앙 마탑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설명했다.

“센트럴 왕국에 검은 기사들이 출현했다는 말은 기억하고 있겠지.”

“물론.”

아틸라는 기억했다.

물의 정령왕 나이아드를 만나기 위해 ‘라쿠나 야르비’와 함께 청마탑을 방문했던 날.

일행은 라일을 만났다.

라일과, 청마탑주 쿨리 야르비는 중앙 마탑의 호출을 받아 떠나려는 길이었고.

그날 밤 라일은 은밀히 아틸라를 찾아와, 센트럴 왕국에 검은 기사의 무리가 나타났었다는 정보를 전했다.

아울러 검붉은 갑주에 붉은 머리칼을 지닌 사내, 버서커 카르타고가 출현했다는 말까지.

“그때도 말했듯, 카르타고는 군대를 모으고 있다.”

“그것의 본격적인 시작이 카스티야 왕국이라는 건가.”

“그런 셈이지.”

아틸라는 카스티야의 알폰소 왕자를 떠올렸다.

샹크리스 토너먼트에서 오토에게 밀려 낙마했던 사내.

그러나 그건 알폰소가 약하기 때문이 아니다.

알폰소는 강력한 기사다.

‘다만 오토가 더욱 강했을 뿐.’

오토는 이미 평범함을 아득히 넘어섰다.

아틸라 일행 안에 워낙 규격 외 괴물이 많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평범해 보이지만, 오토는 어느 왕국에 내놔도 쉬이 적수를 찾을 수 없는 강자다.

‘아무튼 그 알폰소도 목숨을 잃었겠군.’

소설 속에서 알폰소는 카스티야 왕국을 점령한 샤를의 부하가 되어, 나름의 활약을 펼치는 인물이다.

그는 샤를의 곁에서 함께 싸우며, 영웅 등급까지는 아니지만 나름 상당한 경지에 이르게 된다.

“카르타고가 아직 센트럴 왕국을 접수하진 못했나 보군.”

“그렇다. 중앙 마탑엔 인간 같지도 않은 괴물들이 수두룩하니까. 아무리 카르타고라도 중앙 마탑과의 정면 격돌은 피하고 싶겠지.”

라일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직까지는 말이야.”

아틸라는 라일의 말뜻을 알아챘다.

“머지않아 센트럴 왕국이 격전지가 될 거다, 이 말인가.”

“빠르든 늦든 카르타고 입장에선 중앙 마탑을 쳐야 할 거다. 대격변이 시작되기 앞서, 자신을 위협할 수 있는 가장 강대한 4대 세력 중 하나일 테니까.”

“4대 세력?”

아틸라의 되물음에 라일이 피식 웃었다.

“너 역시 알고 있으면서 묻는 것이 아닌가. 아틸라.”

“글쎄.”

라일이 말을 이었다.

“첫 번째 세력은 아인하르트 왕국이다. 샤를 아인하르트야 말할 필요도 없고, 궁정 마법사인 제롬 아그리피나의 실력은 지금도 일취월장하고 있다는 소문이더군.”

아틸라에겐 당연한 말이었다.

제롬은 소설 속에서 무려 ‘대마법사’의 경지에 이르는 인물이니까.

“중앙 마탑에서조차 제롬 아그리피나를 경계하고 있다.”

라일의 말은 사실이다.

물, 불, 대지, 바람의 4개 속성을 연구하는 4대 마탑과, 그 중심에 선 중앙 마탑으로서는.

어느 마탑에도 소속되지 않은 마법사인 제롬이 불편한 존재다.

“게다가 대장군 피핀 에드발이 이끄는 정예 병력은 제롬 아그리피나와 함께 아인하르트 왕국의 쌍벽이라 불리고 있다. 듣기로 피핀 에드발과 그의 직속 기사단은 제롬 아그리피나의 마력이 담긴 특별한 무기를 사용한다 하더군.”

“잘도 알아냈군. 그런 정보를.”

이 역시도 아틸라는 알고 있었다.

‘제롬은 순수하게 4대 속성 마법을 연구하거나, 자신의 강함만을 추구하는 마법사가 아니다.’

제롬에겐 분명한 목적이 있다.

그것은 바로.

‘샤를을 크리엘도라 대륙의 패자(霸者)로 만드는 것.’

제롬의 모든 행동은 오직 그것만을 위한 것이다.

‘그런 제롬이라면 당연히 대격변을 치밀하게 준비하고 있겠지.’

소설 속에서도 제롬은 각종 물건에 마법을 깃들이는 연구를 꾸준히 진행한다.

얼마 전 칼날 산맥을 향하는 길에 샤를이 꺼냈던, 추위를 막아 주는 천 조각 역시 그중 하나.

‘제롬은 파우스트의 언데드와 싸운 전적이 있고, 카르타고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거기에 더해, 아틸라 일행을 통해 대격변의 존재마저 알게 되었다.

분명 제롬은 일행이 칼날 산맥으로 떠나자마자 본격적인 연구와 실행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것에 대한 결과물이 바로, 피핀과 정예 기사단의 무기인 것.

‘어찌 됐든 피핀의 정예 부대는 인간 외의 것을 상대로도 제법 효율을 낼 수 있게 됐다는 거로군.’

제롬은 거기서 그치지 않을 것이다.

아주 빠르진 않겠지만, 마법이 깃든 무기는 점차 늘어날 것이고.

궁극적으론 모든 금사자 기사단의 무기를 교체하는 것이 제롬의 목표일 터.

바토리가 눈을 흘기며 말했다.

“야만전사야. 왠지 넌 이번에도 알고 있었던 듯한 표정을 하고 있구나.”

“내가 보기에도 그렇군.”

그렇게 거든 라일이 이야기를 이어 갔다.

“카르타고를 위협하는 두 번째 세력은, 중앙 마탑을 필두로 한 5대 마탑의 마법사들이다.”

사실 카르타고 입장에서는 아인하르트 왕국보다 마탑의 마법사들이 더욱 껄끄러운 존재다.

병력의 숫자 면에서는 아인하르트 왕국이 압도적이지만.

‘그 안에서 카르타고와 데스나이트에게 위협이 될 존재는 소수에 불과하니까.’

그러나 5대 마탑은 다르다.

중앙 마탑을 제외한 4대 마탑주는 인간의 경지를 넘어선 강자들이고.

비록 탑주는 되지 못했지만, 각 마탑에서 순위권에 드는 마법사들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실력자다.

‘게다가 중앙 마탑.’

중앙 마탑의 마법사들은 강하다.

4대 마탑주 못지않은 실력을 가졌으면서 탑주의 자리는 귀찮아하는, 그런 이단아 같은 성향의 강자들이 중앙 마탑엔 상당수 존재한다.

“얼마 전 센트럴 왕국에 등장한 검은 기사, 아니 데스나이트들은 중앙 마탑의 마법사들에게 당해 도주했다. 그 뒤 카르타고와 함께 전열을 가다듬어 카스티야 왕국을 침공한 거지.”

“중앙 마탑에서는 놈들의 뒤를 쫓지 않은 건가.”

“쫓았다. 그뿐 아니라 센트럴 왕국은 주변 왕국과 연계해 카스티야 왕국을 물샐틈없이 틀어막았다. 따라서 카르타고는 한동안은 카스티야 왕국을 벗어나기 어려울 거다. 물론 그의 무력을 사용한다면 충분히 벗어날 순 있겠지만, 놈들의 이동 방향이 이쪽으로 고스란히 드러나겠지. 중앙 마탑과 인접 왕국들은 그것에 발 빠르게 대응할 수 있을 테고.”

라일의 말에 아틸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물었다.

“데스나이트들이 센트럴 왕국에 먼저 나타났던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지?”

“중앙 마탑의 실력을 가늠하려 한 것이겠지. 놈들은 센트럴 왕국과 중앙 마탑에 총공격을 가하려 한 것 같지는 않다. 카르타고로 추정되는 자가 목격되긴 했지만, 적극적으로 싸움에 임하진 않았다고 하니까.”

“그럴듯한 추론이군.”

그렇게 말하며 아틸라는 다소 꺼림칙한 기분을 느꼈다.

얼마 전 아틸라는 카르타고의 진정한 목적에 대해 고민한 적이 있었다.

‘카르타고는 나와 샤를을 자극하고 있다. 하지만 무엇 때문인가. 자신의 앞길에 가장 큰 방해물이 될 나와 샤를을 왜 제거하지 않는 거지.’

‘카르타고는 나와 샤를이 더욱 강해지길 원하고 있다.’

그러면서 아틸라는 샤를의 목적에 대해서도 생각했었다.

‘샤를의 목적은 전쟁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 그리고 그 안에서 인간의 삶을 사는 것.’

‘샤를은 패왕의 자리에 군림하려 한다.’

생각은 자연스레 대격변에 대한 것으로 확장됐다.

샤를은 요정과 악마의 피를 함께 가지고 있다.

그리고.

다가올 대격변은.

‘샤를이 지닌 대악마(大惡魔)의 피를 더욱 강력하게 발현하는 최고의 무대가 될 수 있다.’

고민 끝에 아틸라는 어떤 결론에 도달했다.

그것이 정말로 카르타고의 목적인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틸라는 보았다.

샤를에게서, 마치 미래를 엿보는 것처럼.

“카르타고를 위협할 세 번째 세력은 제국이다.”

라일의 말이 아틸라의 상념을 깨웠다.

카스피가 끼어들었다.

“하지만 북쪽의 대제국은 꽤 오랜 세월 남부 대륙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고 들었는걸.”

“카스피의 말은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 벌어지고 있는 대격변의 전조라는 것이 남부에만 국한된 일은 아닐 것이다.”

“대제국이 향후 어떻게 나올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거로군.”

“그 말대로다. 아틸라.”

제국(帝國).

아틸라에게도 미지의 세계인 그곳.

라일의 말엔 일리가 있었고, 아틸라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제국은 넓다.

남부의 모든 왕국을 하나로 합친 것보다 더욱.

제국의 칼날이 남쪽으로 겨눠진다면, 카르타고에겐 큰 위협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아틸라는 라일과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카르타고의 목적이 내가 생각한 것과 일치한다면.’

카르타고는, 제국을 단순히 경계하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마지막 네 번째 세력이란 것이 궁금하구나. 라일.”

그렇게 말하며 바토리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이어 모두가 예상했던 말이 라일의 입에서 나왔다.

“네 번째 세력은 아틸라, 너와 네 동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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