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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든 세계 속 광전사가 되었다-242화 (242/425)

242. 원념의 괴물 (2)

카스피는 목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에, 보석을 박아 넣은 것처럼 빛나는 두 눈동자.

오뚝한 콧날 아래 드러난 붉은 입술.

“바토리.”

바토리가 부드럽게 미소했다.

그런 그녀에게서, 지난밤의 취기 가득했던 모습은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산보라면 함께 가자꾸나.”

카스피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바토리는 자신의 백마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앞장서 말을 몰았다.

카스피는 묵묵히 바토리의 뒤를 따랐고, 그렇게 두 여인은 마을 밖의 초원을 향해 말을 몰고 나갔다.

바토리가 고개를 젖혀 하늘을 바라봤다.

“아직도 취기가 가시질 않는구나. 그래. 어젠 내가 너무 무리를 했지.”

바토리는 눈동자만을 굴려 카스피를 바라봤다.

“허나 즐거운 술자리였다. 그렇지 않느냐 카스피.”

카스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에 개의치 않으며 바토리가 말했다.

“철혈귀검은 아직 꿈속을 헤매고 있더구나. 시끄럽게 코 고는 소리가 벽을 뚫고 들어오는 바람에 내 통 잠을 자지 못했느니라. 물론 지난밤에 아틸라와 내가 철혈귀검을 짓궂게 놀리긴 했지. 그 탓에 술을 항아리 째 입안에 들이붓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그때를 떠올린 카스피가 희미하게 미소했다.

그 얼굴을 보며, 바토리도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너 역시도 상당히 마시지 않았더냐. 한데 어찌 된 일이더냐. 이전까지는 술을 많이 마신 다음날엔 쉬이 깨어나질 못하더니, 오늘은 무슨 바람이 들어 홀로 산보를 다 나선 것이더냐.”

“바토리. 난.”

바토리가 카스피의 말을 잘랐다.

“이대로 떠날 생각이었더냐.”

침묵이 일었다.

초원을 가르는 꼬리 긴 바람이 두 사람의 침묵 사이를 관통하듯 지나갔다.

바람에 밀려난 들풀이 사그락사그락, 소리를 냈다.

이윽고 카스피가 입을 열었다.

“난 하싸씬의 파문 살수야. 하싸씬은 날 노리고 있어. 그리고 그건 아틸라, 바토리, 영주 나리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상관없는 일이라 하였느냐.”

바토리의 얼굴빛이 차갑게 변했다.

“그것참 섭섭한 말이로구나.”

“바토리.”

“허나 카스피.”

바토리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애초에 네가 아틸라의 동료가 된 건, 하싸씬의 자객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었더냐.”

카스피는 즉답할 수 없었다.

바토리의 말은 사실이다.

카스피는 아틸라 제거 임무를 두 번 실패해 하싸씬에서 파문당했다.

그 인과로 카스피는 죽는 날까지 하싸씬의 살수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됐다.

그런 카스피에게 사바흐는 이렇게 말했다.

‘도살자를 따라가거라 카스피. 그자라면 널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바토리가 말한 대로다.

그때의 카스피는 아틸라를 방패막이로 이용할 목적으로 접근했다.

결과적으로 그 선택은 옳았다.

아틸라는 카스피를 제거하러 온 하싸씬의 마스터, ‘곡도의 압바스’를 제거했고.

이후 다른 살수들이 카스피 제거 임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 가장 강력한 저항력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

카스피는 아틸라를 이용할 생각으로 그의 곁에 머무르는 게 아니다.

아틸라는 카스피에게 특별한 존재가 됐다.

“부정할 생각은 없어. 바토리.”

“한데, 왜 이제 와 떠나려는 것이냐.”

대답을 듣고자 한 물음은 아니다.

바토리는 카스피의 생각을 알고 있었다.

“너 혼자 셰이카를 막아 보겠다는 것이냐.”

카스피는 입술을 움찔거렸다.

바토리의 물음은 자신의 생각을 대변하는 것이었지만, 무어라 답을 해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바토리가 다시 물었다.

“그것이 가능하다 생각하느냐.”

바토리는 조금씩 밝아지는 지평선을 봤다.

따스한 태양빛이 너른 초원을 달구기 시작했다.

바토리의 목소리도 그에 맞춰 다소 온화해졌다.

“난 셰이카 라딤을 잘 알고 있다. 셰이카는 대륙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일에 무관심하지. 한데 재미있구나 카스피.”

바토리의 눈이 카스피를 돌아봤다.

“그런 셰이카 라딤이, 굳이 널 제거하려 할 거라 생각하는 게냐.”

확신할 순 없다.

그러나 카스피는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존재한다면, 모른 척 동료들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다.

바토리가 말했다.

“만약 셰이카가 널 죽이려 했다면, 넌 이미 살아 있는 목숨이 아닐 것이다.”

카스피는 조금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일행엔 아틸라와 바토리가 있었으니까.

셰이카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아틸라와 바토리를 무시하고 자신을 죽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하긴 어려웠다.

이어진 바토리의 말이 의문점을 해결해 주었다.

“물론 나와 아틸라는 강하다. 제아무리 셰이카라 해도 나와 아틸라를 동시에 상대하는 건 상당한 위험을 감수하는 일일 테지. 허나 카스피. 살수인 네가 가장 잘 알고 있지 않느냐. 살수의 은밀한 전투법을.”

전사에게 전사의 전투법이 있고.

마법사에게 마법사의 전투법이 있듯.

살수에겐 살수만의 전투 양식이 있다.

‘암살.’

애초부터 살수의 전투는 정정당당함과는 거리가 멀다.

살수는 타깃을 특정하면, 자신을 숨긴 채 타깃의 빈틈을 탐색한다.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혹은 얼마나 불안정한 상황에 처해 있든.

그런 것은 중요치 않다.

‘살수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자신을 통제할 수 있도록 훈련받고, 실전에 투입된다.’

타깃 주위에 얼마나 많은 이가 있든 상관없다.

살수의 전투는 오히려 타깃을 호위하는 이가 많을수록 빛을 발한다.

가령 뛰어난 실력의 살수는, 백 명이 넘는 호위대를 뚫고 타깃에게 죽음을 선사하기도 한다.

호위대는 물론이고, 당사자인 타깃조차도 자신의 죽음을 감각하지 못하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서.

하물며 단주인 셰이카라면.

“카스피. 셰이카는 널 죽일 생각이 없는 듯하구나.”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닐지도 모른다.

“떠나지 말거라.”

“바토리.”

“네가 처음과 달리 아틸라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카스피의 뺨에 홍조가 어렸다.

“아울러 그건, 아틸라 또한 마찬가지다.”

카스피의 눈동자가 가늘게 흔들렸다.

그 눈을 보며 바토리가 말했다.

“아틸라는 널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 네가 변했듯, 그 역시 많은 것이 변했다. 그는 더 이상 자신만의 목표를 위해 움직이지 않고 있다.”

카스피도 알고 있었다.

아틸라는 변했다.

지금의 아틸라는, 자신뿐 아니라 동료들의 안위를 염려하고 있다.

‘그래서 더욱, 난 떠나야 해.’

이대로 카스피가 일행에 머무른다면.

아틸라는 다가올 카스피의 위험을 방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어쩌면 자신의 목표와, 목숨을 걸고서라도 카스피를 지키려 할지 모른다.

‘아니, 분명 그럴 거야. 아틸라는.’

카스피가 변한 것 이상으로 아틸라는 변했다.

“…….”

대화가 끊겼다.

한동안 말발굽 소리만이 새벽의 공기를 울렸고, 어느새 두 여인은 마을에서 상당히 벗어난 곳까지 이동해 있었다.

그러던 중이었다.

무언가가 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저건……?’

그것은 아침의 태양을 밀어 올리는 중인 지평선 너머에서 발견됐다.

수많은 다리를 벌레처럼 움직이며 다가오는 커다란 형체.

사실 다가온다는 표현은 마땅치 않았다.

그 형체는 두 여인으로부터 상당한 거리에 있었고, 간격 또한 좁혀지지 않는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그 생각은 몇 분이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괴물의 형체는 분명 다가오고 있었고 어느 순간, 무지막지할 정도로 속도를 높여 거리를 좁혔다.

선제공격을 가한 건 바토리였다.

거대한 마력의 창날이 괴물을 향해 쏘아졌다.

퍼어어어엉!

그러나 괴물은 놀랍게도 바토리의 마력 창날을 피했다.

기이한 움직임이었다.

바토리의 눈썹이 꿈틀댔다.

‘저것은 분명.’

좌우, 상하가 모두 비대칭인 그것은 온몸에서 뜨거운 증기를 발하고 있었다.

그것에 더해 시커먼 마기를 사방으로 흩뿌렸다.

마기(魔氣).

바토리가 주저 없이 선제공격을 감행한 이유이기도 했다.

“벨리알의 마기가 느껴지는구나.”

“벨리알이라고?”

무가치의 악마, 벨리알.

바토리가 알기로, 벨리알의 권능을 일부라도 부여받은 이는 버서커 카르타고와 살라딘 쿠르드밖에 없다.

하지만.

‘카르타고는 아니다.’

바토리는 카르타고를 관조했었다.

그런 그녀가 카르타고의 기척을 알아채지 못할 리 없다.

그렇다면 저것은.

화르륵.

카스피의 몸이 귀기로 타올랐다.

그녀는 어느새 말의 안장에서 벗어나 허공을 회전하고 있었고, 그림처럼 지면에 착지한 뒤 마기의 괴물을 향해 달렸다.

아무렇게나 반죽된 것처럼 울퉁불퉁한 몸체.

마찬가지로 아무렇게나 돋아난 팔다리.

길이도, 모양도, 모두 제각각이었다.

다만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건.

‘인간의 팔다리!’

귀안의 눈을 뜬 카스피는 보통의 사람은 볼 수 없는 것을 본다.

카스피는 보았다.

짙게 뿜어지는 증기와 마기 속에서 꿈틀대는 괴물의 민낯을.

‘저게 무슨……!’

그것은 마치 어느 거인의 거대한 손길이 인간의 시체 십여 구를 모아 통째로 반죽한 듯한 모습이었다.

카스피는 노르드의 대도시 리옹에서도 저것과 비슷한 걸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있는 괴물은,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흉측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오어어어어어!

괴물이 울부짖었다.

그러고는 미친 듯한 속도로 카스피에게 달려왔다.

얼핏 봐도 50개는 훌쩍 넘어 보이는 팔다리를 휘적휘적 휘두르며 달려오는 괴물의 모습은 카스피의 전의를 일부 상실하게 만들었다.

“카스피!”

퍼어어엉!

괴물의 몸 어딘가에서 폭발음이 들렸다.

이어 카스피의 몸에 보호막이 둘러졌고, 괴물이 비명을 질렀다.

바토리의 이번 공격은 통했다.

바토리는 날카로운 창날 형태의 마력을 날리는 대신, 장막 형상의 마법을 시전했다.

물론 이런 종류의 마법으로 치명상을 입히긴 어렵다.

‘치명타는 카스피의 몫이다.’

카스피도 그것을 알았다.

“바토리!”

카스피가 바토리 방향으로 달렸다.

괴물의 몸에서 엄청난 길이의 검은 팔이 쏘아져 바토리를 노렸기 때문이다.

촤르르륵!

귀기를 머금은 사슬낫이 괴물의 팔에 감겼다.

그것을 힘껏 잡아당긴 카스피의 몸이 나비처럼 떠올랐다.

‘평범한 무기로는 안 돼.’

카스피는 심장을 둘러싼 짙은 귀기를 느꼈다.

그것을 오른팔로 전이시켰다.

그 사이 바토리는 자신의 몸에 보호막을 펼폈다.

놀랍게도 괴물의 손은 보호막을 일거에 찢어발겼다.

바토리의 보호막이 지닌 위력을 잘 알고 있던 카스피로서는 경악할 일이었다.

‘위험해!’

그것이 카스피의 마음속 심지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카스피의 오른손이 변화했다.

네 갈래 붉은 귀수가 창날처럼 뽑아져 나왔다.

파캉!

풍차처럼 휘둘러진 귀수가 괴물의 팔을 잘랐다.

괴물의 팔은 바토리를 타격하지 못하고 떨어졌다.

바닥에 착지한 카스피는 괴물을 향해 달렸다.

괴물도 팔과 다리를 휘저으며 달려왔다.

그오어아아아!

괴물은 상당히 분노한 듯했다.

아니, 분노만이 아니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갖가지 감정이 괴물의 몸 안에서 뒤섞이고, 소용돌이쳤다.

“저게 무슨……!”

카스피는 귀안의 눈을 통해 그것을 봤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저건 대체 어디서 온 괴물이길래, 저렇게나 많고 짙은 원념을 드러내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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